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am BPM
이번에 팀 사이드 프로젝트로 환경보호 앱인 텀블링을 만들었다. 모지또에 이은 간만의 팀 사이드 프로젝트인데 역시나 배운 점이 많아 기록으로 남겨놓는다.
1편 목차
왜 환경보호인가?
왜 텀블러인가?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Tumbler + ing
한 발 더 나아가기
텀블러, 꽃 그리고 어린왕자
램프의 요정
여느 사이드 프로젝트 팀과 마찬가지로 우리 BPM 팀 또한 기세 좋게 시작했다. 의기투합하여 어떤 서비스를 만들어 볼까 의견을 나눴다.
하지만 역시나 가장 어려운 건 아이디어를 정하는 것이었다. 팀원 각자의 관심사에 따라 To-Do, 루틴 앱 등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나왔지만 끝내 채택되지 못했다.
우리가 생각한 아이디어 중 대부분이 이미 시장에서 멋지게 구현되어 있었다. 매번 느끼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건 다 비슷비슷한 것 같다.
그래서 이번 사이드 프로젝트 팀에서도 정체의 시간이 있었다. 아이디어를 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시간. 팀원 모두에게 힘들지만 특히 기획자에겐 더 견디기 어렵다.
아무도 내게 아이디어를 갖고 오라 하지 않았지만 왜인지 모르게 느껴지는 책임감. 스스로에게 데드라인을 두고 그때까진 무조건 아이디어를 마련하자 다짐했다.
데드라인을 정해서인지 더 본격적으로 고민을 하게 됐다. 그리고 문득 너무 넓은 범위에서 아이디어를 찾느라 어려운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프로젝트를 살펴보면 특정 분야에 파고들어 괜찮은 아이디어를 찾은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나도 아이디어에 대한 고민 이전에 파고들 분야를 결정하기로 했다.
어떤 분야가 좋을까 고민하던 중 환경보호가 떠올랐다. 최근 SNS나 유튜브, 뉴스 등에서 관련 키워드가 많이 나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바로 구글링을 했는데 핫한 주제인 건 분명해 보였다. 특히 IT 업계에서 신경쓰는 Z세대에게 환경보호는 중요한 이슈였다.
나 또한 환경보호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다 보니 관심이 갔고 관련된 책을 하나둘 사서 읽기 시작했다.
어떤 책이 좋은지 몰라서 손에 잡히는 책을 읽었는데 생각보다 좋았다. 개인, 기업, 정부. 각 주체가 어떤 방식으로 환경보호에 접근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읽은 책들 모두 환경오염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기에 당연하게도 경각심을 갖게 됐다. 나도 더 이상 모른 체하고 있을 수는 없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부터 환경보호를 이번 프로젝트의 주제로 잡고 가야겠다는 확신이 생겼던 것 같다. 기획자로서 환경보호에 도움이 되는 서비스를 기획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이 분야엔 어떤 문제가 있는지 리서치를 하다가 흥미로운 설문 결과를 발견했다. 이케아에서 진행한 환경보호 관련 설문이었는데 내게 힌트를 줬다.
여러 가지 설문 문항이 있었지만 요약하면 핵심 포인트는 아래와 같았다.
남녀노소
환경보호가 중요한 건 알지만,
실천하는 건 어려워..!
인식과 행동(실천) 사이의 상당한 차이. 이 갭을 메우는 게 중요한 과제로 보이는데 아직까지는 잘 이루어지지 않은 듯했다.
우리도 이 문제에 한번 도전해 보면 어떨까? 쉽지 않은 문제지만 그만큼 의욕이 생겼다. 문제가 어려운 만큼 풀었을 때의 보람도 클 테니까.
또 나 자신도 곧 서비스의 타겟인 만큼 재밌게 기획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아래와 같이 방향을 잡게 되었다.
환경보호에 입문한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환경보호를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쉽고 재밌는 환경보호 앱
이렇게 대략적으로라도 방향이 잡히니 속도가 났다. 환경보호라는 새로운 분야로의 본격적인 다이브가 시작된 것이었다.
환경보호에 더 깊게 파고들며 이케아의 설문을 자세히 살펴봤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환경보호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천에 옮기지 않는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실천을 지속하지 못하는 이유
1. 어떻게 하는지 모른다.(31%)
2. 귀찮다.(31%)
3. 비용이 부담된다.(26%)
또한 그 원인을 해소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에 대해서도 확인이 가능했다.
지속적 실천을 위해 필요한 것
1. 실천에 대한 보상(49%)
2. 실천 방법에 대한 공유(48%)
사실 설문을 보지 않아도 어림짐작으로 알 수 있는 내용이긴 했다. 하지만 그래도 주요한 흐름을 알았으니 그에 맞춰 시장을 둘러볼 수 있게 되었다.
앱스토어에 환경보호 실천과 관련된 앱을 검색해서 둘러봤다. 유명한 앱이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몇몇 플레이어들이 보였다.
각 서비스명을 말하긴 그렇고 기존 앱들의 환경보호 실천 카테고리를 나눠 보면 아래와 같았다.
플로깅 앱
- 플로깅 실천 동기부여
채식 정보/인증 앱
- 채식 관련 정보 공유
- 채식 실천 동기부여
종합 환경보호 앱
- 환경보호 관련 정보를 공유
- 다양한 환경보호 실천 동기부여
텀블러 사용 인증 앱
- 텀블러 사용 동기부여
기존 환경보호 실천 앱들은 내가 읽은 책에서 소개한 환경보호 실천들을 대부분 다루고 있었다. 나는 환경보호 입문자 입장에서 앱을 하나씩 쓰며 분석했다.
앱을 직접 써 보니 몇 가지 느껴지는 점이 있었다.
1. 플로깅, 채식은 입문자에겐 어렵다.
이케아 설문에 따르면 환경보호 실천이 지속되지 않는 이유 2위가 '귀찮다'이다. 이 점에서 플로깅과 채식은 진입 장벽이 너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조깅을 하며 쓰레기를 줍는 플로깅의 경우 실천을 하려면 밖에 나가야 한다. 평소 조깅도 안 하는 사람에겐 두 배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다.
다음으로 채식은 준비물이 너무 많다. 채식주의 단계별로 어떤 걸 먹어도 되는지 알아야 하고 원하는 게 없으면 직접 요리도 해야 한다.
또한 채식이 아직 보편화되지 않아 비건 식품을 구하는 비용도 부담될 수 있다. 지속적 실천을 막는 3위가 '비용 부담'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이건 큰 이슈다.
물론 플로깅과 채식이 하는 건 힘들지만 그만큼 보상도 크다. 하지만 나 같은 입문자에겐 요구하는 input이 과도하여 output을 보기 전에 이탈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 생각했다.
2. 선택지가 많을수록 고르기 어렵다.
어떤 앱은 정말 다양한 환경보호 실천에 대해 알려 줬다. 또 앱에서 알려 준 환경보호를 실천하고 인증해서 포인트를 받을 수도 있었다.
(포인트로 앱 내 몰에서 제품 구매 가능)
그런데 난 그 앱을 쓰며 좀처럼 실천하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대신 뭐부터 해야 할지 고민을 주로 했던 것 같다. 이건 아마 힉의 법칙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제공하는 환경보호 실천 선택지가 많은 게 오히려 빠른 결정에 방해가 될 수 있었다. 특히 나 같은 입문자는 어떤 게 더 지속가능한 실천인지 모르니 더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물론 해당 앱 제작자는 환경보호 실천 관련 정보를 최대한 많이 공유하기 위해 그랬을 것이다. 지속적 실천을 위해 필요한 것 2위가 '실천 방법에 대한 공유'이기도 하니까.
근데 소화 능력이 한정된 입문자에게 처음부터 너무 많은 정보를 들이밀면 급체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환경보호 실천 선택지가 여러 개인 것보다 하나만 파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아래의 두 가지 포인트를 잡게 되었다.
처음부터 너무 어려운 실천 X
처음부터 너무 많은 실천 및 정보 X
그리고 이 두 가지 포인트를 이어 다음과 같은 새로운 방향성을 설정했다.
환경보호 입문자들이...
1. 처음엔 하나의 쉬운 실천부터 시작하여
2. 점차 더 다양한 실천에 관심을 갖게 하자!
이렇게 설정한 후 내가 고민한 건 '하나의 쉬운 실천'이 무엇이냐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은 쉽게 내릴 수 있었다.
텀블러부터 시작해 보자.
왜 텀블러일까?
우선 텀블러 사용은 플로깅, 채식만큼 어렵지 않았고 일상에서 실천할 기회도 충분했다. 상대적으로 낮은 진입 장벽과 잦은 실천 빈도. 이는 습관화로 이어지는 것에 도움이 되는 특성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텀블러 사용에 대한 관심이 형성될 수 있는 좋은 시장 기회도 있었다. 올해 4월부터 카페 내에서 일회용컵 사용이 금지된다는 발표를 봤다.
다른 환경보호 실천과 비교해 그나마 나은 실천 조건 그리고 도움이 될 만한 시장 기회까지. 텀블러를 시작 지점으로 잡는 게 여러모로 괜찮아 보였다.
그래서 정리하면 난 아래와 같은 서비스를 기획하기로 했다.
텀블러 사용부터 시작하여
점차 더 다양한 실천에 관심을 갖도록
환경보호 입문자를 도와주는 앱
이걸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다.
환경보호라는 분야에 다이브하여 텀블러라는 아이템을 건져 냈으니 이젠 그걸 연구할 단계가 왔다.
앞서서 텀블러 사용이 다른 환경보호 실천에 비해 나은 실천 조건을 갖고 있다고 말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얘기였다.
둘러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텀블러를 하나씩 갖고 있지만 실제론 잘 안 쓴다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기사에선 91%의 사람들이 텀블러를 소유했지만 82%가 실제로 사용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존의 플레이어들은 어떻게 했을까. 기획에 들어가기에 앞서 경쟁 서비스를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내가 살펴본 텀블러 사용 유도 앱들은 보통 아래와 같은 플로우를 제공했다.
1. 텀블러 사용 인증
2. 포인트 제공
3. 포인트로 실제 상품 구매
재화를 구매할 수 있는 포인트를 보상으로 주는 건 좋았지만 이 부분에서 발생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바로 어뷰징을 방지하기 위한 제약 조건들이었다.
사용자가 텀블러 사용을 가짜로 인증하고 포인트를 받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몇 가지 안전 장치들이 사용성을 저해했다. 일부 안전 장치들을 한번 살펴보자.
인증 횟수 제한
- 일간 최대 인증 횟수 제한
인증 가능 가맹점 제한
- 앱과 계약된 카페에서만 인증 가능
인증 난이도 강화
- 앱 자체 텀블러를 통해서만 인증 가능
보상이 돈이기에 불가피한 안전 장치이긴 하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텀블러 사용 인증 과정이 누군가에겐 귀찮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꼭 보상이 돈이어야 하나라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돈이라는 보상을 갖고 가기 위해 부담해야 하는 trade-off가 컸기 때문이다.
돈 물론 좋지만 환경보호라는 공익적인 일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일까 고민해 봤다. 일단 나만 해도 돈을 준다고 해도 텀블러 사용을 인증하지 않았으니까.
뭔가 돈 이외의 방법으로 사람들이 텀블러를 쓰도록 유도하는 방법이 있을 것 같았다. 그게 아직 뭔지는 잘 모르지만 찾아내고 싶어졌고 돈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텀블러 사용을 유도하는 앱을 기획하기로 결정했다.
성격상 이름을 지어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느낌이 들기에 작명을 시작했다. 아래의 방향성에 맞춰 이름을 고민했다.
텀블러를 통한
지속가능한 실천
원래는 작명에 많은 시간이 드는데 이번엔 생각보다 금방 떠올랐다. 바로 텀블링(Tumbling)이었다. 기존에 설정한 방향성에 아래와 같이 맞춰졌다.
텀블러를 통한
-> Tumbler
지속가능한 실천
-> -ing
근데 살펴보니 기존에 텀블링이라는 이름을 가진 서비스가 있었다. 공용 텀블러를 대여해 주는 서비스였는데 현재는 운영하지 않았다.
우리와 같이 텀블러를 소재로 하지만 서비스 결도 다르고 현재는 운영 중이 아니라 이름은 그대로 텀블링으로 가져기로 했다.
이름도 생겼겠다. 이제 본격적인 스타트였다.
경쟁 텀블러 앱을 사용하며 텀블러 관련 리서치도 진행했다. 그러던 중 환경보호 입문자들이 텀블러와 관련해 한 가지 오해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텀블러 사용은 무조건 환경에 도움이 된다는 오해
텀블러 사용이 환경보호에 도움이 되려면 한 가지 조건이 붙는다. 바로 하나의 텀블러를 오래 쓴다는 조건.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환경 파괴에 일조하는 셈이 된다.
이는 텀블러 생산에 따라 환경이 파괴된다는 점 때문이다. 텀블러를 만들 때 발생하는 탄소발자국의 양이 일회용품의 것보다 훨씬 더 많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미 갖고 있는 텀블러를 재사용하는 비율은 높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많은 텀블러들이 일회용 컵 대체 효과를 낼 수 있을 만큼 재사용되지 못했다.
심지어 환경보호를 한답시고 텀블러를 수집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점을 악용해 그린워싱을 하는 업체도 많았고.
(환경보호한다며 텀블러를 뿌리는..)
기존 텀블러 사용 앱들은 이 문제를 캐치하지 못했는지 관련 솔루션이 제공되지 않았다. 어떤 텀블러를 몇 번 썼는지 구분하지 않고 동일한 보상을 줬다.
난 이게 우리가 풀어야 할 진짜 문제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텀블러를 쓰게 만들자가 아닌 하나의 텀블러를 오래 쓰게 만들자가 더 예리하게 다가왔다.
나는 아래와 같이 문제와 솔루션을 변경하게 됐다.
기존
문제: 사람들이 텀블러를 안 써
솔루션: 텀블러를 쓰게 유도하자!
변경
문제: 사람들이 텀블러를 오래 안 써
솔루션: 하나의 텀블러를 오래 쓰도록 유도하자!
문제에 한 발 더 다가가니 더 날카로운 솔루션이 나온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하나의 텀블러를 오래 쓰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여러 가지 고민을 하다 환경보호 책과 미니멀리즘 관련 다큐멘터리에서 힌트를 얻었다.
하나의 물건을 오래 쓰는 사람들은 물건에 애정을 갖고 있었다. 물건을 단순히 기능의 관점에서만 보지 않기에 더 좋은 게 나와도 바꾸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의 텀블러를 오래 쓰게 할 때에도 정(情)을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텀블러에 정을 붙일 수 있게끔 도와주는 기능을 넣는 식으로.
이때 김춘수의 꽃과 생택쥐페리의 어린왕자가 떠올랐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꽃 中]
넌 아직은 나에겐 수많은 다른 소년들과 다를 바 없는 한 소년에 지나지 않아.
그래서 난 너를 필요로 하지 않고. 너 역시 마찬가지일 거야.
...(중략)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나는 너에게 이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될 거야.
[생택쥐페리의 어린왕자 中]
이름을 불러 주는 것과 길들이는 것. 어떠한 대상이 특별한 의미를 갖게 하려면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난 저 두 개를 서비스의 기본 스펙에 녹이기로 했다.
1. 이름을 불러 주는 것
우선 사용자가 자신의 텀블러를 앱에 등록하는 기능을 기본 스펙에 넣었다. 그 과정에서 텀블러의 이름을 지을 수 있도록 했다.
어찌 보면 사소한 포인트이지만 텀블러와의 관계를 시작하는 지점으로 작용할 것이라 봤다.
2. 길들이는 것
그다음으로는 텀블러별로 사용 기록을 따로 보여 주기로 했다. 각각의 텀블러를 얼마나 써서 어느 정도의 환경보호를 했는지 보여 주는 식이었다.
실천 기록이 쌓이는 걸 보며 환경보호를 함께 한 텀블러에게 긍정적인 감정이 생길 것 같았다.
정리하면 앱의 기본이자 핵심 스펙은 아래와 같았다.
텀블러를 등록하며 이름을 붙이고
텀블러별로 사용 기록을 보여 주자!
앱의 기초 스펙을 정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기본이었다. 사용자가 텀블러에 정을 붙이고 오래 사용하게 만들기 위해선 몇 가지 장치가 더 필요해 보였다.
팀 논의를 했는데 한 팀원이 반려사물이라는 키워드를 제시했다. 반려사물. 재밌는 말이었다. 뭔가 물건에 영혼이 깃들어 있는 동화와 같은 느낌이었다.
그냥 물건이 아닌 영혼이 담겨 있는 물건이라면 더 정을 붙이기 쉽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 예로부터 애니미즘이라는 개념도 있었다.
애니미즘
각각의 사물과 현상 즉, 무생물에도 정령 또는 영혼,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영적인 힘 또는 존재'가 깃들어 있다고 믿는 것
살펴보니 지브리 애니메이션에도 나오고 사람들에게 낯설지 않은 개념으로 보여 차용하기로 했다. 우리의 텀블러 안에 요정이 있다는 식으로.
그런데 내가 갖고 있는 텀블러 안에 다짜고짜 요정이 살고 있다고 얘기하는 게 설득력이 없어 보였다.
설득력이 없는 컨셉은 빈 껍데기에 불과하기에 고민이 필요했다. 어떻게 하면 텀블러 안에 요정이 있다는 걸 사용자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있을까.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스토리였다. 왜 텀블러 안에 요정이 살고 있는지 이야기를 만들면 설득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스토리를 쓰면서 회의감이 들었다. 내 실력 탓이겠지만 쓰면 쓸수록 구구절절 설명충이 되는 느낌. 길어지면 사용자가 읽지도 않을 것이기에 난이도가 더 올라갔다.
결국 다른 방도를 찾게 되었다. 요정, 정령과 관련된 컨셉이었기 때문에 주로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을 살펴봤다.
그러던 중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많은 애니메이션 혹은 게임 속 정령은 누군가가 소환(summon)하여 세상에 나온 존재였다.
나는 '소환'이라는 의식에 관심이 생겼다. 구구절절 스토리를 설명하는 것보다 사용자가 직접 자신의 텀블러 요정을 소환하게 한다면 어떨까.
일방적으로 주입하지 않는, 사용자가 직접 참여하는 방식의 컨셉이기에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또 자신이 직접 소환한 정령이라면 정을 붙이기도 더 쉬울 것 같았다.
꽤나 마음에 드는 컨셉이었는데 문제는 소환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있었다. 앱 내에서 텀블러의 요정을 소환하는 인터랙션을 어떻게 가져가면 좋을지 고민이 됐다.
아래의 두 가지 조건에 맞는 인터랙션이 필요했다.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소환 방식
앱 내에서 기술적으로 구현 가능한 방식
이런저런 리서치를 하며 고민을 했고 결국 답은 또다시 애니메이션에서 찾았다. 난 알라딘이라는 애니메이션을 보고 유레카를 외쳤다.
알라딘에서 주인공은 램프를 문질러 안에 잠들어 있던 요정, 지니를 소환한다. 그 장면을 보며 우리 서비스와 찰떡이라 느꼈다.
램프의 요정이라는 유명한 사례가 있으니 텀블러를 문지르면 요정이 소환된다는 컨셉이 그럴듯하게 보였다. 또 앱 내에서 어찌저찌 구현도 가능할 것 같았다.
그래서 곧바로 앱 기획에 녹였다. 아무래도 텀블러의 요정을 소환하는 것이라 텀블러 등록 과정에 컨셉을 입히는 것이 좋았다.
텀블러 등록 과정
1. 등록할 텀블러 사진 촬영
2. 사진의 텀블러 부분을 문질러 요정 소환
3. 텀블러 요정 소환 완료 및 작명
위와 같은 흐름으로 정리하다 문득 텀블러에 따라 요정의 모습이 달라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컨셉에 더 생동감이 생길 테니까.
여러 가지 방법을 연구했는데 문지른 부분의 주요 색상 코드를 가져와 요정의 색으로 입히는 것이 좋아 보였다. 그렇게 하면 텀블러 색상에 맞춰 요정의 색상이 달라질 수 있었다.
기존엔 텀블러를 문지르는 행위가 단순히 컨셉을 위한 인터랙션이라 아쉬웠는데 그게 해결되어 기분이 좋았다. 이제 문지르는 행위는 기술적으로도 필요한 인터랙션이 되었다.
이렇게 기본 스펙과 컨셉까지 얼추 정리가 되어 팀원들에게 공유를 했다. 감사하게도 팀원들은 오케이를 해 줬고 마침내 아이디어를 픽스할 수 있었다.
쉬운 과정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차별성을 갖춘 기획이 나온 것 같아 뿌듯했다. 시작이 반인데 그걸 잘 해낸 느낌! 이제 잘 발전시켜 나가는 일이 남았다.
보통 글을 끊어서 쓰는 편은 아닌데 이번 글은 너무 길어져서 나누게 되었습니다.
다음 편에서 이어서 봐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