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 알찼다!
시간 참 빠르다. 내가 벌써 30년을 꽉 채워 살았다니. 평소 회고를 하는 편은 아니지만 요새 마음도 뒤숭숭하여 한번 살아온 삶을 정리해 보려 한다.
의식의 흐름으로 하나하나 돌아봐야지.
가끔씩 신기할 때가 있다. 내가 어딘가에 취직해서 먹고살고 있다는 사실이. 심지어 재작년엔 자취도 시작해서 독립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경제적으론 꽤나 만족스러운 나날이다. 경제적 자유 이런 건 절대 아니지만, 그냥 내가 삶을 영위하는 것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수준으론 벌고 있다.
꽤나 건방지고 배부른 소리일 수도 있겠지만 이젠 월급날이 따로 기다려지지 않는다. 한 달 동안 돈이 나가는 흐름이 이제 어느 정도 정해졌기 때문이다.
(물론 한 번씩 여행을 다녀오면 월급날을 기다리게 되기는 한다..)
자취를 시작한 뒤의 삶을 어렴풋이 돌아보면 나라는 인간을 유지하는 데 한 달에 약 300만 원 정도가 드는 것 같다. 내 연봉이 늘어도 이 금액은 크게 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는 이 금액을 점점 더 줄이고 싶다. 내가 모자람 없이 한 달을 영위하는 데에 드는 비용. 이게 줄어들수록 내 삶의 선택지가 넓어진다. 더 즐거운 일을 찾아 도전할 때 경제적으로 고려해야 될 조건을 최소화하는 거니까.
삶의 비용을 줄이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건 스스로의 기호를 어느 정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적용되는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
지금까지 의식주를 포함한 여러 영역에서 다양한 가격대의 소비를 해왔다. 어떤 게 한계 효용이 높은지 몰라 여기저기 참 많은 돈을 썼다.
돌아보면 돈이 아까운 소비도 있었다. 근데 다 스스로를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덕분에 나는 돈을 많이 써도 되지 않는 분야를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오마카세는 비싼 것을 먹어도 크게 감흥이 없었다. 음식의 문제는 아니고 그냥 내가 체감하지 못하는 거라 생각한다. 내 혀는 그렇게 민감하지는 않은 듯하다.
한계 효용이 높지 않은 분야에서 돈을 아끼면, 절약하면서도 삶의 만족도는 유지할 수 있다. 나는 전방위한 절약은 못 하니 이렇게 해야 한다.
돈을 벌기 시작하며 나도 투자라는 것을 하게 됐다. 코로나가 막 터진 때였다. 경제 불황이라 모든 기업의 주가가 폭락했다. 그때 주위에서 줍길래 나도 따라 주었다.
근데 바닥 아래에 또 바닥이 있었다. 당시 지인들을 보면 주식, 코인 얘기가 빠지지 않았다. 서로의 층수를 묻는 게 안부 인사였다.
변동성이 극렬한 전장에서 패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시장 기회를 잘 노려 부자가 된 사람도 있었다. 20대에 부자가 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주위에서 들려왔다.
누구는 갭 투자해서 몇 억을 벌었다더라. 누구는 코인을 해서 지금은 한남동에 산다더라. 이런 이야기는 보통 집단 한숨으로 마무리된다. 에휴.. 우리는 언제쯤.. 이러면서.
개인적으로 이런 무기력감을 강화하는 건 유튜브나 SNS 등에 떠도는 콘텐츠들이라 생각한다. 일부 사람들은 경제적 자유를 이루는 게 마치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인 마냥 떠든다.
(그래야만 강의를 팔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경제적 자유를 쫓는 일은 신기루를 쫓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완전한 허상은 아니다, 오아시스가 분명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다라는 희망 때문에 포기하지 못한다.
물론 누군가는 헤매고 헤맨 끝에 오아시스를 찾아낼지도 모른다. 근데 내가 그런 사람 중 하나가 되길 바라며 황량한 사막을 떠돌고 싶지는 않다.
대신 베어그릴스처럼 그때그때의 환경에 맞춰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을 기르고 싶다. 부동산, 주식이 아닌 스스로의 능력에 기대 생존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시대에 맞춰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을 계속 갖춰야 한다. 나이가 들어서도 끊임없이 일하며 배우고 발전해야 한다.
누군가는 불안한 삶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나한테는 이게 맞다. 요원한 오아시스를 찾는 여정에는 도무지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
언젠가 아는 형과 이 주제로 얘기한 적이 있다. 그 형은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이런 얘기를 내게 해 주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당장 억만금이 없다 하더라도 이미 경제적 자유를 가진 것 아닐까?
이 생각에 동의한다.
현재 IT 서비스 기획자로 커리어를 이어오고 있다. 고등학생 때부터 꿈꿔온 일이고 지금도 즐겁게 하는 중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건 행운이다.
근데 내 흥미를 떠나서라도 IT 서비스 기획자로 일하는 것엔 장점이 꽤나 많다. 그중 가장 큰 매력이라 생각하는 것은 기회다. 한 작가가 아래와 같이 말했다.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지지 않았을 뿐.
- 윌리엄 깁슨
IT 서비스 기획자로 일하면 아무래도 새로운 기술을 먼저 접하게 된다. chatGPT나 Vision Pro와 같은 첨단 기술을 활용해 어떻게 매력적인 상품을 만들어 낼지 고민한다.
또 기술과 사상은 따로 노는 게 아니기에 새로운 사상도 빠르게 접한다. IT 기업에서 수평적인 문화나 재택 근무 등을 먼저 도입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 생각한다.
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새로운 기술과 사상을 먼저 접하게 된다는 것은 분명 기회다. 그렇기에 IT 시장엔 많은 돈이 흐르고 똑똑한 사람도 모인다.
이런 조건에서 커리어를 이어 간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기회, 돈, 인재가 풍족한 곳이라 나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지치기도 한다. 이 일을 평생 할 수 있을까?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일을 해야 할 텐데 평생 하고 싶을 정도로 IT 서비스 기획 일을 좋아하나?
그건 잘 모르겠다. IT 서비스를 만드는 일이 즐겁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마음이 있다. IT 서비스를 만드는 일이 내 근원적인 창작욕에 부합하는 일인지 의문이 든다.
사실 난 서비스보다 이야기를 만드는 것, 즉 소설 쓰기를 더 좋아한다. 소설을 쓰면 아! 이걸 위해 내가 세상에 나온 거구나라고 느낄 정도로 즐겁다.
종종 소설 쓰기로 먹고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란 생각도 한다. 하루키처럼 하던 일을 그만두고 소설 쓰기에 전념하는 상상을 한 적도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 나는 하루키가 아니니까. 나의 글 솜씨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생각은 멋진 영화나 애니메이션, 책을 볼 때 더 강해졌다. 어떻게 이런 걸 만들지? 경이로움과 동시에 재능의 벽을 느꼈다.
지인의 글을 읽을 때에도 비슷한 생각이 든 적이 있다. 이렇게 글을 잘 쓰는 사람도 작가를 안 하는데 내가 뭐라고.
이렇게 스스로의 재능에 회의적인 생각을 해왔는데 최근에 생각이 바뀌었다. 돌아보면 난 재능을 따질 정도로 소설 쓰기에 깊게 파고든 적이 없었다.
소설가들이 쓴 에세이를 읽으며 나는 반성했다. 그들은 소설을 더 잘 쓰기 위해 다른 작가의 작품을 연구하고 매일 같이 의자에 몇 시간 엉덩이 붙이고 글을 썼다.
그들의 작품을 재능(Gift)의 영역이라고만 생각하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그건 작품에 들인 그들의 시간과 노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재능이 있는 사람도 이렇게 노력하는데 내가 뭐라고?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수영장에 발만 몇 번 담그고 수영에 재능이 없다고 하는 꼴이었다.
이 생각을 하고 나서는 소설 쓰기에 더 진지해지기로 했다. 유명한 소설을 찾아 읽고 연구하며 규칙적으로 글을 쓴다. 재능을 운운하기 전에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나의 재능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내가 해야 하는 일이 또 있다. 바로 내 작품에 애정을 주는 일이다.
다른 사람의 멋진 작품을 보고 내 작품을 돌아보면 아쉽고 어쩔 땐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득한 격차에 좌절하고 기가 죽는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내가 내 작품을 사랑해 주지 않으면 누가 사랑해 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이 보기엔 부족해도 부모님이 나에게 듬뿍 사랑을 준 것처럼 나도 내 작품에 그래야 하지 않을까?
돌아보니 내 글이 불쌍했다. 여태 내가 써온 글들은 어린 시절의 장난감처럼 창고에 방치되어 먼지에 뒤덮였다.
과거의 내가 쓴 글을 꺼내서 다시 읽으니 재밌었다. 독립 출판을 했고 감사하게도 몇몇 분이 읽고 후기를 보내 주셨다.
후기를 읽으며 내 글이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구나. 내 글은 생명력을 갖고 있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창고에 먼지가 쌓일 때까지 두었다.
내가 아니면 누가 내 글을 애정으로 보살피겠는가. 소설 쓰기에 진심이려면 내가 쓴 글도 진심으로 사랑해야 한다.
최근 글쓰기 모임을 하며 들은 이야기가 있다. 다른 사람의 글을 읽어 주는 것은 굉장히 다정한 행동이라고. 이 말에 공감을 했다.
작가와 독자 사이에 흐르는 다정함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바로 독자는 그 다정함을 의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독자는 자신이 읽고 싶어서 읽는다. 재미가 이어지면 책장을 넘기고 아니면 책을 덮는다. 작가에게 다정해지기 위해 책을 읽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와 무관하게 작가는 독자의 행동에서 다정함을 느낀다.
작가에겐 글을 읽는 독자의 모습이 자신의 분신과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평소 겉에 꺼내놓기 어려운 속 깊은 대화를 나눈다.
작가는 독자가 책장을 넘기는 것을 보며 감동한다. 저 분은 내 내밀한 마음을 이해해 주시는구나. 이런 생각에 독자가 다정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런 작가와 독자의 관계가 좋다. 독자가 스스로의 즐거움을 위해 한 행동이 작가에게 다정하게 다가간다. 누구 하나의 희생 없이 둘 다 행복해질 수 있다.
이런 윈-윈 관계를 알게 된 것이 글쓰기를 시작하며 얻은 큰 소득이다. 앞으로 작가-독자 관계를 더 많이 지어가고 싶다. 내가 누군가의 독자가 되든, 누군가가 내 독자가 되든 다 좋다.
가장 좋은 건 서로의 독자가 되는 관계겠다. 그런 관계라면 서로 깊은 내적 친밀감을 느끼지 않을까 한다. 다정함이 서로를 향해 흐르니까.
나이가 30을 넘으니 주변에서 결혼 이야기가 많이 들린다. 그리고 결혼 이야기에 자식처럼 딸려오는 이야기가 있으니, 바로 자식 이야기다.
누군가 나에게 자식을 갖고 싶은지 묻을 때마다 생각이 없다고 얘기한다.
일단 내가 애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어린 친구와 함께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어색하다. 애기들과 눈싸움을 하면 매번 진다. 눈을 바로 피해 버리기에..
이 이야기를 하면 종종 듣는 얘기가 있다. 너의 자식이라면 다를 거라고. 자기도 그랬는데 조카를 보고 생각이 달라졌다고 얘기한다.
물론 그들의 말이 맞을 수 있다. 내 자식이면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껴질 수 있겠지. 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확률 게임에 걸기엔 자식을 가지는 문제는 너무 무겁다.
개인적으로 아직까지는 자식을 가질 만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나마 일반적인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인간은 세상에 흔적을 남기기 위해 자식을 갖는 거라 생각한다. 자식을 기르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그만큼 세상에 깊은 흔적을 남기기 용이한 방법이 또 있을까.
자신이 죽은 뒤에도 세상에 남아 있을 흔적을 만드는 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의 흔적은 그의 삶 중에 사라진다.
자식은 보통 그렇지 않다. 자식은 일반적으로 부모보다 오래 살고, 심지어 그들 또한 자식을 낳기도 한다. 흔적이 연장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나는 숭고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뿌리가 뻗어 나를 비롯한 주위의 소중한 사람들이 세상에 나온 거니까.
하지만 나도 그런 흐름에 동참하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나는 다른 식으로 세상에 흔적을 남기고 싶다.
자식이 아닌 작품으로 세상에 깊은 흔적을 남기는 것. 내가 죽어서도 이 세상에서 기억될 작품을 만들고 싶다.
오래도록 기억될 고전을 만든다. 이게 나의 꿈이다. 쉽지 않겠지만 이제 나이 30이다. 에에올로 50살이 넘어 아카데미 남우 조연상을 수상한 키 호이 콴처럼 끊임없이 도전해야지.
마지막으로 건강이다. 30년을 살아오며 가장 많이 미룬 일을 하나 꼽으라면 건강 챙기기가 아닐까 싶다. 매년 신년 계획에 포함되어 있지만 어느새 슬금슬금 잊혀진다.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나의 장대한 계획을 위해선 몸이 버텨 주어야 할 텐데 지금처럼 살면 답이 없을 것 같다.
최근에는 아침마다 석촌호수를 달린다. 처음엔 매일 뛰지는 않았는데 횟수를 늘려 거의 매일 아침 호수로 나선다.
달리기를 시작하니 몸에 활력이 조금 생겼는지 다른 운동에도 관심이 생겼다. 과욕일 수 있겠지만 최근에 여러 가지 운동을 등록했다.
등록한 운동 중에 필라테스가 있는데 자세 상담을 받으며 놀랐다. 나의 몸이 이렇게 무너져 있었구나. 상담을 하고 나니 전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처참하게 보였다.
그 처참했던 감각을 잘 기억하고 있어야겠다. 그래야 더 이상 미루지 않고 꾸준히 할 테니까. 결심을 위해서 이렇게 30살 리뷰 글에도 남겨 놓는다.
제목을 30살 리뷰라 썼지만 쓰고 보니 이게 리뷰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을 정리했으니 된 거 아닌가?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위에 내가 적은 것들 중 변하는 게 있으면 좋겠다.
(건강에 대한 결심 빼고..)
어디서 흘러가듯 본 기사가 있다. 사람이 33살 이후로 새로운 음악을 잘 듣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팩트인지는 모르겠지만 경각심이 들었다.
100세 인생. 어쩌면 그 이상을 살게 될 수도 있는데 겨우 1/3 정도 지점에서 삶이 고정되는 건가. 그렇다면 조금 슬픈 일이 아닌가 싶다.
변하기 위해 변할 필요는 없지만 말랑말랑해지기 위한 노력은 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머리가 점점 빠르게 굳을 것만 같다.
이번 글이 앞으로 변화할 나를 위해 남겨 놓은 스냅샷이 되길 바란다. 30년 간 알차게 살았으니 앞으론 알을 깨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서자!
내가 좋아하는 사자성어이자 영화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의 중국판 제목으로 글을 마친다.
天马行空
천마행공
천마가 하늘을 달리듯,
구속감이 없고 자유분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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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글을 쓰기 전에는 좀 무기력했는데, 글을 쓰며 삶을 돌아보니 다시 앞을 바라볼 힘이 생겼다. 회고도 종종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30년 사느라 고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