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이 남긴 글 Ⅲ

또 올게요

by 이른아침

올해로 책방에서 삼 년째 일하고 있다. 이제는 무슨 일을 언제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실수할 일도 드물다. 그만큼 마음은 편하지만 처음 여기에서 일하면서 가졌던 설렘이나 기대는 많이 남아있지 않다.


계산대 앞에 서서 손님을 기다리거나 서가에 꽂힌 책등을 바라보고 있으면 시간은 더디게 흐르고 지루하게 느껴지곤 한다. 책을 배달해 주시는 아저씨는 다른 분으로 바뀌었고 처음에는 데면데면했으나 이제는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오후에 책방 안으로 기울어 찾아오는 햇살이 지나는 자리도 눈에 익어 일상이 되었다. 화분에서 자라는 몬스테라와 관음죽의 잎만 보아도 물을 줘야 할 때를 알아차린다. 이곳의 많은 것들이 익숙해졌다.


일 년 단위 계약이라 책을 파는 일이 아니라면 더 머물 이유는 없었다.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었다. 욕심이 나던 일자리에 작년에 이어 두 번이나 지원했으나 거푸 떨어졌다. 면접에서 최대한 준비된 적임자답게 보이려고 애써 대답하고 개인적인 질문에는 답을 아꼈다. 자만하거나 비협조적인 태도로 비치지 않았나 면접과정을 되짚어보았다. 나를 증명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속상했다. 사실 지금도 잊지 못하고 부족하거나 보완할 점을 고민하고 있다. 책방에서 계속 일하게 되어 분명 다행인데도 어쩐지 실패한 사람처럼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기분으로 한 달이 지났다.


이런 무거운 마음을 달래려 『머물며 쓰다』로 이름 붙인 공책을 펼쳐보았다. 누군가 새로 남긴 글이 있는지 살피고 이미 읽은 문장이라도 다시 읽어보았다. 고객들이 이 책방에 머물며 마음을 추스르거나 새로이 다지는 글귀를 하나하나 읽다 보니 어느 때처럼 그들의 평안과 다짐이 온기로 전해졌다.


마지막 장까지 넘겨보니 공책은 아직 몇 장이 남아있었다. 그래도 새해가 시작된 만큼 가라앉은 마음을 털어내듯 새 공책으로 바꿔놓고 싶었다. 계산대 아래 수납장을 열자 짙푸른 표지에 『머물며 쓰다』가 선명하게 박힌 새 공책 예닐곱 권이 쌓여있었다. 그런데 내 시선은 그 아래 깔린, 회색으로 바랜 공책 하나에 끌렸다. 마치 긴 시간을 혼자 견뎌내느라 하얗게 변한 얼굴 같았다. 호기심에 끌려 홀린 듯 꺼내 들었다.


이 낡은 공책 역시 『머물며 쓰다』라는 제목만은 뚜렷했다. 수많은 손길과 마음이 거쳐간 모서리는 둥글게 닳거나 접혀 있었고 책종이들은 여러 번 펼쳐졌다 닫히기를 반복한 흔적처럼 서로 간격을 두고 벌어져 있었다.


아마도 책방이 처음 문을 열던 무렵부터 놓여있었을 것이다. 이곳의 시작이, 내가 함께 하지 않은 시간들이 여기에 담겨있을 듯했다. 2년 동안이나 일하면서도 이 공책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니 한심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 공책에 적힌 글들을 아끼고 새로운 문장이 채워지기를 은근히 기다리면서도 정작 날마다 서 있는 바로 곁 계산대 밑에 두고도 몰랐다. 옆에서 잠들지 못하고 잊힌 시간을 기억하며 다시 찾아주기를 바라며 버텨 온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첫 장을 넘겼다. 연거푸 서너 장을 넘기며 읽었다. 어떤 한 문장에 멈춰 섰다.


“또 올게요.”

정성 들여 꾹꾹 눌러쓴 짧은 인사말과 함께 미소를 머금은 얼굴 하나가 작게 그려져 있었다. 입꼬리가 가볍게 올라간 기분 좋은 미소였다. 점으로 표현한 눈은 웃느라 작아진 것처럼 보였고 일직선으로 그은 코와 눈썹마저 방긋거리듯 느껴졌다


누군가에게 이곳은 우연히 마주친 책방이 아니라 밝은 표정으로 다시 찾고 싶은 장소였다. 나에게도 그런 때가 있었다. 누군가 건네는 인사 한마디에 가슴 벅차고 책장을 정리하는 사소한 일에도 기쁨과 보람을 느끼던 시절이 있었다. 두 번의 낙방과 변화 없이 반복되는 책방의 일상에 빠져, 이곳을 더 찾고 더 머물고 싶은 공간으로 가꾸려 하지 않고 벗어나야 할 자리로만 여겼던 지난 한 달이 부끄러워졌다.


새로 발견한 오래된 공책 표지에 숫자 Ⅰ을, 다 채워진 공책에는 Ⅱ를 써놓았다. 앞으로 손님들의 마음으로 채워질 새 공책에는 Ⅲ을 힘주어 눌러썼다. 세 권을 나란히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먼저 이 책방을 다녀간 이들의 생각과 앞으로 머물 사람들의 마음이 서로 마주하기를 바랐다. 5년 전 “또 올게요”라던 약속을 지키려고 다시 찾아와 자신이 가졌던 옛 마음을 마주한다면 나 또한 기쁠 것이다.


공책을 가지런히 놓고 돌아서며 익숙한 서가를 바라보았다. 오후의 햇살이 지나가는 자리는 여전했다. 이번엔 무심하게 돌아선 책등 대신 나를 바라보고 있는 책 표지가 보였다. 책방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은 겨울의 찬 기운을 덥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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