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여행] 미완의 약속, 빛의 숲

la luz: 엘 그롭&사그라다 파밀라아(성 가족 성당)

by viajera 비아헤라

우리는 흔히 색깔을 나타낼 때 '빛'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한다. '빨간색', '파란색'이라 하지 않고 '붉은빛', '푸른 빛깔'이라고 표현할 때가 있는 것이다. 돌이켜보며 주로 자연이 드러내는 색을 표현할 때 그렇다. 예를 들어 노을이 질 때 '붉은색 하늘'이라 하지 않고, '붉은빛으로 물든 하늘'이라 하고, 남색 하늘을 '쪽빛 밤하늘'이라 부르며, '파란색 바다'보다는 '푸른 빛깔 바다'라 말한다.


엄밀히 따지자면 자연의 색을 빛으로 표현하는 것은 지극히 이해가 된다. 색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빛이 사물에 흡수되고 반사하며 생기는 스펙트럼이기 때문이다. 지난번 글의 키워드였던 naranja(오렌지)를 예로 들면 오렌지가 주황색인 것은 다른 파장은 모두 흡수하고 주황색을 반사했기 때문이다. 주황색을 싫어해서 주황색이라니, 정말 아이러니하다. 이런 모순은 다른 것은 다 흡수하고 영어만 반사했던 내가 최근 다시 영어공부를 시작한 것과 닮아 있다.


반면 스페인어는 '빛'은 'luz(루즈)', '색깔'은 'colores(꼴로레스)로 구분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색은 빛이 만들어낸 언어이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빛깔은 이미 'la luz'에 함의되어 있고 할 수 있다.




구엘공원을 내려오는 길에 빠에야 맛집 'El glop(엘 글롭)이 있어 들어갔다. 이베리코 스테이크와 빠에야, 그리고 샹그리아를 시켰다. 샹그리아는 레드 와인에 레몬 같은 과일을 넣어 먹는 스페인식 샴페인인데 자칫 느끼할 수 있는 음식들과 곁들여 먹으니 입안이 상큼해지며 입맛을 돋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맑은 포도주처럼 찬란한 빛깔이 주는 분위기가 있었다. 레드와인이 가까이 가도 수심을 전혀 알 수 없는 쪽빛 바다라면, 샹그리아는 헤엄치는 열대어와 엷은색의 모래바닥까지 다 보이는 에메랄드빛깔 바다랄까? 바다가 붉은빛이었다면 이런 색이었겠구나 싶은 영롱한 빛깔이었다. 긴 나무 숟가락으로 샹그리아를 천천히 저으니 동동 떠있던 과일들이 열대어처럼 유영했다.



잔뜩 부른 배를 소화시킬 겸 바르셀로나 골목길을 구경하며 성당까지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sagrada família(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한국어로 하면 성 가족 성당으로, 예수와 마리아, 요셉 3명의 성 가족에게 봉헌된 성당으로 가우디 생애 후반부를 바친 가우디의 유작이다. 이 성당을 건축하던 중 근처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 미완의 작품으로 남았다. 현재 3개의 파사드(외벽) 중 영광의 파사드와 18개의 탑 중 예수탑을 짓는 공사가 아직 진행되고 있다. 가우디 서거 100주기를 기념하여 2026년에 완공하는 게 목표라고 한다. 미완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방문했을 때도 크레인 두 개가 높이까지 올라가 성당을 짓는 공사를 하고 있었다. 비록 가우디는 없지만 가우디의 설계대로 건축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는 것만으로도 감회가 새로웠다.


내부로 들어가는 순간 시작되는 빛의 향연이 외부세계의 소란스러움을 단절시켰다. 이게 진정 사람이 지은 건축인가 싶게 충격을 받아 입을 헤벌리고 두리번거렸다. 나무 기둥과 가지 모양의 기둥들이 천장을 향해 뻗어 있고 기둥이 숲을 이루고 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쏟아져 내리는 빛이 이곳을 신이 머무는 숲에 들어온 것 같았다. 창에서 쏟아지는 빛은 방향에 따라 햇살을 담뿍 받은 나뭇잎이 반짝이는 생명력 있는 초록빛 같기도 하고, 지친 석양이 마지막 힘을 짜내 뿜어내는 아스라한 태양빛 같기도 하다. 가우디는 자연으로 건축을 했다. 나는 종교가 없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신의 자연 창조를 이곳에서 이해하게 되었다. 성당에 들어서는 순간, 가우디는 나에게 신이었다.



빛이 뿜어내는 자연의 빛깔에 압도되어 잠시 예배석에 앉았다. 예수님 주위를 둘러싼 la luz와 파이프 오르간의 묵직한 멜로디가 성스러움을 극대화시켰다. 종교는 믿지 않지만 신기하게도 마음이 차분해져 한참을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빛만을 바라봤다. 기도에 서툰 나 대신에 빛이 기도를 들려주는 기분이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에 가면 찾아봐야 할 것이 두 가지가 잇다. 먼저 뒷문 쪽에 세계 각국어로 쓰인 기도문이 있다. 한눈에 보이진 않지만 자세히 찾아보면 '오늘도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적힌 한국어를 발견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바로 스테인드 글라스에 있다. 동그란 창에는 성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하나하나 읽어 내려가다 보면 'A. KIM'이라 적힌 창문을 찾을 수 있다. 바로 한국인 최초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Andrew Kim Taegon)이다. 괜스레 반가워 창문 아래에 서서 새겨진 이름을 한참 올려다보았다.



빛의 숲에서 나와 외벽을 둘러보았다. 파사드는 돌로 쓴, 조각으로 그린 성경 그 자체였다. 성경 내용을 잘 모르다 보니 오디오 가이드를 들어도 감흥은 크게 없었지만 그 규모와 세밀함에는 정말 혀를 내둘렀다. 심지어 가우디 사후 파사드 조각을 맡은 조각가는 사실적인 표현을 위해 실제 사람의 본을 떠 조각을 했다고 하는데, 아래 두 번째 사진의 파사드는 죽은 신생아의 얼굴을 본떠 새겼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이 조각이 죽음과 예술의 경계에 대해 묻게 했다.



성당 내부와 파사드까지 둘러보았지만 뭔가 아쉬움이 남았다. 성당 규모가 워낙 크기 때문에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 것이었다. 사진으로 볼 때만 해도 체감하지 못했지만 성당의 내부 천장 높이는 무려 60미터, 현재까지 지어진 탑 중 가장 높은 성모 마리아 탑은 138m였던 것이다. 성당 근처 공원에서 한눈에 성당 뷰가 들어온다는 뷰포인트를 찾아갔다. 삐죽삐죽 튀어나온 크레인과 함께 한 폭의 엽서처럼 성당이 한눈에 보였다. 다시 바르셀로나를 찾게 된다면 그때는 크레인도 없고 3개의 파사드와 18개의 탑으로 온전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보겠지. 그러나 지금 내가 보는 것은 오직 이 순간에만 존재하는 '미완의 약속'이었다. 내일이면 오늘과는 또 다를 성당을 지그시 눈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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