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육성기
나는 RPG게임을 좋아한다. 메이플스토리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15년 동안 꾸준히 해왔다.
육성 게임을 좋아하는 내가, 그 게임 속의 캐릭터는 그렇게 아끼고 잘 키워주고 예쁘게 꾸며주었던 내가,
나한테는 너무 소홀하지 않았나 하는 마음으로
내가 내가 키우는 RPG캐릭터라면?이라는 질문을 한번 던져본다.
퀘스트 전부 다 깨기
- 나는 메이플을 할 때 예전에는 나한테 주어지는 자잘한 퀘스트도 모두 다 깨곤 했었다. 시간이 오래 걸려도, 너무 힘들어도 그걸 다 하나씩 부수어나가는 게 참 좋았다.
그게 지금 내 삶에도 적용이 되어있는 것 같다. 쉽게 쉽게 갈 수 있는 방법이 있지만 그냥 주어진 퀘스트를 완료할 때까지 그걸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힘들기도 하고 엄청 지루해서 권태기가 오기도 하는데, 그 퀘스트가 완료되어 퀘스트 창에서 지워지는 순간, 더 해야 할 퀘스트가 없는 순간이 주는 짜릿함을 잊지 못한다.
그래도 돈이 생기면 점점 재료를 시장에서 사기도 하고, 파티원을 구해서 같이 몬스터를 잡기도 했다. 점점 퀘스트를 깨 가는 방식은 진화하지만 퀘스트를 깨는 것 자체를 즐기는 편이었다.
퀘스트
인생에 힘든 일이 생기면, 퀘스트라고 생각하자. 오늘 하루 회사를 출근하는 것도 다 퀘스트이다.
그 퀘스트를 끝내고 온 나에게, 꼭 보상을 주자. 보상 없이 다음 퀘스트로 넘어갈 때 빡쳤던 기억이 있지 않던가.
전직 전 권태기
보통 전직을 하고 나서, 5,10 레벨이 되고 나서는 새로 갈 수 있는 사냥터가 생기거나 무기를 업그레이드해서 더 센 몬스터를 잡기 때문에 경험치가 빨리 오른다. 그런데 전직하기 직전, 아니면 레벨 X9 쯤에는 경험치 통이 가장 커지기 때문에 잡을 수 있는 몬스터가 주는 경험치가 동일해서 레벨이 오르는 속도가 더디다. 엄청 지루하다. 처음에는 30분에 1 업을 하던 게 2시간을 잡아야 하는 시기도 있었다.
인생도 똑같은 것 같다. 막 새로운 학교에 진학하고, 대학교에 가고, 취업을 하고, 이직을 하고, 새로운 기술을 배울 때쯤에는 나에게 조금 더 높은 스텟의 무기가 생기고 스킬이 늘어나서 쉬워지지만, 점점 익숙해진 루틴으로 사냥을 하다 보면 다시 이직을 하거나 좀 더 새로운 기술을 습득해서 사용해 보기 전까지 엄청 지루한 시간이 주어진다.
이 지루함이 너무 싫었는데, 메이플을 생각하니 인생의 진리 같고 너무나 당연하게 견뎌야 할 시기인 것 같다고 생각을 했다.
전직
나에게 1차 전직, 2차 전직, 3차 전직의 시기는 언제였을까?
내 생각에는 이 전직은 단순한 대학교, 직장과 같은 어떤 직급의 주어짐과는 다른 것 같다.
인생에서 진짜 깨달음을 얻고, 새로운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지는 순간들이 있다. 그게 전직시기인 것 같다.
0~29살까지 나는 1차 전직을 한 상태로 살아왔다면, 이제야 2차 전직을 하고 29살이 되어 30살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니면 메이플처럼 아직 29 렙 60%일지도..?!
책을 읽기 시작하고, 일기를 쓰기 시작하고, 여러 생각을 하고, 불안을 다루려고 노력하고, 나와 대화하기 시작한 이 시기는 나에게 정말 전직과도 같다. 전직할 시기가 되어 2차 전직 퀘스트를 정말 아프게 하고 있다.
원래 전직 퀘스트는 힘든 법이니깐. 잘 버텨봐야겠다.
HP와 MP
육성을 할 때 죽지 않기 위해서는 충분히 HP포션을 먹어줘야 하고, 스킬을 쓰기 위해서는 MP 포션을 먹어줘야 한다.
난 내가 무한 피통, 마나통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아니었다. 그건 레벨이 낮아서 레벨업을 하면서 다시 피를 채워주기 때문에 그런 거였다. 레벨이 점점 높아질수록 내가 직접 HP, MP 포션을 먹어주어야 몬스터를 잡을 수 있었고, 다쳐도 죽지 않을 수 있었다.
충분히 쉬어줘야 하고 충분히 잠자고 충분히 먹어주어야 한다. 그래야 어떤 공격이 와도 피가 깎여도 버틸 수 있다.
MP는 사회에너지와 같다. 나에게 스킬은 사회생활 액티브 패시브 스킬이다.
책을 읽고, 일기를 쓰고, 충분히 휴식을 취해주고, 생각을 하면서 나의 스킬에너지를 쌓아주어야 한다. 그리고 레벨이 오르면서 그 스킬을 다루는 법이 조금 더 나아질 것이다.
MP가 없으면 사람들과 대화를 잘할 수가 없는 것 같다.
공격력, 방어력, 회피력, 민첩성
나는 공격력과 방어력만을 키워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이기기 위해선 공격해야 하고, 다치지 않기 위해서는 무뎌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회피력과 민첩성을 높이는 것도 필요하고 그것도 재능이다. 그것도 능력치이다.
나에게 위험한 순간이 오면 회피력을 높여주는 옷을 입고, 아니면 다크사이트를 써서 숨어도 된다. 텔레포트로 피해가도 된다.
구덩이가 있을 것 같으면 점프를 하고, 조금 높이 밧줄이 있으면 조금 높이 점프를 했어야 한다.
그냥 무작정 앞으로만 가면 안 된다. 피하고 뛰는 것도 능력이다.
어떤 순간이 나에게 위험한 순간일지, 보스의 패턴을 분석하고 피하고 적재적소에 스킬을 쓰는 것과 같이 인생도 살아야 하는 것 같다.
그리고 레벨이 높아진다고 해서 덜 아픈 건 아니다. 물론 자연스럽게 늘어나는 능력치가 있지만, 레벨이 높아지면 그 레벨에 맞는 방어구와 무기를 착용해야 아프지 않다. 몸빵 하지 말자. 필요한 만큼 준비하고 치장하자.
일일퀘스트
메이플에는 일일퀘스트들이 있다. 예전에는 버섯 999마리를 잡아오라는 일일퀘스트가 있었고, 매일 초기화됐다. 아니면 데일리 출석 미션도 있었다. 마일리지 퀘스트도 있었다. 4차 전직을 하고 나면, 마을에 조금씩 다른 몬스터를 잡아가며 퀘스트를 하고 포인트를 얻는다.
나도 나의 일상 소소한 루틴들을 일일퀘스트를 하고 보상을 얻는다는 마음으로 해보는 건 어떨까 생각을 했다.
산책하러 20분 나가기. 아침에 7시에 일어나서 출석 도장 찍기. 물 마시기. 기지개 켜기. 일기 쓰기. 나는 일일퀘스트를 매일 하는 걸 참 좋아했는데, 나의 인생에 대한 일일퀘스트를 왜 재미있게 하지 못했을까?
메이플에서는 일일퀘스트를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보다 뒤처진다는 생각을 했으면서, 나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이 단순한 반복이 정말 중요하다는 걸 몰랐다.
직업
유명한 직업들이 있다. 기동성이 좋고 세고 요즘 많이 하고 파티원들이 좋아하는 직업.
그렇지만 나는 항상 비숍을 좋아했다. 궁수, 건슬링거, 지금은 썬콜.
서포터 역할을 좋아하는 나의 성격이 게임에도 항상 나와있는데, 그게 약하기만 해서가 아니고 정말 그 서포터의 역할을 좋아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캐릭터 꾸미기
메이플 캐릭터 옷을 입혀주는 건, 머리를 바꿔주는 건 수십만 원을 쓰면서 나를 꾸미는 건 잘 못했다.
나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서였을까? 메이플 캐릭터 옷 입혀주듯이, 예쁜 옷 입고 예쁜 머리 해서 기분 좋게 사진 찍듯이 나를 키워주는 건 어떨까.
투명 옷
투명 장갑, 투명 망토, 메이플엔 각종 투명 장비가 있고, 이걸 끼지 않으면 너무 못나서 가끔 부캐를 키울 때는 캐시템을 못 사주니 마을을 돌아다닐 때는 못생긴 장비템들은 벗고 다니기도 한다. 그런데 나 혼자 있을 때는 사냥을 해야 하니까 이것저것 모든 장비를 다 입었다.
결국 나 혼자 육성하는 시간이 참 많았는데, 그때는 남들 시선 신경 쓰지 않고 가장 나답게 해주는 모습으로 두고 사냥을 했었다. 지금도 같다. 나는 나와 함께하는 시간이 가장 많다. 나에게 가장 편하고 나를 가장 안전하게 해주는 모습으로 살자. 남들 시선 신경 쓰지 말고.
무한 노가다 공장
점점 메이플 육성이 부캐는 퀘스트 없이 정말 효율적인 루트로 141,200을 찍는 형태로 변해왔었다.
나도 그 효율을 쫓아서 정말 재미없게 뇌 빼고 게임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가장 재미있었던 메이플 육성은 본캐를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대로 탐험하고 퀘스트도 깨 가고 이것저것 시도해 가면서, 했던 그 때다. 안되면 될 때까지 해보고, 쉬어도 주고 친구들이랑 놀기도 하면서 키웠던 것처럼 나도 너무 효율적으로 인생을 살아가기보단 조금 더 비효율적이지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보는 게 어떨까 싶다.
이제는 메이플을 접었다.
메이플 대신 진짜 나를 육성하면서, 나에게 적절한 보상을 주겠다. 새로 얻은 스킬을 익혀 이 사회에서 잘 살아가고, 전직이 가까워 올 때 조금 지쳐가는 그 순간은 새로운 점프를 위한 기다림이라고 생각해야겠다.
전직 퀘스트는 힘들겠지만, 내가 한층 더 성장하는 때라고 생각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