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듬타는 고양이

스위스 바젤

by vicai



흠뻑 젖고 말았다.

호텔이 바로 맞은편이라 다행이지.

빗줄기는 손에 꼽을 정도로 굵었다. 중앙역에서 비가 그치길 기다리다가 안 되겠다 싶어 냅다 뛰었다.

길 하나 건넜을 뿐인데 비는 그새 상반신을 다 적셔 버렸다.

틈새 수납을 한다며 캐리어 제일 밑바닥에 우산을 끼워넣은 자의 최후였다.

꽤 오랜 시간을 동동 거렸더니 시간이 제법 흘러 있었다.

소심한 여행자라 처음 가보는 도시는 늘 무섭다.

해가 져도 괜찮을까?

호텔에서 제공해 준 무료 트램 티켓을 들고 살금살금 나가본다.


오후5시가 넘은 시각이라 100여개나 있다는 바젤의 뮤지엄 관람은 엄두도 못 냈다.

대신 라인 강변을 따라 걸었다. 우리나라에도 강은 많지만 강가에 걸친 해를 보는 건 아주 오랜만인 듯싶다. 해에서 먼 곳부터 서서히 까매져 간다. 다리 아래 울창한 나무 너머 보이는 낯선 집의 창문이 흥미롭다. 낮은 집들 사이 솟아오른 뾰족한 성당의 그것이 여행을 실감케 한다. 잠시 멈췄던 비가 다시 내렸지만 트램 티켓은 주머니에 찔러 넣고 한손에는 우산을 쥔 채 흩뿌려지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오래오래 걸었다.

유럽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나라는 스위스였다. 이탈리아에서 출발한 열차가 스위스로 들어서는 순간, 두 눈에 가득 담기던 설경을 잊지 못한다. 그 이후에 본 취리히, 바젤, 베른 등 도시의 모습도 매력적이었다. 인위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자연과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 좋았고 그렇게 경쟁하지 않아도 우린 이렇게 행복해, 하는 듯한 자신감이 좋았다. 마주치는 사람들의 맑은 웃음이, 관용의 꼭대기에 있는 어마어마한 그 풍경이. 스위스를 여행하면 날씨는 추워도 따뜻한 기운을 받았다.


트램을 타고 달려 광장에 도착했다.

비는 조금씩 더 내려 우산을 써야만 할 정도가 되었다. 현지인들은 대부분 우비를 입었거나 우산을 쓰지 않은 채였다. 광장에서는 공연을 하려는지 무대를 세우고 리허설이 한창 이었다. 반대쪽 끝에선 소세지 골목이 열렸다. 많은 부스가 있었음에도 이곳을 소세지 골목이라 칭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말 그대로 부스 가득 소세지만 팔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게를 고르는 것이 무의미했다. 그나마 의미를 찾으려면 갈색 소세지, 하얀 소세지 중 선택하면 되었다. 한국의 닭꼬치부스를 가져다주고 싶었다.

소탈하게 서서 맥주와 함께 소세지를 뜯는 사람들 사이로 스며들었다. 아주 짠 소세지를 사니 아주 맛없는 호밀빵 하나를 같이 줬다. 소세지를 한 입 베어 물고 나서야 빵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여기에 서서 저 무대의 시작을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다른 곳을 좀 더 둘러볼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는데 어디에선가 또 다른 사운드가 겹쳐 들렸다. 공연을 하는 곳이 여기만이 아닌가 싶어 둘러보니 광장 반대편 골목이었다. 구경도 할 겸 방향을 틀었다.

이상하게 골목이 작아질수록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음악은 여러 곳에서 들려, 작아졌다 커졌다 했다. 오늘 무슨 날인가 보다.

길마다 작은 무대들이 곳곳에 세워져 있었는데, 그 무대들은 각자의 음악소리를 방해하지 않는 반경 내에 위치해 각자의 음악을 뽐내고 있었다.

어느 무대는 재즈, 어디는 악기공연, 어느 곳은 그루브 가득한 음악들.

그냥 발길이 닿는 곳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면 귀를 호강시킬 수 있는 그런 시간이다. 사람들은 각자 본인이 좋아하는 음악이 들리는 무대에 가서 한껏 심취한 표정으로 음악을 즐겼다. 곳곳에 있는 맥주바, 와인바에서 한잔씩 곁들여 가며, 물론 우산은 쓰지 않은 채로, 모두가 음악에 빠져있었다.


두 귀를 쫑긋 세우고 걷다가 음악이 나오면 또 잠시 멈췄다가, 또 걷다가 멈췄다가.

평소 자주 듣지 않는 음악이라 더 신났다. 생 라이브는 진정 사람을 흥분시키는구나!

매우 인상적인 바젤의 첫인상이었다. 고요하며 현대적인 도시로만 여겼는데.

걸음을 빨리, 때로는 느리게 바꿔가며 어딘지 모를 바젤의 한 골목길을 마음껏 즐겼다.


골목마다 각기 다른 뮤지션들이 재즈틱하거나 펑키한 음악을 계속해서 쏟아낸다. 거리 곳곳 마다 들어서있는 간이무대 위에 우리 팀, 그리고 그 다음 팀. 무대 위 쉼 없이 이어지는 연주와 내리는 비를 기꺼이 맞으며 골목을 메운 사람들. 아낌없는 찬사가 비마저 밀어내고 맥주바, 와인바, 소세지 부스가 시즈닝을 더한다. 목요일 밤인데 대체 무슨 일. 주민들도 개의치 않고 창문 바깥으로 빼꼼히 내민 고개를 들썩인다. 테두리에서 맴돌다 빠른 리듬을 뽑아내는 무대 가까이로 들어섰다. 활짝 웃는 중년의 여성 옆으로 내 어깨가 더해진다. 순간 밴드의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동양인이라서 일까, 그는 나를 몇 번 흘끔거리다 씩 웃어주고는, 다른 멤버들과 눈짓을 한다. 뚱두두둥, 잠시 멈춘 음악소리, 그리고 이내 들려오는 외침.


“웰컴 투 바젤!”


그들은 나를 보고 웃었다.

아. 너무나 선물 같은 저녁이다.








음악이 들려올 때 손이나 발이 절로 까닥인다면, 그것의 흐름에 따라 몸을 흐느적거릴 수 있는 우스운 용기를 가지고 싶다. 그러한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앞과 뒤를 계산하지 않고 내지르는 사람이 많았으면 한다. 마지막은 언제나 벅찰테니. 그럼 다 같이 기본 스텝을 익혀둬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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