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혼행의 기억
첫 해외여행이 유럽배낭여행 이었다면 두 번째 해외여행은 첫 혼행이었다.
당시 오후 네시 반 출근 새벽 두시 퇴근, 주말근무 평일 휴식의 독특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기에
동행자를 구하는 일은 생각할 수 없었다.
외국말도 모르니까 모습이라도 한국과 비슷한 곳이 낫겠다 싶었고 비행시간 짧은 곳을 고르려니 도착지는 자연스레 일본으로 정해졌다. 이 때 까지만 해도 내게 여행은 인생의 아주 큰 이벤트 같은 것이어서, 유럽여행 이후 몇 년간은 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대학생활 동안 짬짬이 한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모아 떠났던 유럽여행의 스케일이 큰 탓이었을까. 이제 사회에 발 디딘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바짝 벌어야지 뭘 써, 그런 마음 이었다.
들어온 회사는 남을 쉴 때 일하니 남들이 여행가지 못할 때 가는 것이 가능했다. 말도 안 되는 출퇴근 스케줄의 장단점이었다. 이걸 적극 활용해 비수기에 여행을 다녀오는 선배들의 모습을 보고 지금이 기회일 수 있겠구나, 판단이 섰고 바로 실행에 옮겼다. 여행의 설렘을 다시 끌어안을 수 있다는 생각에 혼자인 것이 불편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못했다. 원래 닥쳐봐야 정신 차리는 타입이다.
아주 오래전의 여행이지만 첫날만큼은 생생히 기억난다.
오후 두시 경 도쿄역 에서. 멘탈이 털릴 대로 털려 있었다.
입국심사부터 들어오는 일본어 공격에 더해 부담스럽게 넓은 공항에서 길을 잃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다 차분히 해결하면 되는 일들 이지만 그 때는 심장이 어찌나 나대던지.
1.하루5명 이상과 대화하기
2.일본어 공부한 거 사용해 보기
등의 계획을 야심차게 세우고 갔었는데 공항에서 도쿄역 오는 데만 족히 15명과는 대화한 것 같았다. 어줍잖게 묻기에는 성공해도 답을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겨우겨우 도쿄역에 도착했지만 미리 찾아둔 식당은 어째서 주변을 뱅뱅 돌아도 찾을 수가 없는 건지, 수려한 길치력은 남의 나라에서도 유감없이 실력을 발휘했다.
주린 배를 쥐고 거리를 휘휘 돌았다. 밥을 먹는 손님들이 훤히 보이는 식당에 들어갈까 싶다가도 유리창에 진지하게 휘갈겨 쓴 한자들에 쪼그라들어 버리고, 저기 저 식당으로 들어가 볼까 기웃거리다가도 아저씨 손님이랑 눈이 마주쳐 버린 순간 쌩 고개를 돌렸다. 게다가 한쪽에서는 아까 그 식당을 기필코 찾아야겠다는 눈치 없는 마음이 슬금슬금 피어올랐다. 일본에 도착한지 몇 시간 만에 만보 이상의 걸음이 채워지고 있는데, 배고파, 돈이 있어도 쓰지를 못해, 드륵드륵 존재감 팔팔 뽐내는 캐리어를 던져버리고 한국으로 뛰어가고 싶었다.
그렇게 역 주변을 끝도 없이 뱅뱅 돌다 해질녘 겨우 들어간 곳은 햄버거를 파는 가게.
신상품이라며 내놓은 메뉴 김치버거에 눈물이 날 뻔했다.
햄버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날 먹은 햄버거는 행복하게 맛있었다.
몸속으로 탄수화물과 단백질이 들어가니 조금씩 다시 힘이 나기 시작했다.
여행 첫 날을 이렇게 끝낼 순 없지, 사진이라도 찍어두자 싶어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앵글 귀퉁이로 뒤편의 일본학생 세 명이 보였는데, 내가 사진 찍는 모습을 보고 키득대는 중이었다.
세루카, 세루카!
황급히 카메라를 껐다.
바닥과 주문을 받았던 점원의 얼굴만 응시한 채 햄버거를 문 입을 빠르게 놀렸다.
식당에서 밥 먹는 게 두려워져 버렸다.
출발하기 전 편의점에서 빵을 샀다. 가방 구석에 넣어 다니며 배고플 때 마다 뜯어먹기 시작했다.
여행자가 많은 관광지가 차라리 편했으나 한국인이 많은 곳도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3일차 아침이었다. 눈을 뜨자 이제는 나름 익숙해진 파란 천정벽지가 보인다. 내일이면 돌아가는 날이다.
순간, 이 맛있는 나라에 와서 음식 하나 제대로 못 먹고 가는 게 억울해졌다. 여행의 목적이 이게 아닌데, 한끼라도 성공해 보리라 마음을 먹고 찾아간 곳은 독서실처럼 옆이 칸칸이 막혀있어 혼자 식사를 하기에 더없이 좋은 라멘집 이었다. 종이에 적어 주문을 하고 라멘을 받아들었다.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일본에서 일본음식을 먹었다. 여행 3일 만에 처음 이었다. 라멘은 말도 안 되게 맛있었고 별것 아닌데도 한없이 뿌듯했다.
장하다, 장해!
다 먹었는데도 일어나기가 싫었다.
온 몸의 긴장이 탁 풀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너무 오랜만에 느껴보는 성취감이었다.
보송한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어깨 끝까지 가득 채워졌다.
이제 눈동자는 느리게 굴러간다.
식탁 위를 손가락으로 까딱, 까딱, 여유롭게 두드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도 나를 보지 않았고 각자의 그릇에만 집중한 모습이었다.
저기요, 저 혼자 밥 먹었어요, 저기요?
여행 3일차, 밤 9시 경이었다.
계속된 빵 식사에 넉넉하게 남은 경비를 만지작거렸다. 이제야 준비가 되었는데 돌아가야 한단다. 이 큰 마음을 쥐여 준 이 도시의 품에 더 있다 가고 싶은데 너무 늦게 적응을 했단다.
괜찮아, 이것도 여행이야.
그게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