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부터 시작하는 중국 IT 이해
어떤 사람에겐 중국 IT 시리즈에서 인문학을 다루는 게 조금 어색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인문학이 관련되지 않은 분야는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애초에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이해를 다룬 학문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인문학은 인간이 하는 모든 일에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어떤 분야를 이해할 때 그 방면의 인문학적 배경을 파악하는 건 상당히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이번 포스트에선 중국의 인문학적 배경에 대해 간단하게 알아보고자 한다. 중국의 인문학적 배경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으면 중국의 IT를 이해하는 게 더 쉬워지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 첫 번째 걸음은 한 가지 오해를 푸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바로 중국을 우리와 같은 유교권 국가라 생각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오해다.
같은 유교권이니 중국도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응 아니야~
한국과 중국의 친근함 혹은 사상적 유사성을 드러낼 때 자주 쓰이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사실상 알맹이를 상실한 지 오래다. 중국은 더 이상 우리와 사상적으로 유사하지 않다. 한 마디로 먼 나라 이웃 나라인 셈이다.
물론 먼 과거에는 유교 사상이라는 매개를 토대로 서로 교류한 적이 많았으니 '같은 유교권 국가'로 서로를 바라보는 프레임이 어느 정도 유효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긴 시간이 흐르고 한국과 중국 모두 각각이 많은 사건을 거치면서 '같은 유교권 국가'라는 상호 이해 프레임은 더 이상 예전만치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오해는 또 다른 오해를 낳기 마련이다. 만약 저 '같은 유교권 국가'라는 프레임을 고집스럽게 안고 있는다면 앞으로 더 많은 오해가 생겨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번 포스트에선 그런 오해의 중첩을 방지하기 위해 '같은 유교권 국가'라는 근본적 오해를 풀어보고자 한다.
중국이 왜 더 이상 한국과 같은 유교권 국가가 아닌지에 대해 알아보자.
중국 근대화의 시발점은 아편 전쟁이었다. 아편 전쟁을 시작으로 중국은 역사상 최악의 굴욕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콧대 높던 중화사상의 중국이 조그만 섬나라 영국에 이리저리 유린당했다. 영국은 중국의 시장을 강제로 개방시키기 위해 아편을 썼고 이에 대응한 청나라를 강력한 화력으로 제압했다.
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영국과 굴욕적인 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청나라 정부는 영국에게 항구를 내주고 물건을 팔아먹을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그리고 이 조약을 지켜본 다른 식민 열강들도 하이에나처럼 중국에게 달려들어 대륙을 이리저리 물어뜯었다.
자기가 세계 최고인 줄 알았던 중국에게 이건 적지 않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평소에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오랑캐들에게 국토가 분할되다니. 이건 중국의 황실뿐만 아니라 자긍심 높은 중국의 모든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가져왔다. 중국인들의 멘탈이 순식간에 붕괴된 것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중국의 지식인들은 중국이 서양 국가들에 밀리게 된 이유에 대해 고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 게 유교 사상이었다. 허례허식으로 가득한 유교를 추구하느라 실용적인 걸 멀리하던 게 기어코 사달을 냈구나. 루쉰을 비롯한 수많은 중국의 근대 지식인들이 내린 결론이었다.
왜 유교를 추구하는 게 실용적인 걸 멀리하는 것과 이어졌을까? 여기엔 크게 3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중국 제국에서 관료가 되기 위해선 과거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그리고 그 과거제의 주요 과목은 바로 유교 경전을 외우는 것이었다. 유교 경전을 외우는 게 뭐 문제는 아니지만 중요한 건 관료들이 거의 유교 경전만 외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관료의 시각을 편협하게 만들었다.
세상을 통치하는 건 다양한 지식을 필요로 한다. 특히 중국과 같은 대국을 다스리려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런데 관료가 될 사람들이 유교 경전만 쳐다보고 있으니 정치와 현실이 괴리되는 경우가 잦아졌다. 중국의 근대 지식인들은 유교의 이상적 탁상공론이 중국에서 실용 정치가 실현되는 것을 가로막았다고 여겼다.
다음으로 유교에선 상업을 그다지 높게 쳐주지 않았다. 사농공상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 상인은 유교 사회에서 천시받던 계급이었다. 공자는 상인이 돈 장난으로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계층이라 생각했다. 그의 생각이 이후로도 계속 이어진 것이다.
국가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상인이 천시받으면 시장에서 돈이 잘 안 도는 법이다. 상인 천시로 상업 발달 속도가 더뎌지고 이에 따라 재생산 속도도 느려졌다. 상업의 발달로 경제 주체 간 문화, 자원 교류가 활발해져 급속한 발전을 할 수 있었던 유럽과는 대조된다.
마지막으로 유교 사상에서 비롯된 특유의 노예 의식이다. 수직적 지배 구조에 물든 피지배층들은 지배층에게 순종한다. 루쉰은 중국 사람들이 등급 사회에 대해 어떠한 비판 의식도 가지지 못하며 강자에겐 굽실대고 약자는 멸시하는 기질을 갖고 있다고 비판했다.
노예 의식은 사회가 정체되도록 만들었다. 등급 의식에 다양한 생각이 오고 가는 게 막혀버렸기 때문이다. 오히려 계급 간에 존재하는 명분을 더 중시하여 실질적 알맹이보단 허례허식에 치중하게 되는 경향을 띄게 되었다. 알맹이가 별로여도 명분만 괜찮으면 맹종하는 행태가 사회 곳곳에서 만연했다.
루쉰의 소설 광인일기엔 이런 문장이 있다.
"나는 역사를 읽어 보았는데 거기엔 연대가 없고 페이지마다 인의 도덕이란 글자가 어지럽게 적혀 있었다."
이는 발전은 없고 인의 도덕이란 허례허식만 따졌던 중국의 역사에 대한 반성이었다.
중국의 근대 지식인들은 이런 유교 사상에서 비롯된 영향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중국의 발전을 정체시켰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중국인들은 식민 열강에 받은 온갖 수난과 굴욕에 대한 분노를 유교에 쏟아내게 되었다.
그래서 중국의 근대화 시기는 유교에게 수난 시대였다. 근대 지식인들은 유교 사상을 철저히 버려야만 민족 계몽 운동이 성공할 것이라 주장했다. 그리고 이건 곧 반-전통적 민족주의로 이어졌다. 중국의 근대화는 반봉건, 반전통을 바탕으로 외부에서 성공한 다양한 사상들을 받아들이면서 이뤄졌다.
그리고 그렇게 다양한 사상들을 받아들이다가 자리 잡게 된 것이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주의였다. 마르크스주의는 기존의 유교 체계를 전복시키고 공산당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공산당은 유교에게 더욱더 가혹했다.
기본적으로 중국인들에게 밉보인 것도 있었는데 유교 사상은 마르크스주의와도 서로 어긋나는 점이 많았다. 공산당 사람들은 공자의 사상이 복고적 태도를 갖고 있으며 노예 사상을 옹호한다고 여겼다. 또 공자 사상 때문에 중국의 역사 발전 단계가 봉건 사회에 머무르게 되었다고 탓하기도 했다.
사회주의로 건너가려면 일단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성립했어야 했는데 유교 사상 때문에 그게 안 됐다고 여겼으니 유교가 탄압받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유교 사상은 중국에서 정치적인 혁명이 있을 때마다 화풀이 대상이 되었다. 너 때문에 혁명 늦었잖아 이러면서 유교 탓을 하는 것이다.
특히 더 심하게 괴롭힘을 당했던 게 10년 동안의 문화 대혁명 시기였다. 괴롭힘이라기 보단 학대라고 보는 게 더 맞을 것이다. 문화 대혁명은 마오쩌둥이 시행했던 아주 극악스러운, 지금도 중국인의 마음에 상처로 남아있는 사건이다. 이 사건은 유명한 중국 영화 패왕별희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문화 대혁명 이전 마오쩌둥은 국가의 일인자로서 이런저런 일들을 많이 했다. 모두 사회주의 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시도들이었는데 대부분이 참혹한 결과를 불러왔다. 정책이 실패하면서 수많은 아사자들이 발생하고 국가 재정이 파탄 났다.
(아사자 수는 3000만 명 정도로 추산, 일부 사람들은 배고픔을 이겨내지 못하고 식인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마오쩌둥은 공산당 내에서 잠시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여전히 강력한 지위를 갖고 있었지만 싸질러 놓은 똥이 너무 많았기에 당내의 다른 사람들에게 정치를 맡겼다. 마오쩌둥보다 비교적 급진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사회주의 혁명의 속도를 떨어트리며 국가를 안정시키려 했다.
그런데 마오쩌둥은 그들의 그런 행동을 좋아하지 않았다. 혁명을 늦추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오쩌둥은 자신의 주특기인 선동하기를 활용하여 젊은 학생들에게 혁명을 일으키라 주문했다. 그게 바로 문화 대혁명의 시작이었다.
문화 대혁명 시기에 마오쩌둥에 선동당한 학생들은 떼거지로 몰려다니며 마오가 타겟팅한 사람들을 죽도록 패거나 아예 죽이기도 했다. 마오쩌둥은 아직 유교적 봉건사상 혹은 관료제에 물들어 혁명을 늦추는 반동분자들, 지식인들을 심판하라고 했다.
그런데 마오쩌둥이 다시 권력을 잡기 위해 불러일으킨 피바람은 점차 거세지더니 마오 자신도 결국 통제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문화 대혁명이 점차 거세지면서 국가 시설 및 제도가 초토화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회적 안전장치가 사라진 이후 많은 사람들이 주관적 트집에 사로잡혀 죽임을 당했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했던 숨 막히는 시기였기에 사람들은 죽지 않기 위해 더더욱 철저히 유교 사상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유교는 위험한 거야. 그걸 입 밖에 내어선 안 돼. 마치 유교가 볼드모트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유교는 그렇게 문화 대혁명 시기에 학대의 끝을 맛보았다.
문화 대혁명은 마오쩌둥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어지러이 마무리됐다. 공산당이 웬만하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데 문화 대혁명은 잘못된 일이었다고 인정하는 거 보면 엄청나긴 했나 보다.
그런데 문화 대혁명이 끝나고도 유교에 대한 탄압이 끝난 건 아니었다. 개혁개방을 해서 지금의 중국을 만든, 비교적 열린 사람이라 생각했던 덩샤오핑도 유교를 싫어하긴 매한가지였다. 사실상 유교는 아편 전쟁 이후 근대화가 시작되고 나서 거의 탄압당하기만 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최근 그 흐름도 바뀌고 있다. 요즘 중국은 중국의 전통을 중시하는 국학(国学)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 국학 안에 포함된 것이 공자의 유교 사상이다. 중국은 다시 예전의 공자 사상을 재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 된 일일까?
먼저 이데올로기상의 문제다. 중국은 뭔가 이상하다. 사회주의 국가라면서 그 어느 나라보다도 자본주의 성향이 짙어 보인다. 위에서 말했듯 중국은 사회주의화를 하다가 폭망 했다. 그래서 경제가 파탄 났고 이를 복구하기 위해선 개혁 개방을 하고 자본주의 요소를 도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자본주의 요소를 도입하다 보니 점차 그 정도가 심해지기 시작했다. 빈부격차, 환경오염, 부정부패 문제가 나날이 심각해졌다. 그리고 이는 곧 지배층의 정당성 문제로도 이어질 수 있었다.
국민 - 야. 너네 공산주의 사회 만든다고 했는데 왜 자본주의만 계속하고 있냐.
공산당 - 이거 잠깐 돈 벌어야 돼서 과도기적으로 시행하는 거야. 계속하는 거 아님.
공산당은 자본주의를 도입한 사회주의 체제를 여러 용어로 합리화하고 있지만 그게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이데올로기의 정당성에 공백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공산당은 이 정당성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유교 사상을 이용하고자 한다.
유교 사상은 황제에 대한 충성을 중시한다. 그러니까 공산당은 유교 사상을 사람들한테 주입시켜서 우리가 현대판 황제니까 충성해라는 의미를 전달하고 싶은 것 같다. 앞으로 유교는 공산당의 입맛에 맞게 다시금 발전해나가지 않을까 싶다.
잠깐 말이 딴 곳으로 세긴 했는데 어쨌든 유교는 중국에서 생각보다 꽤 긴 기간 동안 배척당했었다. 그러니까 중국의 유교가 우리의 유교와 같은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해선 안 되는 것이다. 유교가 한국에서 우리에게 스며드는 동안 중국에선 표백당했었다.
물론 그런 기간을 거쳤다고 중국인들에게서 유교적 관념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볼 순 없을 것이다. 여전히 중국인의 무의식 속엔 유교 사상이 스며들어 있을 것이며 중국 정부 조직도 유교적 관료주의 메커니즘을 이어받아 오고 있다.
하지만 오랜 기간 바깥으로 표출되지 않은 것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이게 유교라는 같은 이름을 가졌다고 속단해선 안 되는 첫 번째 이유다.
유교는 아주 긴 역사를 갖고 있다. 그래서 그 갈래도 다양한데 우리나라에 주요하게 자리 잡은 건 주자학이라 할 수 있다. 주자학은 남송 시대의 주희라는 사람이 그전부터 이어져 오던 유교 사상에 자신의 주석을 덧붙여 정리한 주희 버전 유교 사상이라 보면 된다.
남송 시대라 함은 12세기다. 12세기에 만들어진 주자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나름의 발전 과정을 거쳐 지금의 한국형 유교(K-유교)가 만들어졌다고 보면 좋을 것 같다. 그런데 사실상 12 세기면 너무 이른 시기 아닌가? 12세기 이후로도 뭔가 중국에선 새로운 버전의 유교가 있었을 것 같은데?
당연하다. 그리고 대표적인 게 양명학이다. 양명학은 명나라 시대 때 왕수인이라는 사람이 만든 새로운 버전의 유교 철학이다. 이 양명학이 주자학과 다른 점은 바로 쉽다는 것이다. 양명학은 앎(수련)과 실천의 단계를 구분하지 않고 합쳤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실천하면서 배운다는 얘기다.
주자학은 도덕적 실천까지 닿는 게 너무나도 어려웠다. 주자학에선 뭔가를 행하려면 군자의 경지에 이르러야 했다. 많이 배우고 많이 알아야만 어떠한 도덕적 실천을 하거나 주체적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건 사실상 유교를 소수 엘리트를 위한 학문으로 만들었다.
왜냐면 당시 평범한 사람들에겐 공부할 시간과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주자학에서 이르는 충분한 정도의 수준에 이르기 위해선 삶의 많은 부분을 수련하는 것에 투자해야 했다. 그러니 돈이 없어서 매일 같이 일해야 하는 사람들에겐 주자학에서 말하는 군자가 되는 게 어려웠던 것이다.
때문에 주자학은 일반적인 대중을 소극적이게 만들었다. 난 많이 배우지 못했으니 많이 배운 사람들이 하는 말 따라야지. 그러니 사실상 주자학은 지배층 엘리트들의 논리를 강화해준 것이다. 너네 잘 모르니까 그냥 우리가 하는 말 따라와.
그런데 양명학은 이거하곤 좀 달랐다. 양명학은 조금 더 쉬운 유교였다. 수련과 실천이 나눠져 있고 수련의 기간이 엄청 긴 주자학과는 달리 양명학은 실천을 하면서 수련하고 수련하면서 실천하는 구조였다. 이거 해보고 아니면 고치고 저거 해보고 맞으면 계속하고 이런 방식이다. 상당히 lean하다고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론 이런 lean한 인문학적 배경이 있다는 게 중국 스타트업 문화에 좋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양명학은 기존의 유교보다 쉬웠기 때문에 중국의 대중들 사이에서 널리 퍼질 수 있었다. 그러다 조선에도 들어오게 되었는데 아쉽게도 이미 철저하게 자리 잡고 있는 주자학에 배척당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엔 중국만큼 양명학이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중국에서도 양명학이 생겼다고 기존의 주자학이 부정당하고 그랬던 건 아니다. 단지 다른 갈래가 하나 더 생겼다는 것인데 그 다른 갈래라는 양명학이 사람들한테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양 국가에서 유교가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나갔다는 것이다.
저번 포스트의 말미에 남긴 말이 있다.
(저번 포스트에선 중국 IT기업에서 수평적 조직 문화를 도입하고 있다는 얘기를 했음.)
"한국에선 꼰대란 말이 유행할 때 중국에선 부능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다."
아마 이 차이를 만들어낸 원인 중 하나가 다르게 발전해나간 유교 사상에 있지 않을까 싶다.
주체적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선 오랜 수련을 거쳐야 하는 주자학은 상명하달식 조직 구조로 이어지기 쉽다. 왜냐면 이제 방금 조직에 들어온 구성원이 뭘 알겠냐는 생각 때문이다. 구성원은 많이 배우고 많이 알고 나서 지도자가 되어서야 비로소 뭔가를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건 꼰대를 만들기 쉬운 구조다.
그런데 양명학에선 실천을 해야 비로소 수련할 수 있기에 조직의 각 구성원이 주체성을 띄게 될 수밖에 없다. 누구나 주체성을 갖고 결단을 내리며 학습을 해나가는 조직. 이게 바로 수평적 조직 문화가 아닐까. 중국은 양명학이라는 사상적 뿌리에서 수평적 조직 문화로 나아가는 단서를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상이하게 발전한 유교 문화는 이런 식으로 서로 다르게 사회에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지만 속단해선 안 된다.
인류 역사에서 철학, 사상이 다양하게 개화한 시기를 꼽으라 하면 많은 사람들이 유럽의 르네상스 시기를 떠올릴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중국에도 그런 르네상스 시기가 있었다는 걸 알면 좋을 것 같다. 중국에선 춘추-전국 시대, 위진-남북조 시대 등의 전쟁 시기를 거치는 동안 많은 사상들이 꽃피었다.
중국의 옛날 전란 시기엔 대륙 각지에서 여러 세력들이 나타났다.(삼국지나 초한지를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이 세력들은 국력을 키워 난세를 정리하고 통일 국가를 세우고자 했다.
다른 세력을 이겨내는 강력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선 지식인들이 필요했다. 각지의 세력가들은 나라를 잘 운영하기 위한 방법론, 정권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사상 등을 얻어내기 위해 지식인들을 채용하거나 지원했다. 그래서 이때 많은 지식인들이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주장을 설파하고 다녔다.
제자백가는 그 많은 지식인들 중에 특히나 뛰어났던 지식인들을 이르는 말이었다. 대표적으로 공자, 맹자, 순자, 묵가, 장자, 한비자가 있다. 이들의 몇몇은 살아있을 때 학파를 만들거나 아니면 학파가 될 만한 씨앗을 남겨놓았다.
이때 만들어진 다양한 사상들은 서로 복잡하게 엮이며 이후의 중국의 인문학적 배경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마치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서양 철학사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쳤던 것처럼 말이다. 중국의 사상은 몇 가지 대표 학파들로 나누어 설명해볼 수 있을 것이다.
각 학파들을 한두어 줄로 아주 짧게 알아보자.
1. 유가
대표 인물로 공자, 맹자, 순자가 있으며 인의예지를 바탕으로 한 사회 질서 유지를 중시한다.
2. 도가
대표 인물로 노자, 장자가 있으며 속세 삶의 부질없음을 논하며 무위자연을 주장한다.
(노자는 실존 인물이 아닐 수도 있음, 도가와 도교는 같은 게 아님.)
3. 묵가
대표 인물로 묵자가 있으며 유가의 계급주의를 반대하며 기독교의 아가페와 유사한 겸애사상을 주장한다.
4. 법가
대표 인물로는 한비자가 있으며 법을 통한 강력한 통치를 주장한다.
이 네 가지 학파는 중국인들의 인문학적 배경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정치 철학의 기반이 되기도 하였으며 민중들의 생활에 스며드는 사상이 되기도 했다. 특히 유가와 도가 사상은 전란 시대가 끝나고도 계속해서 중국 전체 역사에서 아주 많은 역할을 했다.
유가 사상은 중화사상을 구성하는 사상적 바탕이 된 것은 물론이며 과거제, 관료제 등의 체계를 구축하는 것에도 중심적 역할을 했다. 세상의 중심은 중국이며 또 그 중심에 황제가 있다는 중화사상, 그리고 그 황제 주위를 구성하는 과거제, 관료제는 제국을 유지하는 강력한 토대였다.
도가 사상의 '자연 있는 그대로 두어라'라는 무위자연 철학은 소위 '작은 정부'를 만드는 정치 철학의 재료로 쓰이기도 했다. 한나라는 건국 초기 전란 시기를 거쳐 힘든 국민들을 괜히 정부가 건드리지 말고 그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자라는 무위 정치를 펼쳤다.
(괜히 동원해서 만리장성 쌓고 이런 거 하는 게 아니라)
또한 이외에도 도가 사상은 중국의 문학을 주도하는 주요 사상으로 작용했다. 유가에서는 기괴한 것을 말하지 않는 걸 중시했기 때문에 문학과는 비교적 어울리지 않았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서유기가 도가 사상과 불교의 영향을 받은 중국의 대표 문학 작품이다.
그 뒤로 도가는 불교의 영향을 받아 종교화되면서 도교로 거듭나게 되었다. 도교는 유일한 중국 태생의 종교로 지금까지도 중국 내에서 많은 영향을 갖고 있는 민속 신앙이라 할 수 있다. 도교 사상은 우리나라에도 전해질 정도이니 태생지인 중국에선 더 크게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정리하면 중국 역사에선 유교, 그러니까 유가 사상만이 강력하게 작용한 게 아니라는 말이다. 유가 이외의 다른 사상들 그중 특히 도가 사상은 중국의 인문학적 배경에 아주 주요한 영향을 끼쳤다. 그렇기 때문에 유가 사상만을 보고 중국의 인문학적 배경을 속단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 더하여 중국의 역사에서 큰 몫을 차지하는 북방 이민족들도 고려해보아야 한다. 중국은 공자의 나라인데 왜 이렇게 돈을 좋아할까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여기엔 북방 이민족의 영향도 있을 거라는 얘기가 있다.
북방 이민족은 마치 철새처럼 때가 되면 중국의 북방에서 내려와 중국을 약탈하거나 어쩔 때는 중국에서 아예 통일 제국을 세우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원나라, 청나라가 있을 것이다. 특히 청나라는 중국의 마지막 제국으로 중국 역사에서 아주 주요한 시기를 점하고 있다.
북방 이민족들은 강력한 기마군을 토대로 한 정벌 능력은 있었지만 통치 능력은 없었기에 대부분이 와서 한족의 통치 문화 그러니까 유가 사상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들의 북방 문화 또한 중국인들에게 녹아들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들 중 하나가 바로 실용 문화다.
북방 이민족은 자연환경이 좋지 않은 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삶이 풍족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실용성을 비교적 많이 따지는 편이었다. 북방의 변발도 사실상 물이 많이 없어 머리 감기가 불편한 자연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시작된 거라 한다.
물론 중국에선 북방 이민족에게 하도 많이 당해서 악감정을 갖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북방 이민족이 중국을 점령하더라도 결국엔 한족 문화에 흡수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쌍방이 서로 통치 관계를 맺을 정도의 교류를 하게 되면 어떻게든 문화적 영향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이처럼 중국의 인문학적 배경은 정말 두텁다. 그리고 유가 사상 외에도 도가, 법가, 묵가, 이민족 문화 등이 중국에 남긴 문화적 씨앗은 언제든 필요에 따라 발아할 수 있을 정도의 생명력을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애초에 한 가지 사상이 다 포괄하기엔 중국이 너무나도 넓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가 사상은 초기에 북방을 중심으로 발달했고 도가 사상은 남방에서 발달했다.)
그러니 사실상 중국은 유교와 함께 다른 사상들도 얽히고설킨 사상의 잡탕찌개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잡탕찌개가 더 우러날수록 중국의 인문학적 배경은 한국의 인문학적 배경과는 점차 더 멀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더 이상 같은 유교권 국가라는 창에만 의존하여 중국을 바라봐서는 안된다.
먼 나라 이웃 나라 중국, 사실 생각보다 더 먼 나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