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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Woo Lee Sep 21. 2022

나의 언어로 나의 일 정의하기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다.

예전에 독립서점에서 산 책을 읽다가 흥미로운 부분을 발견했다. 누군가에게 글쓰기를 가르칠 때 쓰는 방법이라는데 아래와 같은 식이었다.


'나는 카레를 좋아해'라는 문장의 의미를 '좋아해'라는 단어없이 표현한다면?

[예시]
일단 카레 안에 노랗게 물든 포슬포슬한 감자와 탱탱한 계란을 보면 없던 식욕도 샘솟아. 숟가락에 카레 소스와 건더기를 듬뿍 퍼올려 갓지은 밥에 슥슥 비비지. 그리고 입 안에 넣으면 환상적인 식감 파티가 벌어지는 거야...


다소 난해한 예시이긴 한데 정리하면 내 마음속에 있는 어떠한 이미지(심상)를 뭉뚱그리지 않고 풀어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면 나의 마음을 더 잘 담아낸 매력적인 글이 된다고 한다.


또한 최근에 마음챙김 관련 글에서도 비슷한 맥락의 내용을 봤다. 마음 상태에 대해 단순히 좋다, 나쁘다가 아니라 더 세밀히 풀어서 정리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그래야만 자신의 마음 상태를 제대로 진단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들을 종합했을 때 비트겐슈타인의 말이 떠오른다.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다.


인간은 언어로 사유하기에 풍부한 언어를 갖고 있지 않다면 비좁은 세계에 살 수밖에 없다. 아래와 같은 농담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닌 것이다.

과거에 돌았던 공대생 조크

요새는 이 '언어의 한계는 곧 세계의 한계'라는 관점에서 내가 하는 일을 바라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다시 말해 앞으로는 나의 일을 보더 더 디테일하게 정의하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나의 일을 뭉뚱그려 표현해왔다. 주로 사회에서 빌려준 말, 즉 직업명으로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정의해왔다. 나는 IT 서비스 기획 일을 하고 있어 혹은 나는 PM, PO야와 같은 식으로.


물론 이게 사람들과 이야기할 땐 편리하다. 상대방이 더 쉽고 빠르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할 수 있을 테니까.


근데 나의 정신 건강면에서는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나와 같은 직업명을 달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불안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참 잘하는구나.
근데 왜 나는 저 사람처럼 못 하는 걸까.
나는 갈 길이 멀구나.
나는 재능이 없구나.


위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의기소침해지고 스스로를 보채게 된다. 이렇게 잘하는 사람이 많은데 마음 놓고 있을 시간이 어딨어 하면서.


근데 돌아보면 위와 같은 상황에서 불안감을 느낄 필요가 없었던 경우가 대부분이다. 막상 파보니 같은 직업명을 달고 있을 뿐 하는 일이 다른 경우가 많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기획자가 하는 일은 천차만별하다. 비즈니스/서비스/콘텐츠 기획자. 다르게 분류하면 프론트/백엔드 기획자. 이외에도 끝없이 나눠볼 수 있을 것이다.


(아마 다른 직업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결국 나는 내가 하고 있지 않고, 하고 싶지도 않은 일을 잘하는 사람을 보며 불안감을 느껴온 셈이다. 단지 그 사람과 내가 같은 직업명을 달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앞으로는 그러지 않도록 이제부터 나의 일을 나의 언어로 정의해보려 한다. 아래처럼..


머릿속에 있는 상상이 구체화되는 게 정말 즐겁다.

다른 사람이 만들어놓은 기반 위에서 무언가를 만드는 것보단 내가 Zero부터 시작하는 게 좋다. 마치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처럼.

IT 서비스 기획 일을 주로 하지만 그 일만 하는 것도 아니고 그 일만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SF소설 쓰기, 에세이 쓰기, 책 만들기 등등 하는 것들이 많은데 다 내가 즐겨하는 일들이다.
....


이렇게 나의 언어로 나의 일을 정의하면 불안감을 느낄 일이 적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일과 나의 일에 구분이 생겨 서로 마구잡이로 비교하는 일이 없을 테니까.


더 나아가 내가 하고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이 더 선명해져 성장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또 직업명에 얽매여 생각하는 것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IT 서비스 기획자 뿐만 아니라 공간 기획자도 해볼 수 있고 디자이너도 꿈꿔볼 수 있다.


장점이 참 많은데 그동안 게으름에 내 일을 정의하는 것을 소홀히 했다. 이상형 얘기해보라면 그렇게 곰곰이 고민하고 답하면서 나의 일에 대해선 왜 그러지 않았는지.. 반성을 하게 된다.


근데 생각해보니 예전에 나의 언어로 나의 삶을 정리해본 적이 있었다. 군대에 있을 때였는데 날 잡고 하루 종일 노트에 끄적였던 기억이 난다. 그 작업을 지금 또 다시 해봐야겠다.


옛날 기분도 낼 겸 종이 노트에다가 한번 정리해봐야지.

내 언어로 나를 정의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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