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른아침 May 19. 2024

걷잡을 수 없는 봄

찔레꽃 향기는 바람처럼 스쳐간다

꽃들이 피고 졌다. 추위가 채 꼬리를 내리기 전부터 여름 같은 더위가 시작되기까지 많은 꽃이 피고 졌다. 미처 마음이 따라갈 수 없이 서둘러 피고 졌다. 꽃이 피고 지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봄도 지나가고 있다. 꽃 피는 것만 살피다가 꽃이 진 뒤에야 봄이 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런 봄날이면 곧잘 걷잡을 수 없다.

     

이런 날은 찔레꽃 향기가 그립다. 집 근처에서 만나는 찔레꽃의 꽃잎은 아직 희고 맑으나 수술은 노란빛에서 갈색으로 짙어져 생기를 잃어가고 향기는 바람에 이끌려 속절없이 가버렸다. 온전한 찔레꽃을 만나려면 봄이 더딘 곳으로 가야 한다.

     

북쪽을 향한 골짜기가 그런 곳이다. 찔레꽃은 양지와 물가를 좋아하는데, 북쪽은 해 드는 시간이 짧아 선선하고 골짜기는 물이 흐르고 습기가 많아 찔레꽃이 무리 지어 자라고 더러 늦게까지 꽃이 피기도 한다. 찔레꽃을 보려고 가끔 찾는 골짜기가 있다. 이곳은 바라보는 곳마다 찔레꽃이요 걷는 곳마다 찔레꽃 향이 넘친다.

    

여기 골짜기도 한창때가 지나고 있다. 늦었다. 그래도 찔레꽃은 포도송이처럼 생긴 여러 꽃대에서 차례로 꽃이 피기 때문에 조금 늦었더라도 여전히 절정의 꽃을 만날 수 있어 좋다. 벚나무나 아까시나무가 한꺼번에 꽃을 피우는 전략과 차이가 있다.

     

찔레꽃은 꽃잎이 어떤 꾸밈도 없는 순백이다. 아직 피지 않은 망울 상태에서는 연분홍이다가 꽃이 피면서 점차 하얗게 변한다. 간혹 색이 변하지 않은 연분홍 꽃잎을 만나는 즐거움은 쉬 찾아오지 않는다.

    

수술은 수술대와 꽃밥으로 구성되며, 수술대 끄트머리에 달린 꽃밥은 그 안에 꽃가루가 가득 들어 있는 꽃가루주머니다. 찔레꽃 수술은 처음엔 노랗다가 차츰 색이 변하는데, 수술대는 하얗게 꽃밥은 갈색으로 변한다. 이런 색 변화가 꽃가루받이를 마쳤기 때문인지 단지 시간 경과에 따른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노란 수술 꽃에는 벌이 찾아와 오래 머물러 있으나 색이 변한 수술 꽃에는 찾아오더라도 바로 떠나는 걸 보면 색이 변한 수술에는 곤충이 찾는 꿀이나 꽃가루가 없음이 분명하다. 아무튼 노란 수술의 유혹은 견딜 수 없다.

    

어린 시절 찔레꽃에 대한 기억에 꽃이나 향기는 없다. 그러나 찔레 순을 꺾어 먹던 추억은 여전히 남아서 지금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순을 잘라 껍질을 벗겨 먹는다. 단맛이 넘쳐나는 요즘에도 드러내지 않는 이 은근한 단맛에 끌린다. 새순을 꺾을 때는 가시도 피해야 하지만 진딧물은 더 조심해야 한다. 진딧물도 우리가 어릴 적에 그랬던 것처럼 찔레 순의 단맛을 찾아온다.

     

찔레꽃 어린순은 부드러워 동물의 먹이가 되기 십상이다. 순에 있는 단물을 먹기 위해 진딧물이 몰려와 번식하면 지저분하고 끈적거려 동물들은 새순 먹기를 꺼린다. 그러다 순이 딱딱해지고 가시도 거세지면 동물도 먹을 수 없게 되고 진딧물도 즙을 빨아먹을 수 없어 떠난다. 어린 순을 지키기 위해 작은 것을 내주고 큰 것을 지키는 찔레꽃의 생존전략이다. 그래도 진딧물이 너무 많아 나무 즙을 빨리면 찔레꽃이 몸살을 앓으며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다

     

진딧물이 있는 곳에 개미가 있기 마련이다. 진딧물의 꽁무니에서 나오는 단물을 개미가 좋아한다. 개미는 단물을 대가로 연약하고 아무런 무기도 없는 진딧물을 다른 곤충에게서 지켜준다. 더불어 개미 때문에 찔레꽃의 잎을 먹으려는 곤충도 접근이 어려워 찔레꽃도 이득이다. 개미는 진딧물과 찔레꽃이 고용한 파수꾼인 셈이다.

     

찔레꽃은 생명력이 강해 다양한 장미품종을 만들기 위해 접붙이기 대목(臺木)으로 쓰이거나 직접 교배 대상이 된다. 또한 인류는 기원전부터 여러 장미품종을 재배하고 개량, 육성해 왔다. 개량의 역사도 오래고 많은 품종이 개발되어 화려함에서는 앞설 수 있어도 찔레꽃 향기에 견줄 만한 장미를 만나본 적이 없다. 찔레 향은 인간이 흉내 내거나 넘볼 수 없다.


<피기 전 꽃봉오리, 노란 수술, 흰색과 갈색으로 변한 수술> <꽃의 구조(출처: 두산백과)> <찔레꽃 새순에서 공생하는 진딧물과 개미>

매거진의 이전글 유혹하는 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