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당신도 보일 겁니다
또 봄이 왔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아침 기온이 영하를 밑돌며 출근길에 옷깃을 여미게 하더니 어느새 한낮에는 20° 가까이 오른다. 남녘에서 시작된 꽃소식은 나라 곳곳으로 번져가고 들과 산에는 이른 봄꽃들이 드문드문 피어난다. 밭에서 겨울을 난 작물도 마찬가지다. 대파는 푸릇한 생기를 머금고 마늘과 양파에서도 봄기운이 느껴진다. 이쯤 되면 영락없는 봄이다.
이맘때 바람과 햇살은 창가에만 머물지 않는다. 자꾸만 마음을 들썩이게 해 집을 나선다. 멀리 가지 않더라도 발밑을 살피며 걷다 보면 매화와 산수유 같은 화려한 꽃 소식에 가려졌던 작은 새싹과 풀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집에서 이십 분이면 충분한 거리인데도 겨우내 찾지 않았던 곳으로 가고 있다. 개울을 가로지른 나무다리를 건너 야산 초입의 양지바른 어귀에 다다른다. 지난봄에도 작은 꽃들을 만났던 자리다. 우리 동네에서 가장 먼저 풀꽃을 만날 수 있는 나만의 장소다. 올해도 무사히 겨울을 건너 살아남을까. 꽃은 피었을까. 마음은 그 양지 녘에 먼저 가 닿는다.
기분 좋은 예감이 들다
꽃과 마주할 순간을 그리며 멀리서부터 한 곳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한 발걸음씩 다가선다. 작고 노란 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다. “오~ 꽃이 피었구나.” 쏟아지는 봄볕을 받아 꽃이 반짝인다. 어찌나 선명한지 본래 가진 노란색보다 훨씬 강렬하게 느껴진다. 눈부심에 홀려 한동안 바라본다. 작은 꽃을 만나면 자연스럽게 몸을 낮추기 마련인데, 나도 모르게 꽃 앞에서 무릎에 이어 엉덩이를 차례로 땅에 붙인다.
그때 서너 걸음 앞 산어귀 길목에서 나를 내려보는 인기척을 느꼈다. 흙바닥에 엎드린 내 모습이 진지했는지, 볼만했는지 그도 걸음을 멈추고 숨죽인 모양이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길을 막고 있었네요.”
멋쩍게 웃으며 몸을 일으키자. 무엇을 그리 들여다보고 있냐고 묻는다. 올라갈 때는 보지 못했다고 말하며 역시 허리를 숙여 자세히 살핀다.
“예, 꽃다지예요. 앞으로 선생님 눈에도 잘 보일 겁니다.”
그는 방금 꽃과 눈을 마주치고 이름을 기억하고 말았다. 스쳐 지나칠 풀 한 포기였을 꽃다지가 이제 누군가의 시선 속에 머물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든다.
꽃다지에게 작은 꽃은 삶이자 이름이다
그가 떠나자 곧 꿀벌 한 마리가 날아왔다. 꽃에 앉으려 하자 여린 꽃줄기는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휘청이고 만다. 그러자 벌은 자리를 잡지 못하고 꽃잎을 붙잡은 채 대롱대롱 매달린다. 꿀 한 모금만 달라며 매달리듯 보인다. 이렇게 이른 봄의 꽃다지는 줄기도 여리고 꽃도 작다. 작은 꽃 여럿이 다닥다닥 모여 작지만 하나의 꽃다발을 이룬다.
만약 작은 꽃 한 송이였다면 곤충의 눈에 잘 띄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꽃다지는 모두송이꽃차례를 이루며 모여 핀다. 한 송이로는 얻을 수 없는 시각적 효과로 곤충을 끌어들여 꽃가루받이 확률을 높인다. 치밀한 계산이자 간절한 바람이다. 내 눈에도 모여 있으니 훨씬 잘 보인다.
또한 꽃다지라는 이름도 작은 꽃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꽃’과 ‘다지’의 합성어로 보면서 ‘다지’를 ‘닥지닥지’라는 부사에서 가져왔다는 설명이다. 작은 꽃이 닥지닥지 모여 있으니 그럴듯하다. 한편 강아지나 송아지에서처럼 새끼나 아기처럼 작다는 뜻으로 쓰이는 ‘아지’를 붙였다는 주장도 있다. ‘꽃아지’로 부르다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발음하기 편하게 변형되었다는 해석이다. 맞고 틀리고를 떠나 어떤 설명이든 작고 여린 꽃다지의 모습을 잘 나타낸 이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내게도 다시 봄이 찾아왔다
꽃다지는 두해살이식물이다. 다른 식물들이 낙엽을 떨구며 겨울을 준비할 때 반대로 새싹을 틔운다. 새로 난 잎은 땅 위에 바짝 엎드려 찬바람을 견딘다. 그러다 봄바람이 불면 한발 앞서 꽃줄기를 올린다. 이른 봄에 첫 번째 꽃이 필 때는 사람 발등에도 못 미칠 만큼 작고 앙증맞다. 그러다 종아리 높이까지 커가며 봄철 내내 끊임없이 꽃을 피운다. 줄기 아래쪽에서 먼저 핀 꽃이 차례로 열매를 맺어간다. 여름이 되면 열매는 여물고 곧이어 땅에 떨어져 또 한살이를 시작한다.
오늘은 한살이 중에서 꽃다지가 새봄을 맞아 첫 꽃을 피우는 모습을 보고 있다. 이곳까지 오는 걸음마다 길가에 핀 작고 낮은 냉이와 광대나물 꽃들도 함께 해주었다. 꽃다지는 지난봄의 약속을 기억하듯 같은 자리에서 변함없이 나를 반겼다. 이들은 가꾸지 않아도 어디서든,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때를 맞춰 피어난다. 화려하지 않으나 말없이 제자리를 지키며 따뜻하고 아름다운 봄을 알린다. 비로소 내게도 새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