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타그램, 관계를 설계하다
최근 인스타그램에서 남자 혹은 여자 친구를 만났다는 사람들이 눈에 좀 보인다. 누군가는 단순한 우연의 일치라 할 수도 있겠지만 난 아닌 것 같다. 인스타그램은 사실 '데이팅'에 최적화된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경험에 바탕하면 데이팅 앱의 선두 틴더보다도 인스타그램이 더 뛰어나다 생각하는데.. 오늘 한번 그 이유를 살펴보고자 한다.
왜 인스타그램이 틴더보다 더 나은 '데이팅' 앱일까?
(뇌피셜 주의..)
틴더도 나름 데이팅 앱 중에선 '혜자'인 편이다. 극심하게 과금을 유도하는 타 소개팅 앱에 비하면 틴더는 양반이다. 실제로 틴더 한국 지사 디렉터에게 틴더가 'Freemium' 전략을 추구한다고 듣기도 했다.
(나도 따로 과금하지 않고 잘 썼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소용이 없다. 인스타그램은 아예 공짜이기 때문이다. 마음에 드는 상대를 발견하고 메시지를 보내는 것에 땡전 한 푼 들지 않는다.
보통의 소개팅 앱에서 유료로 제공되는 기능들인데
마음에 드는 상대방 소개받기
상대방 프로필 조회하기
상대방에게 메시지 보내기
인스타그램에선 모두가 아는 것처럼 공짜다.
외국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국내에선 데이팅 앱에 대한 시선이 그닥 좋지 않다. 뭔가 데이팅 앱을 쓰면 사람이 절박해 보인달까? 그렇게까지 해서 사람을 만나고 싶어? 이런 느낌이다.
(틴더 디렉터도 이 부분이 고민이라고 했다. 그래서 동네 친구 컨셉을 밀고 있기도 하다.)
때문에 데이팅 앱을 안 보이게 어딘가에 꼭꼭 숨겨두기도 한다. 또 밖에선 좀처럼 데이팅 앱을 실행하지 않는다. 심지어 데이팅 앱으로 사귀게 되었음에도 대외적으론 소개로 만났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반면에 인스타그램은 어떤가? 전혀 눈치가 보이지 않는다. 지하철 같이 누군가 내 화면을 볼 수 있는 곳에서도 당당하게 인스타그램을 할 수 있다. 그 누구도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
또 인스타그램으로 사람을 만나도 데이팅 앱만큼은 절박해 보이지 않는다. 무슨 차이냐고?
비유를 한번 해보면 좋을 것 같다.
인스타그램 - 와인바, 맥주 브루어리
데이팅 앱 - 헌팅 술집
와인바나 맥주 브루어리에 간 사람은 실제 의도와는 상관없이 아래와 같이 말할 수 있다.
아 그냥 와인이나 홀짝거리러 갔는데..
괜찮은 사람을 만났어!
과연 헌팅 술집에 들어간 사람이 위와 같이 말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과연 그의 말에 설득력이 있을까?
틴더에서 매칭률을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전에 틴더의 디렉터에게 프로필을 열심히 적으면 좋다는 얘기를 들었다. 프로필이 상세하면 상대방에게 조금이라도 안심을 갖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데이팅 앱은 어쨌든 온라인 만남이기 때문에 신원 보장이 항상 문제다. 특히 여성 사용자 입장에선 온라인에서 매칭된 상대를 실제로 만나는 것이 큰 부담이다.
프로필이 있다고 하더라도 꾸며내면 그만이다. 그 적은 프로필 공간을 꾸며내는 거 얼마 걸리지도 않는다. 온라인에선 정상인이라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미친놈이 나올 수도 있다는 얘기다.
요즘 같이 흉흉한 세상에 이는 참으로 크리티컬하다. 그래서 데이팅 앱에선 이런저런 안전 장치를 마련해놓기도 한다. 틴더의 경우 얼굴을 인증하는 방법도 도입했다.
하지만 결국 이 부분도 인스타그램이 넘사벽이다. 틴더의 프로필을 아무리 꾸민다고 해도 결국 데이팅 앱 프로필이다.
인스타그램의 프로필을 살펴보자. 이곳엔 한 사람에 대한 참 많은 정보가 담겨있다.
프로필 사진 및 기본 정보(Bio)
수십, 수백 장의 사진들
사진에 달린 소소하거나 진지한 글
게시물에 달린 수많은 댓글들
팔로우/팔로잉 관계
태그 된 사진
이외에도 다양한 정보들이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정보들은 대개 단기간에 형성되지 않는 편이다. 특히 소셜 그래프(관계 정보)가 그렇다.
기본 프로필이나 게시글 같은 건 내 마음대로 얼마든 올릴 수 있지만 타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콘텐츠는 그렇지 않다. 누군가가 좋아요를 눌러주고 댓글을 달아주고 태깅을 해줘야 한다.
그래서인지 소셜 그래프는 특정인을 신뢰하게 만드는 힘을 가진다. 진짜로 미친놈이 아닌 이상 수개월, 수년 이상 연기를 해가며 관계 정보를 만들기는 어려울 것이기에.
인스타그램은 데이팅 앱의 최대 약점인 불안 요소를 SNS의 강점인 소셜 그래프를 통해 부숴버리고 있는 것이다.
데이팅 앱으로 만난 상대는 사실상 익명에 가깝다. 위험한 사람이거나 바람둥이일 수도 있다. 또 어찌저찌 사귀게 됐는데 어느 날 홀연히 사라져도 추적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불안 요소가 참 많은 셈이다.
하지만 인스타그램은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다. 인스타그램 프로필을 통해 상대방을 어느 정도까지는 파악할 수 있다. 특히 소셜 그래프 정보가 프로필에 잘 담겨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물론 인스타그램으로 만난 사람도 잠수를 탈 수 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데이팅 앱보다는 적은 편이다. 데이팅 앱에서 탈퇴하는 것과는 달리 잘 가꿔온 SNS 계정을 폭파하는 건 참 아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위의 이유 때문이라면 페이스북과 같은 다른 SNS에서도 커플이 많이 나왔어야 한다. 하지만 유독 인스타그램에서 커플이 많이 나오는 이유는 뭘까?
그건 인스타그램에서 관계를 잘 설계해놓았기 때문이다. 인스타그램은 관계의 A부터 Z까지 각 단계에 필요한 기능을 아주 스무스하게 제공한다. 짧막한 이야기를 통해 한번 살펴보자.
등장인물은 철수와 영희다.
프롤로그
철수는 인스타그램을 둘러보다 이상형 영희를 발견했다. 영희의 프로필을 보며 철수는 더욱더 빠져들었다. 현재 애인도 없어 보여 철수는 용기를 내기로 했다.
A. 태핑 단계(일명 두드려보기 단계)
철수는 영희의 프로필에 있는 사진들에 좋아요를 눌렀다. 얼굴이 나온 사진만 좋아요 누르면 너무 뻔하니 골고루 눌러준다. 감성적인 카페 사진, 여행 사진 등등..
그리고 철수는 영희에게서 답이 오기를 기다린다. 게시글을 올리는 텀이 짧고 스토리도 자주 올리는 것 같으니 금방 반응이 오지 않을까?
영희는 수차례의 푸시에 서둘러 인스타그램에 들어왔다. 철수라는 사람이 여러 게시물에 좋아요를 눌렀다. 옛날 게시물에도 좋아요를 누른 걸 보아 꽤나 열심히 살펴본 듯하다.
영희는 궁금하여 철수의 프로필에 들어가 구경한다. 꽤나 괜찮아 보인다. 사진도 자연스럽고 인간 관계도 꽤나 괜찮아 보인다. 옛다 인심이다! 좋반(좋아요 반사)을 해준다.
철수는 좋반을 받았고 기분이 몹시 좋다. 이건 분명 그린 라이트! 철수는 또다시 한 걸음 나아간다. 영희 프로필의 팔로우 버튼을 과감히 누른다!
B. 핑퐁 단계
시작이 좋다. 영희가 맞팔을 해줬다. 배시시해진 철수는 이제 인스타그램에 더 자주 들어가게 된다. 혹시 영희가 게시물을 올릴지도 몰라, 스토리를 올릴지도 몰라! 올리면 바로 좋아요 해줘야 해!
영희도 내심 기대를 품었다. 괜찮은 사람인 것 같은데 반응을 좀 봐볼까? 괜스레 스토리를 올려본다. 아니나 다를까 철수가 일등이다. 제일 먼저 와서 봐주는 걸 보니 반응이 좀 있는 것 같다.
그 뒤로 여러 차례 핑퐁이 오간다. 서로의 스토리를 보는 것은 물론 게시글에도 좋아요를 눌러준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럴 수는 없다. 철수는 한 발 더 나아가고 싶다.
그렇지만 댓글은 너무 공개적이다. 영희가 부담스러워할지도 모른다. 그럼 어쩔까? 답은 스토리다. 스토리는 우리 둘만 보이니 문제없다!
그래서 철수는 영희의 스토리를 더욱더 집중해서 본다. 어디 말을 걸 건덕지는 없을까? 괜찮은 게 보일 때까지 강태공 마냥 기다린다. 그리고 마침내 기회를 잡아낸다.
[영희의 엽기 떡볶이 먹는 스토리]
처음부터 메시지를 보내볼까? 고민하다가 간단하게 감정 표현만 보내본다. 철수는 감정 표현을 보내고 급하게 인스타그램을 끈다. 왜냐? 민망하니까!
영희의 폰에 설레는 푸시가 뜬다. 올 게 왔군. 철수로부터 귀엽고 소박한 감정 표현이 왔다. 영희도 간단히 감정 표현으로 답을 해줄까 하다 용기를 내본다.
"떡볶이 너무 좋아요.."
답장을 받은 철수. 철수는 이제부터 떡볶이 전문가다. 자잘한 스몰 토크를 하다가 철수는 회심의 한 수를 날린다.
"저 떡볶이 맛있는 곳 아는데 같이 가실래요?"
그렇게 철수와 영희의 만남이 성사됐다.
C. 마킹 단계
철수와 영희의 첫만남은 꽤나 괜찮았다. 서로의 프로필을 둘러보며 궁금했던 점을 묻고 답하는 시간을 가졌다.
영희는 사실 처음엔 좀 겁이 났는데 철수를 실제로 만나보니 안심이 됐다. 철수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상대방에 대한 퍼즐을 점점 더 맞춰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이번엔 영희가 조금 더 용기를 냈다. 최근 게시글에 바로 댓글을 달면 너무 티가 나니 예전 게시글에 찾아가서 댓글을 달아본다. 여긴 덜 공개적인 곳이니까 괜찮겠지?
영희의 댓글을 본 철수는 싱글벙글이다. 뭔가 관계가 한 단계 더 진전한 것 같다. 철수도 질세라 영희의 이전 게시글에 가서 댓글을 달아본다.
그리고 둘의 마킹은 점차 최근 게시물을 향해간다. 애프터를 한 뒤엔 그 속도가 더 빠르다. 그리고 세 번째 만남 이후 철수는 영희의 스토리에 태그가 된다.
이제 둘이 삼귀는 단계까지는 온 듯하다.
D. 공식화 단계
이제는 꽤나 가까워진 철수와 영희. 철수는 용기를 내 영희의 최근 게시물에 댓글을 달아본다. 철수는 그곳에 댓글을 다는 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잘 알고 있다.
그곳은 영희는 물론 영희의 친구들 모두가 보는 공간이다. 누가 신경이나 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영희에겐 꽤나 중요한 공간일 것이다.
그럼에도 철수는 검증을 해야 했다. 댓글에 대한 영희의 반응은 관계의 척도가 될 터였다.
'딩동'
철수의 아이폰에 푸시가 떴다.
그리고 며칠 뒤 영희의 게시글에 철수가 태그 되었다.
다소 오그라드는 삼류 소설이었다. 그러니 내용보다는 인스타그램의 역할을 중심으로 다시 살펴보자. 서로 잘 알지 못하는 사이부터 사귀는 사이가 되기까지 인스타그램은 중간 다리 역할을 톡톡히 했다.
중간 다리를 한 기능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좋아요
팔로우
스토리
감정 표현/DM
댓글
스토리 태깅
게시물 태깅
위의 기능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관계가 단계적으로 진전될 수 있도록 돕는다. 특히 스토리가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는 듯하다. 스토리는 공적인 SNS에서 사적인 공간은 물론 대화 계기까지 마련해주고, 그 안에서 관계는 진전한다.
지금도 스토리를 통해 얼마나 많은 썸이 진행되고 있을까?
데이팅 앱이 아님에도 데이팅을 그 어떤 앱보다도 잘 지원해주는 인스타그램. 사실상 인스타그램은 SNS, 커머스뿐만 아니라 데이팅 앱 기능도 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그거 이쁘고 잘생긴 사람만 되는 거 아냐?
부정은 못하겠다. 실제로 못 보는 상황에선 외적인 이미지로 평가되는 부분이 큰 것 같다. 하지만 그래도 인스타그램이 데이팅 앱보다는 낫다고 얘기하고 싶다.
오히려 데이팅 앱에선 개인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외적인 요소에 더 많이 좌지우지된다. 반면 인스타그램은 그렇지는 않다.
인스타그램 피드에 내 이야기를 정성 들여 잘 구성해놓으면 데이팅 앱보다 효과가 더 좋다. 데이팅 앱과 달리 인스타그램에선 나만의 감성을 어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투자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래서 자신이 외모에 너무나도 자신이 있다 싶은 사람은 데이팅 앱이 적격일 수도 있다. 이번 글에서 비교 대상으로 나온 틴더도 사실 굉장히 좋은 데이팅 앱이라 생각한다.
인스타그램 대비 틴더의 장점을 하나 생각해본다면, 합이 맞는다 정도가 되겠다. 서로 모두 짝을 만나러 입장했으니 대화가 빠르게 진행된다. 한쪽이 무안할 일도 상대적으로 적다.
반면 인스타그램에선 잘못하다간 무시 심하면 멸시까지 당할 수 있다. 그러니 진짜배기 데이팅 앱보다는 조심이 필요한 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종합적으로 봤을 때 인스타그램이 전체 점수면에서는 앞서지 않나 싶다. 아이러니하다 데이팅 앱이 아니면서도 데이팅 앱보다 잘할 수 있다는 게..
언젠가 데이팅 앱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는데 인스타그램 사례를 잘 참고해봐야겠다. 어떤 식으로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쓰다 보니 뭔가 인스타그램으로 짝 만들기 글이 된 것 같기도 한데..
어쨌든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