Por favor: 바르셀로나 고딕지구 투어&비니투스
아토차 역에서 바르셀로나로 가는 이리요(iryo) 기차를 탔다. 이리요는 스페인의 고속열차 중 하나로 우리나라의 KTX와 속도는 비슷하지만 좌석은 더 넓어서 편했다. 반면에 KTX처럼 소음 관리는 하지 않는 듯했다. KTX에서는 객실 내에서 시끄럽게 통화를 하거나 소란스럽게 얘기하면 안내 방송이 나오는데, 바르셀로나로 가는 2시간 40분 내내 여기저기서 떠드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점점 정신이 혼미해졌다. 헤드폰을 끼고 귀가 아플 정도로 음악 소리의 볼륨을 높여 고막을 채우고 나서야 멀미 나는 말소리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바르셀로나역에 도착해서 숙소로 가는 교통편을 찾아 헤매는 데 한 세월, 매표 기계와 한참을 씨름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택시를 잡아 숙소로 갔다. 몸이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듯 피곤해서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당장 잠들어버리고 싶었지만, 곧 있으면 고딕지구 야경투어 예약시간이었다. 예약을 포기하고 쉴까 말까 머릿속으로 천 번을 저울질하다가 비교적 치안이 좋지 않은 고딕지구의 야경을 보려면 투어밖에 답이 없다 싶었다. 결국 천근만근 땅과 가까워지려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고딕지구로 향하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투어는 고딕지구 성 안나 부근에서 시작했다. 짙게 어둠이 내린 고딕지구의 골목골목을 소개해주고, 포토스폿마다 가이드님이 일일이 사진을 찍어줬다. 너무 꾀죄죄한 몰골이라 조금 민망하지만, 그래도 좋은 구도로 성심성의껏 찍어주시는 가이드를 생각해서 열심히 포즈를 취해보았다. 이렇게 사진을 많이 찍어주는 줄 알았으면 단장을 하고 나올 걸 싶었다. 투어 요금의 절반은 아마 사진 촬영비용인가 싶을 정도로 정말 진심으로 찍어주셨다. 골목을 지나다닐 때마다 고풍적이고 특이한 상점들이 많이 보여 시선을 빼앗겨 마지막 사람을 놓쳤다가 달려가 다시 행렬에 합류하는 것을 반복했다.
영화 '향수'의 배경이었던 산 펠립 네리 광장도 둘러보았다. 내전에 의한 폭격으로 상처 난 벽은 총격전이 얼마나 격력 했을지, 그 당시 사상자가 얼마나 많았고 시민들이 두려움에 떨었을지 가늠하게 해 준다. 다크히스토리 또한 역사이다. 내전의 아픔을 기억하기 위해 이곳은 당시 훼손된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음침한 밤의 기운이 더 음산한 분위기를 더하는 이곳은 현재 성당에 운영하는 초등학교가 운영되고 있다. 아이들에게는 이곳은 마음껏 뛰어노는 학교 운동장이다. 아픔으로 패인 광장이 홀로 쓸쓸하게 남아있지 않고 아이들의 뜀박질과 웃음소리로 채워져서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채로 광장을 빠져나왔다.
가이드는 우리를 한 왕궁 앞 계단으로 모여 앉게 했다. 이곳은 15세기 그 유명한 대항해 시대에 콜럼버스가 첫 항해를 마치고 왕을 알현하기 위해 올랐던 계단이라고 한다. 항해를 마치고 돌아온 콜럼버스가 된 기분으로 계단에 앉아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한국에서 스페인까지 거리는 콜럼버스의 항해보다 더 긴 여정일 것이다. 스페인에 대한 해설을 하다가 자연스럽게 스페인 와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가이드가 와인에 대해 설명하다가 갑자기 고개를 숙여 가방을 뒤적거렸다. 그러더니 사비로 준비했다며 와인 보틀을 꺼내는 것이다. 계속되는 설명에 뇌가 과부하가 오는 와중에 동공이 확장되며 모두가 탄성을 내질렀다. 종이컵에 스페인산 화이트 와인을 한잔씩 따라주었다. 고딕지구 왕궁의 야경을 보며 와인을 음미할 수 있었던 뜻밖의 낭만적인 순간이었다.
투어가 끝난 후 한국에서부터 앓던 비염이 심해져 근처에 있는 약국에 들렀다. Hola(올라)라고 인사해볼까 싶었지만 훅 들어온 'Hi'에 나도 'Hi'를 외쳤다. 아직 빈약한 스페인어와 영어 실력으로는 도저히 비염약을 설명할 재간이 없어, 파파고의 힘을 빌렸다. 그런데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혔다. 번역에 오류가 있었던 건지 약사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와 핸드폰 화면을 번갈아 보며 뭐라고 말했다. 당황한 나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머뭇거리다가 냅다 코를 가리키며 콧물이 흐르는 시늉을 하고, 이어서 목을 잡고 콜록콜록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그제야 머리 위에 전구가 밝혀진 것처럼 표정이 밝아진 약사는 의기양양하게 약을 꺼내주었다.
약을 소중히 챙겨 비니투스로 갔다. 워낙 유명한 맛집이라 예상대로 웨이팅이 있었다. 바깥에 준비된 의자에서 잠시 대기를 하다 보니 금방 우리 차례가 왔다. 안내해 주는 안쪽 테이블에 앉았는데 밀폐된 공간이라 공기가 안 좋았는지 간헐적으로 기침이 새어 나왔다. 스페인에 와서 지금까지 배운 스페인어를 많이 써보고 싶었지만 생각보다 기회는 많이 없었다. 관광이 주 수입이고 수재들이 당연하듯 관광업에 뛰어들 만큼 관광국가인 스페인에서는 외국인에게 당연하다는 듯 영어로 말을 했다. ¡Hola, Buenos días! (올라, 부에노스 디아스)라고 인사해야지 하고 다가가도 그들은 늘 먼저 Hi를 던졌다. 심지어 그들은 대부분 영어를 곧잘 했다.
이제 내 기침은 거의 발작 수준으로 고조되어 주위 테이블에서 식사를 멈추고 걱정스레(나도, 본인도...) 바라보기 시작했다. 민망함에 마음이 급박해졌다. 메뉴판을 들고 온 웨이터에게 냅다 외쳤다. "¡Agua, por favor!(아구아 뽀르빠보르!" 물 좀 주세요! 그것이 내가 스페인에 와서 처음 내뱉은 스페인어였다. 'Deme agua, por favor(데메 아구아 뽀르빠보르)' 또는 'Me da agua, por favor(메 다 아구아 뽀르빠보르)'가 '나에게 물을 주세요'라는 뜻으로 완전한 문장이었겠지만 기침과 기침 사이에 말을 겨우 뱉은 나에게는 풀문장으로 말할 여유가 없었다. 거의 기침처럼 말이 쏟아졌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영어에 please에 해당하는 por favor로 예의라도 지켰다는 것에 의의를 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직원이 금방 가져다준 Agua(물)로 바디랭귀지로 사 온 약을 먹었다. 약과 물로 다스린 심신으로 꿀대구와 새우요리, 이베리코 스테이크와 클라라를 주문했다. 꿀대구는 입에서 말 그대로 꿀처럼 입에서 살살 녹았고, 레몬이 들어간 산뜻한 맥주 클라라는 몸 컨디션 때문에 맛만 보았는데 해산물과 곁들여 먹기에 그만이었다. 약이 센 건지 한 모금 마신 맥주가 약과 환장의 화학작용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참을 수 없는 졸음이 몰려왔다.
지하철을 타고 그라시아역에 내려 그라시아 거리를 걸어 숙소까지 걸어가는 길에 가우디의 까사 바트요와 까사 밀라의 외관을 구경했다. 뼈와 해골 모양으로 지어져 일명 '뼈로 만든 집'으로 불리는 카사 바트요는 지금 봐도 혁신적인 디자인이었다. 까사 밀라는 몬세라트 산에서 영감을 얻어 물결이 이듯 구불구불한 바위 모양의 외벽이 인상적이었다. 바위 산이 연상되는 카사 밀라를 보고 '모티브가 된 몬세라트를 실제로 가보면 어떨까? 가우디는 몬세라트의 풍경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고, 어떻게 자연을 건축물에 담았을까? 나도 몬세라트에서 가우디와 비슷한 감상을 느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스치며, 문득 그 산에 꼭 가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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