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의 죽음 - 톨스토이
요 몇 년 간 대한민국의 저조한 독서율에 큰 기여를 하고 있지만 대학생 땐 나름 민음사의 고전문학 시리즈를 즐겨 읽었다. 딱히 고전에 심취해 있었다기보단, 어쨌든 문학은 “이야기”니까 부담 없이 읽혔고 내가 경험할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것이 좋았다. 삼십대 중반에 걸쳐 있는 지금, 고전이 결코 편하게 읽히는 책이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20대에 읽었다면 왜 한 남자가 죽어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 책이 고전인가에 대해 납득이 가지 않았을 거다. 부와 명예를 좇다 어느 날 운 나쁘게도 내상을 입어 죽게 된 남자의 이야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읽고 말았을 짧은 책.
이반에 뒤지지 않게 부와 명예를 열심히 좇는 삶을 살아가는 직장인이 된 지금, 이 책은 단순히 고통에 관한 책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몇 페이지 되지 않는 이 짤막한 책은, 대신 꽤 묵직한 질문들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당장 내일 병이 들어 죽게 되어도 후회 없는 삶을 살았는가? 내 죽음은 어떤 모습이었으면 좋겠는가? 죽음의 순간이 달라진다면 삶을 돌아보는 관점도 달라질까?
갑자기 병상에 눕게 된 이반은 고통의 나날들을 보내며 끊임없이 왜 자신에게 이런 시련이 왔는지에 대한 답을 찾는다. 죽음은 필연적이지만 그 필연성을 이해하며 살아가는 인간은 극히 드물 것이다. 더군다나 삶의 제2막을 준비하며 한창 들뜬 이반에게 찾아온 이 비극적 운명은 필연은커녕 개연성도 느껴지지가 않았을 것이다. 도저히 처벌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 이 고통을 겪으면서 이반은 스스로가 인생을 잘못 살아서 그런가 하는 의심을 한다. 그러나 끝내 본인은 그저 살아야 하는 대로, 올바르고 품위 있게 살아왔다며 애써 이 의심을 외면한다. 스스로의 삶을 부인하느니 억울한 고통을 마주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사실 병마가 잘못 산 대가라고 한들 덜 아파지는 건 아니기도 하고.
나 역시 내일 죽게 된다 한들 지나온 삶에 대한 후회는 없다. 이건 내가 과거에 만족한다기보다, 과거를 후회하는 일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장의 생사와 상관없이 바꿀 수 없는 영역이므로. 얼마 전에 본 ‘미지의 서울’이라는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거울을 보며 “어제는 끝났고 내일은 멀었고 오늘은 아직 모른다”라는 말을 되새기며 하루를 시작하는데 이 문장이 정말 와닿았다. 어제는 끝나 버렸고, 과거는 흘러가 버렸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시간에 대해 후회하는 건 지금의,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낭비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다만 내가 해야 하는 건, 그리고 할 수 있는 건 다가올 미래에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뿐. 그리하여 언젠가 과거가 될 시점들의 후회를 줄일 수 있도록.
그럼 죽음 이후에 영영 잃게 되는 미래에 대해서는 아쉬울까? 삶에 의욕 없는 사람처럼 보일까 봐 남들에게는 그렇다고 하겠지만, 사실 또 뭐 그렇게 아쉽진 않다. 물론 삶에서 더 갖고 싶은 것들은 많지만, 이만하면 지금까지 열심히 살았고 어차피 죽을 거라면 지금 죽어도 딱히 여한은 없다. 어쩌면 의식 저 깊은 곳에서는 내일 당장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게 아닐까 싶다. 이반에게도 죽음은 깨달음의 순간과 함께 찾아왔다. 불가항력의 죽음이 이반을 초연하게 만들었다고 하는 게 더 맞을 것 같지만. 스스로 그런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하기엔 너무 거창하고 오만하겠지만, 어렴풋하게 삶의 유한성을 인지하고 있다고 하면 적당할 것 같다. 사람 일은 당장 한 치 앞을 모르고, 삶은 꽤 불공평하기 때문에. 가까운 이들에게 인사할 수 있는 시간 정도만 주어진다면 내일 죽어도 괜찮을 것 같다. 죽고 싶진 않지만 죽어도 좋다.
어쩌면 죽음이 두렵기보다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내 삶의 종료를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이 두려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생사를 알 수 없는 한낱 인간으로서는 오늘날의 평균 기대 수명 정도를 바라보며 주어진 여생을 또 열심히 살아가야겠지. 그리하여 언제인지 모를 필멸의 그 순간이 오는 날까지, 할 수 있는 한 생의 날들을 가꿔가야지. 여한 없는 죽음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