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이 끝나고 남겨진 여운들
책방에는 공책이 두 권 있다. 책방에 들어온 사람들이 가장 오래 머무는 자리에 놓여있다. 하나는 오래전부터 놓아둔 『머물며 쓰다』로 이곳에 머물며 저마다 마음이 닿는 대로 생각을 남기는 공책이다. 그리고 올해 들어 공책 하나를 더 두었다. 마음에 남는 문장을 옮겨 적는 필사용 공책으로 『베껴 쓰다』로 이름 붙였다. 『이 글을 쓰는 건 당신이 두 번째입니다』라는 부제를 달아, 앞선 누군가의 문장을 옮기며 독자의 생각이 겹쳐지기를 바랐다.
한 달이 지나도록 필사 공책에는 아무 글도 없었다. 『머물며 쓰다』에도 새로운 글이 자주 남겨지지는 않지만 새로 놓은 공책에 대한 기대는 달랐다. 아이디어를 직접 내어 마련한 공책이라 마음이 더 쓰였다. 공책이 놓인 책상에 갈 때마다 표지를 펼쳤다 닫았고, 출근할 때도 퇴근할 때도 들여다보았다. 첫 장만 아니라 중간과 마지막 장까지 넘겨보기도 했다. 누군가 그곳에 오래 머무르면 기대가 커지기도 했고 어느 날은 공책을 살피는 기척이 있어서 돌아간 뒤에 가보았으나 남겨진 글은 없고 이름 그대로 비어 있었다.
먼저 써놓기로 했다. 스스로 첫 번째 기록자가 되어 이런 쓸모로 놓아둔 공책이라는 뜻을 알렸다. 그 뒤로도 기대와는 달리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표지를 열었다 닫는 일이 이어졌다. 그러다 어느 날, 공책을 넘기다 중간쯤에 글씨의 흔적이 언뜻 스쳤다. 한 장씩 천천히 넘기며 글이 적힌 쪽을 찾았다. 필사는 아니었다. 책방에 들러 떠오른 생각을 적어 둔 글이었다. 두 달쯤 되어가던 날 출근하자마자 그날도 책상 앞으로 갔다. 창문 너머 공책 위로 봄을 기다리는 햇살이 밝게 비추고 있었다. 두 손을 비벼 맞대며 다가섰다. 이번에는 표지를 넘기지 않았는데도 멀리서도 누군가의 손길이 머물렀다는 느낌이 들었다. 필사 글이 있었다.
『좋은 일이 오려고 그러나 보다』 박여름 작가의 에세이에 나온 문장을 필사한 글이었다. 우리 책방에는 없는 책이라, 누군가 직접 가져와 읽으며 옮겨 적은 글이 분명했다. 이후로도 다른 글씨체로 이 책의 몇몇 문장들이 이어서 적혔다. 독자들이 많이 찾아 인기 있고, 마음에 간직할 만한 문장이 많은 책이었다. 한창 많이 읽히던 때 이 책을 책방에 비치해 두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잠시 스치기도 했다. 하지만 책은 팔지 못했어도 공책에 쓰인 문장을 읽으며 잠시 위안이나 용기를 얻은 사람들이 있다면 그걸로 되었다.
“훌륭한 코끼리는 후회를 많이 하지. 덕분에 다음날은 전날보다 더 나은 코끼리가 될 수 있는 거야.”라는 문장이 남겨졌다. 책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아 찾아보니 『긴긴밤』에 나오는 문장이었다. 살아오면서 했던 수많은 후회와 후회하지 않기 위해 애써왔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이미 늦어버린 일들, 하지 못해 마음 한편에 남아있는 말들, 어찌할지 몰라 고민이 깊던 선택들, 외면하고 싶은 순간들이 사실은 지금의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회하지 않으려 애쓰기보다 그냥 받아들이면 될 일이었다. 후회가 쌓이는 만큼, 그 무게만큼 조금씩 지금의 내가 되어왔을 테니까.
어느 날은 정현종의 시 『방문객』의 한 구절이 남겨져 있었다. 지리산 둘레길을 걷다 시골 어느 집 대문에 걸린 빛바랜 액자에서 처음으로 만났던 시다. 공책에 남겨진 짧은 구절을 다시 읽으며, 이곳을 다녀간 흔적은 글귀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들어올 때 보이는 잠깐의 망설임, 진열된 책 앞에서 멈추던 걸음, 말없이 서서 책장을 넘기는 뒷모습, 아이에게 동화를 들려주는 낮은 목소리까지 이 모두가 이곳을 다녀간 소중한 인연이었다.
이후로도 많지는 않으나 공책에는 간간이 글귀들이 더해졌다. 두 계절을 지나 겨울이 되자 한때 책방을 뜨겁게 비추던 햇살은 이제 안쪽까지 깊숙이 스며들며 순해졌다. 그 빛을 오래 받아 공책의 표지는 조금씩 색을 잃어갔다. 『머물며 쓰다』는 짙푸르던 기운이 빠져나가 이제는 회색에 가까워졌고, 『베껴 쓰다』 역시 처음의 색을 짐작하기 어려워졌다. 그 자리에 놓인 시간보다 훨씬 오래된 물건처럼 보일 때도 있다. 내 모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요즘은 남겨진 글만큼이나 그 위에 겹쳐진 색의 변화를 바라보는 일도 작은 생각거리가 되었다.
내년에도 이들 공책 표지가 퇴색되어 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을까? 이 책방에서 일을 이어서 하게 될지, 못 하게 될지, 안 하게 될지 자못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