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실패는 스멀스멀 다가온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 소설 안나 카레니나 첫 문장 >
왜 하필 영국에서 산업 혁명이 일어났을까?
아주 오랜 기간 학자들이 계속해서 토의해온 문제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그에 대한 답은 물론이며 산업 혁명의 정의나 범주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다.
그래도 어쨌든 한 가지 확실한 건 영국의 케이스가 굉장히 '특별'하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조건들이 충족되어 우리가 혁명이라 부를 만한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지금 우리에겐 산업 혁명이 너무나 익숙해서 그 조건을 맞추는 게 쉬워 보일지도 모르지만 당시엔 전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몇몇 국가에선 금방 영국을 뒤따라 산업화에 성공했다. 아마 영국의 영향을 받은 것도 있겠지만 기존에 영국과 유사한 정도로 산업화의 전제 조건을 충족시켜놨을 것이다. 뭐든 한 번에 이뤄지는 건 없으니까.
하지만 산업화의 속도가 비교적 미진한 나라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 이유는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처럼 국가마다 가지각색이었다. 나라마다 서로 다른 이유로 산업화 속도에 차이를 보였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드는 나라가 하나 있다.
4대 발명(화약, 나침반, 제지술, 인쇄술)을 통해 한 때 세계 문명을 선도하고 국제 생산량에서 굉장히 높은 비중을 차지했던 중국. 그랬던 중국이 왜 산업 혁명에 실패하다 못해 심지어 산업화에 뒤쳐지기까지 했을까?
이번 포스트에선 위의 의문에 대해 조심스럽게 몇 가지 가설을 세워보고자 한다. 아마 가설들을 읽다 보면 역사적 실패가 한순간의 큰 실수가 아닌 스멀스멀 쌓인 작은 요소들로부터 비롯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예전 국어 시간에 배운 수필이 하나 떠오른다. 바로 이어령 선생님의 '폭포와 분수'다. 수필에선 유럽이 분수를 좋아한 반면 아시아는 폭포를 즐겼다는 점에서 두 문화 간의 차이가 드러난다고 설명한다.
유럽 - 자연계를 지배하고 인간의 관리 아래에 두려는 경향
아시아 - 우주를 하나의 유기체로 간주하고 인간을 그 유기체의 일부라고 여기는 경향
그렇다면 왜 위와 같은 서로 다른 경향성을 갖게 되었을까?
다양한 가설이 있지만 개인적으론 두 지역 간의 자연환경 차이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척박한 땅에서 기원하여 역사 초기부터 자연을 극복할 수밖에 없었던 유럽, 비교적 비옥한 땅에서 시작할 수 있었던 중국.
유럽에 많은 지적 전통을 물려준 고대 그리스는 산이 많고 평야가 적었다. 또한 여름엔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아 항상 물 부족에 시달렸다. 이처럼 자연환경이 녹록지 않았기에 이들은 농업에만 의존하지 않고 지중해로 나가 해외 무역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에만 의존치 않고 지중해 무역이라는 돌파구를 찾았다는 점에서 그리스인들은 스스로를 자연계에서 분리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리스인들은 자연의 순리는 극복할 수 있는 것이라 여기게 되었다. 결국 그들은 자연을 도구화/객체화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반면에 중국은 비교적 괜찮은 환경 덕분에 문명 초기부터 정착 농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 또 그들 곁엔 황하라는 대자연의 힘을 여실히 보여줄 수 있는 넘사벽의 강이 있었다. 황하는 일정 주기마다 범람했지만 범람 뒤엔 농업에 알맞은 비옥한 토지를 인간에게 선사했다.
위와 같은 현실적 상황이 우주와의 조화라는 자연관으로 이어지게 된 게 아닐까 싶다. 최대의 수확을 거두기 위해선 자연의 흐름에 따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자연관은 이후에 유가, 도가 사상 등의 바탕으로 작용하며 발전되었다. 중국인들의 의식 깊숙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중국인들의 의식 속에 인간이나 자연물은 독립된 존재가 아닌 우주에 조화로이 종속되어 있는 존재였다. 때문에 중국인들은 자기 자신이나 특정 현상을 독립적인 인과 관계가 아닌 전체적인 조화 관계로 설명하려는 경향을 띠었다.
이와 같은 유럽과 중국 간의 자연관 차이는 의학에서 잘 드러난다. 서양 의학은 문제가 되는 부분에 직접적으로 치료를 하지만 중의학에선 신체의 전체적인 균형을 다시 잡는 것에 집중한다. 이 때문에 서양 의학에선 부위별로 접근하는 해부학이 동양에선 신체의 혈을 잡아주는 침술이 발달한 게 아닐까 싶다.
그런데 산업 혁명과 위와 같은 자연관의 차이가 무슨 연관을 가질까?
바로 과학 연구 방법에 있어서의 차이다.
중국의 4대 발명을 보면 중국이 기술 창조면에서 굉장히 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봤을 때 그 기술을 더욱더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킨 건 유럽이었다. 이건 기술의 발전이 기술의 발명과는 다른 계통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 초기 기술의 발명은 그 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았기 때문에 관건은 누가 더 빨리 기술을 창조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냐에 달려 있었다. 때문에 유럽보다 더 빨리 중앙집권체제를 이룩한 중국이 초기 기술 발명에 유리했을 것이다. 큰 규모를 가진 국가라는 조건 덕분에 경우의 수가 더 빨리 쌓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술을 발전시키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초기 기술은 경우의 수가 쌓이다 보면 우연이 겹쳐 발명되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 이후의 발전에선 그러기 쉽지 않았다.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선 더욱더 정교한 과학적 방법론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방법론 중 대표적인 것이 실험이었다.
실험 - 자연에 인위적으로 개입하여 특수한 시공간적 조건하에서 이뤄지는 탐구 방법
자연에 인위적으로 개입한다라는 말을 보면 중국보다는 유럽의 자연관이 떠오른다. 또한 실험은 기본적으로 인과 관계를 연구하는 방법이라는 점에서도 유럽의 자연관이 떠오른다.
실제로 조지프 니덤이라는 저명한 과학사회학자는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중국의 과학이 근대 과학으로 발전하지 못한 원인은 실험 과학의 부재 혹은 결핍에 있었다."
그런데 사실 니덤은 위와 같은 역사의 원인이 과학과 수학의 관료화에 있다고 보았다. 아마 고대 시기부터 형성된 자연관만으론 중국의 과학 근대화 부진을 설명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나 보다.
니덤은 중국에선 과학과 수학을 주로 관료의 일에만 활용했다고 설명했다. 때문에 과학과 수학이 학문으로써 다양하게 교류되지 못하고 발전을 멈췄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니 중국의 산업화 부진엔 국가도 한몫을 한 것 같다. 그러니 이번엔 국가의 문제에 대해 알아보자.
중국은 진나라 시절(기원전 221년) 중앙집권체제를 마련하는 것에 성공했다. 13세기에 와서 중앙집권체제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유럽과 비교했을 때 시기적으로 상당히 이른 것이었다. 이에 대해선 다양한 가설들이 있지만 개인적으론 (또) 대륙의 지형적 특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중국에는 중원이라는 지리적 중심 무대가 존재했다. 중원은 중국의 고대 국가인 하-은-주(기원전 2000년 ~ 기원전 256년)를 걸쳐 개발된 지역으로 중화 민족이 형성된 곳이다. 중화 민족은 비교적 개방된 중원의 지리적 특성에 영향을 받아 중원의 거주민이 북/남방의 민족들을 결합하면서 형성되었다.
특히 주나라는 현재 중화 문화의 원류가 된 국가라 일컬어지는데 이때 "중원을 지배하는 것이 곧 천하를 통일하는 것"이라는 관념이 생겼다. 이는 민족이 형성된 곳이자 개발 지역인 중원이 당시부터 경제/정치적으로 상당히 중요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때문에 대부분의 정치 세력들에게 거점 지역인 중원을 통일하는 건 큰 꿈이었다. 그리고 주나라 시절 형성된 천자(天子)는 한 명뿐이라는 천명사상은 그들의 중원 통일에 대한 꿈을 더욱더 부추겼다. 이는 산지가 많아 폴리스라는 비교적 분리된 정치 형태를 가졌던 그리스와는 대조되는 지점이다.
그리고 중앙집권체제는 중원의 거대한 통일 제국을 유지하는 것에 필요한 체제였다. 특히 주나라가 제대로 된 중앙집권체제를 마련하지 못하여 멸망한 것이 이후의 제국들이 중앙집권체제로 나아가는 것에 큰 영향을 끼쳤다. 국가가 이리저리 분리되지 않기 위해선 중앙이 최대한의 힘을 갖고 있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주나라 이후 춘추전국시대의 국가들은 중앙집권체제를 갖추기 위해 다양한 연구를 했다. 제자백가 사상이 대표적인 연구 성과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결국엔 진나라 때에 와서 중앙집권체제가 마련된 것이다.
그럼 지금까지 중국이 왜 중앙집권화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 알아봤으니 이젠 이 중앙집권체제가 왜 중국의 산업화에 악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 알아보자.
중앙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선 인력과 자원이 집중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과거제와 관료제가 고안되었다. 과거라는 시험으로 사람을 뽑는 건 귀족이라는 세습 세력을 약화시켰고 이는 곧 왕권의 강화로 이어졌다. 또한 피라미드식 관료제는 상명하달식 질서로 운영되어 중앙에 권력을 집중시켰다.
또 자본을 독점하기 위해 국가는 상업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염철 전매제가 가장 대표적인 예다. 당시 엄청난 돈줄이 되던 소금과 철의 거래를 국가가 독차지했다. 이외에도 국가 자체적으로 지역 간 비교우위, 계절별 산품의 시세 차익을 노려 장사를 하기도 했다.
위의 제도 및 조치들 덕분에 국가는 넓은 영토를 다스릴 수 있었다. 또 인력과 자원을 집적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기에 생산력이 높아지기도 했다. 그리고 이는 곧 위에서 말한 것처럼 과학적 발명이 이뤄질 수 있는 초기 토대를 마련해줬다.
하지만 그 토대는 과학적 발명이 뿌리내리기엔 너무 단단하고 경직되어 있었다. 우선 위에서 니덤이 지적했듯 중국에서 과학과 수학은 관료들의 도구로만 쓰여 학문으로써의 발전에 한계를 가졌다. 유럽에서 과학과 수학이 학자와 기술 장인들 간의 활발한 교류로 발전한 것과는 대조된다.
이는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대부분의 일을 관 주도로 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화약 같은 과학 기술이 민간에 의해 발전될 경우 귀찮은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할 때 지식의 독점은 상당히 괜찮은 선택지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민간의 기술 장인들이 가만히 있었던 건 아니다. 그런데 학문적인 연구 없이 단지 기술적으로만 접근하다 보니 한계점이 많았다. 이에 대해 니덤은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중국의 과학과 기술은 갈릴레오식이라기보다는 다빈치식이었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 다빈치와 갈릴레오의 차이에 대해 알아보자.
다빈치 - 헬리콥터나 원심 펌프와 같은 진보적인 기계를 스케치할 수는 있었으나 과학적 이론에는 큰 기여를 하지 못했음.
갈릴레오 - 실험적 탐구와 수학을 매개로 한 과학 방법 제시, 유럽을 변혁시킴.
그러니까 결국 중국에서 과학과 수학은 관료들에 의해 사무적으로만 이용되어 학문적으로 발전되지 못하고 기술 장인들과도 교류되지 못한 것이다. 때문에 중국 정부나 민간은 4대 발명을 해내긴 했지만 그 이상으론 제대로 된 테크를 탈 수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과학 기술 및 지식이 국가를 중심으로 활용된 것에만 있지 않았다. 사실상 더 큰 문제는 재산권의 부실에 있었다. 국가는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상인들의 부를 제한했다.
위에서 말한 대로 정부는 자본을 얻기 위해 직접 상행위를 했다. 많은 상인들이 국가의 시장 개입에 안정성을 잃게 됐다. 상인이 투자를 했는데 갑자기 국가가 와서 이거 내가 할래라고 하면 답이 없었다. 때문에 상인이 투자를 하는 건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다.
물론 국가에게 허가를 받고 상업 활동을 하는 상인들도 있었다. 하지만 국가는 그들에게도 많은 수탈을 했다. 혹은 국가에게 허가권을 얻기 위해 관리에게 뇌물을 주는 경우도 많았다. 이와 같은 흐름이 계속 이어져 와 중국엔 지금도 지대 추구 행위(Rent seeking)가 상당히 잦다.
반면에 서구에서는 사유 재산에 대한 공적인 착취가 중세 말에 이르러 구체적이고 예상 가능한 세금의 형태로 변화되었다. 그리고 이 덕분에 서구의 상인들은 자본을 안정적으로 운용하고 신사업에 더욱더 적극적으로 투자할 수 있었다. 또한 은닉 재산이 줄어 정부의 세수가 오히려 증가하기도 했다.
어쨌든 중국에선 국가가 절대적인 힘을 휘두르다 보니 사유 재산이 제대로 보호받지 못했다. 그리고 이는 결국 상인들의 세력이나 신영역에 대한 민간 부문의 투자를 억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더 일을 어렵게 만든 건 특허권의 부재였다. 기술 발전을 위해선 발명한 사람의 권리를 존중해줄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고선 동기부여가 될 리가 없다. 어차피 고생해서 만들어봤자 공공재처럼 될 게 뻔한데 뭐하러 기술을 발명하나 혹은 기술 개발에 투자하나? 이런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이는 유럽에서 재산권이나 특허권이 지속적으로 발전해온 것과 대조된다. 유럽의 상인들은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관련 법의 제정을 촉구했다. 하지만 중앙의 힘이 너무 강력한 중국에선 그렇게 하기 어려웠다. 중국에선 나라 마음대로, 인치 혹은 덕치의 이름으로 상인들을 다스렸다.
그리고 덕치의 이름으로 상인들을 다스렸다는 건 곧 사농공상 체제에 따라 그들을 다뤘다는 얘기다. 사농공상은 중국의 중앙집권체제를 완성시키는 것에 혁혁한 공을 세운 유가 사상의 주요한 내용 중 하나였다.
사농공상은 처음엔 공자가 이익을 추구하는 상인을 아니꼽게 생각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사농공상은 나라에 필요한 농업을 진작시키고 상인을 견제할 수 있다는 국가의 현실적인 니즈와도 맞는 것이었다.
특히 전쟁이 잦았던 춘추전국시대엔 병사들에게 조달하기 위한 식량이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상인보단 농민을 더욱더 대우해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사농공상은 그런 필요에 딱 맞는 질서 체계였다.
하지만 그 질서 체계는 과학 발달에 필요한 공인과 상인을 소외시켰다. 물론 송나라 이후 대도시가 생겨나면서 실제적인 대우가 조금씩 달라지긴 했지만 여전히 사농공상 체계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또한 유학을 공부한 관료/사대부를 과도하게 우대해주는 것도 문제였다. 유학은 관학으로써 나라의 사상적 엔진이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과거에 통과하여 출세하거나 명망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선 유학을 파야 했다.
때문에 자본가들은 자신의 부와 명예를 위해 신사업보다는 유학 연구에 돈을 들였다. 관이 모든 걸 해 먹는 상황에선 관학인 유학에 투자하는 게 어떻게 보면 더 안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은 자신의 자식들이 관료가 되도록 하거나 학당을 지어 유학자(관료)들을 후원했다.
이처럼 사농공상은 자본가인 상인마저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도록 만들었다. 기술 투자의 주역들이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여 관료제에 한 눈을 파는 상황에서 기술 발전은 분명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결국 중국은 중앙집권체제로 기술이 싹틀 수 있는 기본적인 판을 만들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 나아가는 것엔 한계가 있었다. 국가가 지반을 너무 꽉 잡고 있느라 과학 발명의 싹들이 뿌리를 제대로 내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게 결국 산업화의 부진으로까지 이어졌던 게 아닐까?
그런데 이 가설에 의문을 표하는 학자들도 있다. 산업 혁명이 일어나기 얼마 전 중국과 영국의 기술 발전 정도에 큰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명초부터 이미 기계화에 필요한 수력 기계가 사용되었으며 18세기엔 공장의 작업 규모나 면방적 기계의 생산량 등에서는 중국이 영국보다도 앞서 있었다.
또한 유명한 경제사학자인 치폴라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산업 혁명은 무엇보다도 사회문화적인 것이기 때문에, 새롭고 좀 더 생산성 높은 기계가 없었다는 것이 중국의 산업화를 가로막은 결정적인 장애라고 하기에는 매우 미심쩍다."
이는 자연관의 차이, 중앙집권체제로 인해 중국의 기술 발전이 부진했다는 위의 가설들에 빈틈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의문을 제기한 학자들은 당시의 물적 토대 또한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얘길 한 번 들어보자.
산업 혁명이 기술적인 것이 아닌 사회문화적인 것이라는 얘기는 뭘까? 아마 다음과 같은 말로 풀이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산업 혁명은 기술만 있다고 이뤄지는 게 아냐. 변화에 대한 필요성이 있어야 이뤄지는 거지."
우린 역사를 시간 흐름대로 파악하다 보니 시간이 흐르면 어떠한 변화가 필연적으로 발생할 거라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변화는 항상 새로운 투자와 희생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 투자와 희생을 감내할만한 막대한 가치가 눈앞에 있지 않다면 인간은 잘 변하지 않는다.
산업 혁명으로 나아가기 위해 중국과 유럽이 감내해야 할 희생은 서로 달랐다. 이는 중국과 유럽의 사회문화적인 배경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국가의 사회문화적 배경은 보통 당시의 물적 토대, 즉 경제적 조건(상황)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중국은 위에서 말한 대로 역사 초기부터 황하 부근의 비옥한 땅에 기대어 농사를 지어왔다. 하지만 비옥한 땅이라고 중국의 농민들이 풍족한 삶을 살았다고 오해해선 안된다. 왜냐면 비옥한 땅이 많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 초기 땐 몰라도 인구가 점차 늘어나자 농토 부족 문제가 점차 심각해졌다.
때문에 중국인들은 처음엔 북쪽에서 그 역사를 시작하긴 했지만 새로운 농토를 찾아 계속 남쪽으로 이동해야 했다. 서쪽으로 가기엔 거친 산맥과 사막이 있었고 북쪽은 너무 추웠으며 그나마 만만한 것이 남쪽이었다. 물론 동쪽으로 이동해서 한반도로 오게 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주 - 정착 - 인구 증가 - 이주
위의 과정이 계속해서 반복되었고 중국인의 활동 범위가 넓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농토 부족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인구는 꾸준히 늘어난 반면 중국 본토에서 쓸만한 농토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중국의 남쪽은 북쪽보다 날씨도 좋고 물 구하기도 좋아서 농사짓기 좋았지만 결정적으로 평지가 많이 없었다.
그래서 계속 개간을 할 수밖에 없었고 대표적인 것이 계단식 논이었다. 그런데 계단식 논을 만드는 것엔 굉장히 많은 노동력이 들어갔다. 또 쓸 수 있는 땅이 워낙에 적었기에 지력(地力)을 유지시키는 것이 굉장히 중요했는데 여기에도 많은 인력이 필요했다.
때문에 중국에선 1인당 경작지가 매우 작을 수밖에 없었다. 쓸만한 땅이 별로 없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고 새로운 땅을 개간하는 거에 너무 많은 자본과 노동이 들어간다는 것도 문제였다. 그래서 본격적인 토지 개간은 보통 대지주나 자본가를 끼고 이뤄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개간 속도는 인구 증가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고 또 개간 기술에도 한계가 있어 농토가 다 분산적으로 존재했다. 농업은 본디 한 곳에서 집적적으로 경영해야 더 효율성을 띠는 법인데 중국에선 그게 제대로 안 이뤄진 것이다.
또한 개간에 들어간 비용이 커서 소작비(땅을 빌리는 비용)가 전체 생산량의 50~70%로 말도 안 되게 높기도 했다. 그래서 결국 중국 농민들의 소득 수준은 굉장히 낮았으며 좀처럼 나아지는 경우가 없었다. 대부분의 농민들이 소규모 자작농이거나 소작농이었다.
그리고 위와 같은 농토 부족의 문제는 15세기 이후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하면서 심화되었다. 1400년에 6500~8000만 명 정도였던 인구가 그 이후에 급격하게 증가하여 19세기 중반엔 4억 3000만 명으로 늘게 되었다. 물론 이전에도 인구 변화가 있긴 했지만 그 변동폭이 15세기 이후의 변화만큼 크지 않았다.
1400년에 한 명이 차지하던 공간에 1850년에는 6명이 살게 되었으며 1인당 경작지가 1400년에는 5.1묘였던 것이 1953년엔 2.9묘로 줄어들었다.(한 묘에 약 200평 정도라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이는 경작 면적의 증가가 인구 증가를 따라잡지 못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잠시 의문이 하나 생긴다. 왜 저 때 인구가 저렇게 비이상적으로 증가했을까? 전통농업사회에서는 출생률이 급격히 변화하는 경향이 없기에 아마 사망률에 변화가 있었을 거라 생각된다. 사망자가 줄어드니까 인구가 점차 누적, 증가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사망률이 감소했을까? 이에 대해선 다양한 가설들이 존재한다. 명청 시대의 정치적 안정기로 전란과 혼란이 줄어 사망률이 감소했다는 가설, 의학이나 위생 그리고 면역력이 개선되어 사망자가 줄었다는 가설, 외래 작물의 도입과 기후 변화로 인한 생산량의 증가가 인구 증가의 공간을 마련해줬다는 가설 등 다양하다.
(생산량이 증가했다고 농민이 무조건 이전보다 여유로워진 것은 아님. 증가분은 늘어난 인구에 분배되었음.)
아마 위의 사례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인구가 증가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인구의 증가를 경작지의 증가는 따라잡지 못했다. 그래서 일인당 경작지가 점차 더 줄어들었으며 이에 따라 사람들의 빈곤도 점차 심해졌다.
중국의 인구에 비해 경작지가 얼마나 작은지 감이 잘 안 잡힐 수도 있으니 미국과 한 번 비교해보자.
위의 표처럼 중국은 인구는 너무 많은데 경지 면적은 너무 적었다. 그래서 사실상 수확을 하더라도 각 개인에게 돌아가는 몫은 거의 없었다. 기존엔 그래도 자급자족이라도 겨우겨우 했는데 이젠 아예 파산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이다. 들어오는 돈보다 나가는 돈이 더 많았다.
그래서 결국 농민들은 다른 활로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바로 상품 작물과 가내수공업이었다.
먼저 상품 작물은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한 작물이었다. 상품 작물은 자급자족을 위한 작물보단 가격이 높았기에 잘 재배해서 팔면 생계에 더 도움이 되었다. 중국 농민들은 상품 작물을 판매해서 난 수익으로 생활에 필요한 식량이나 생필품을 구매했다.
처음에 상품 작물을 판매하는 건 꽤나 괜찮은 선택인 것처럼 보였다. 이전보다 농민의 수입이 많이 증가했다. 하지만 시장에 불황이 찾아오면서 문제가 나타났다. 상품 작물이 팔리지 않으면 농민은 자급자족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식용이 아닌 상품 작물이 많았기 때문이다.(면화, 담배 등등..)
그리고 결국 소작농과 빚쟁이가 속출하게 되었다. 계속 살아남으려면 가진 토지를 대지주에게 담보로 내놓고 돈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농민들은 항상 빚과 소작비에 쫓길 수밖에 없었다. 그전에도 그랬지만 상품 작물을 생산하고 난 뒤엔 더욱 심해졌다.
불안정한 처지에 놓인 농민들은 어쩔 수 없이 농업 외에도 또 다른 부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가내수공업이었다. 많은 농민들이 농사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 면제품의 생산에 종사했다. 그리고 생산한 면제품을 시장이나 주문자에게 갖다 팔았다.
하지만 그 금액은 정말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농민들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모두가 가난했기에 몇 푼 안 되는 노동이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가계에 플러스가 되는 일이라면 그들은 자기착취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이게 중국의 산업 혁명을 더디게 한 핵심 원인이라 여겨지고 있다.
자기착취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값싼 노동력
그리고 그에서 비롯된 비참한 소득 수준
기업가가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기 위해선 강력한 동기가 필요하다.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는 것엔 많은 자본이 투입되기 때문이다. 공장을 짓고 기계를 설치해야 한다. 또 새로운 기술에 맞춰 노동자를 교육시킬 필요도 있다. 때문에 아래의 조건 중 하나라도 충족이 안된다면 변화는 일어나기 어렵다.
기존의 생산 방식을 유지하는 게 부담이 될 정도로 인건비가 증가
기존의 생산 방식으론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수요가 폭증
하지만 중국에선 위의 두 가지 조건이 모두 충족되지 않았다. 인건비는 너무나도 저렴했기에 기존의 생산 방식을 유지하는 것에 그 어떤 문제도 없었다. 또한 주요 소비자인 농민들의 소득 수준이 비참했기에 수요가 폭증하는 경우도 없었다. 결국 중국의 기업가 입장에서 새로운 기술을 도입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 보면 답답해 보이지만 당시의 시장 상황을 고려하면 중국 기업가들의 선택은 오히려 합리적이었다.)
영국은 이와는 달랐다. 영국에선 인구가 성장함과 동시에 인구 1인당 소득이 서서히 증가했다. 그리고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와 같은 거대한 해외 시장을 개척한 것이 컸다. 영국의 사업가에겐 새로운 기술을 도입할 만한 충분한 동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 동기에 힘입어 산업 혁명까지 나아가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산업 혁명은 필요의 문제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필요의 문제는 영국(유럽)과 중국의 서로 다른 사회문화적 배경에서 비롯되었다. 기술 진보에서 밀려 산업 혁명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보는 위의 가설들과는 다른 관점인 것이다.
위의 가설들을 보면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너무 자연환경 탓만 하는 거 아냐? 자연환경에서 모든 게 비롯됐다고?"
사실 위 가설들의 앞부분엔 모두 자연환경에 대한 얘기가 전제되어 있다. 때문에 중국에서 산업 혁명이 일어나지 못한 게 자연적 필연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고 환경 결정론적 경향이 심해지면 "문명 초기부터 운명이 결정되어 있었던 건가?"라는 허무주의로 빠지게 된다.
때문에 최근에 난 위의 가설들 외에 환경 가능론과 관련된 가설을 찾고자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인간 차원에서 자연환경이 구성한 역사적 경로를 이탈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그걸 해낸 사람을 세기적 천재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보자면 스티브 잡스가 떠오른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뭘 원하는지 몰라!"
잡스는 위에서 언급한 2가지 변화의 조건을 넘어서서 사고하는 기업가였다. 변화에 대한 강력한 사회적 유인이 없어도 그는 내적 동기로 변화를 추구했다. 때문에 그의 생각은 초기엔 비교적 비합리적으로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기존의 굴레'에서 생각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아이폰이라는 혁명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인재는 흔치 않다. 대부분이 당시에 합리적이라 생각되는 흐름에 몸을 맡기기 마련이다. 마치 산업 혁명 당시 중국과 영국의 많은 기업가들처럼 말이다. 그들은 각자의 환경에 있어서 합리적이라 여겨지는 선택을 했다.
환경 결정론과 가능론. 물론 비중의 차이일 것이다. 그런데 난 개인적으론 환경 결정론의 비중이 조금 더 큰 것 같다. 조금 허무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다음의 짤이 내 생각을 잘 대변해준다.
나의 개인적 생각은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기에 환경 결정론과 가능론에 대해선 독자님들과 고민을 나눠보고 싶다.
그렇다면 이제 현재를 바라봐보자. 지금의 중국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들려오는 소식만으론 참 대단한 것 같다. 인공지능 인재를 들여오기 위해 많은 돈을 쏟고 있으며 특허도 빠르게 늘고 있다. 특히 안면인식 쪽 기술 발전이 매섭다. 블록체인 특허 방면에선 중국이 압도적 1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또 이전의 4대 발명에 이어 새롭게 4대 발명을 했다는 얘기도 있다.
고속 열차(高铁), 인터넷 쇼핑(网购), 알리페이(支付宝), 공유 자전거(共享单车)
(이외에도 QR코드, 공유 자동차 등등 다양한 후보가 존재하기도 한다.)
사실 제대로 말하면 중국이 발명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 어떤 곳보다도 중국에서 활성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신 4대 발명이라는 말이 도는 것 같다. 좀 중뽕이 들어간 것 같긴 하지만 알리바바나 텐센트가 구축한 IT 생태계와 기술력은 무시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중국은 산업 혁명 시기와 달리 다시 기술을 선도하는 위치에 서게 된 걸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YES라 해도 될 것 같다. 하지만 과연 중국이 다음 기술 혁명을 선도하게 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잠시 보류해둬야 할 것 같다. 왜냐면 중국은 여전히 위의 가설들에서 제시한 문제들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아래의 두 문제가 여전하다.
나라가 다 해 먹는 중앙집권적 구조의 폐해
변화를 가로막는 농토와 인구 문제
중국은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공산당이 영도하는 중앙집권적 국가이다. 정부의 힘이 강력하며 국가의 시장 개입이 잦은 편이다. 개혁 개방을 거치면서 이전보다 상황이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시장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또 공산당이 만들어낸 강력한 이데올로기에 묶여 사회가 비교적 경직되기 쉽다.
그리고 농토와 인구 문제는 여전히 중국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농촌에는 잠재 실업, 반 실업 문제가 심각하며 도시로 농민이 몰리면서 생겨나는 문제(농민공 문제)도 무시하기 어렵다. 5억이 넘는 농민의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는데 애를 먹고 있으며 그들의 소득 수준 또한 충분치 못한 상황이다.
위의 상황이 심각해지면 우선 중국은 기술 진보에 있어서 한계점을 갖게 될 수밖에 없다. 혹여 기술을 개발하더라도 적용할 필드가 생겨나지 않을 수 있다. 새로운 기술을 도입했을 때의 충격을 중국의 체제가 견디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인공 지능 기술이 고도화되어 사회에 적용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가장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은 주로 단순 업무에 종사하는 농민공이 될 게 뻔하다. 과연 5억 정도의 인구가 단숨에 실업자가 되는 걸 중국에서 감당해낼 수 있을까? 태평 천국의 난이 또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농민공이 새로운 단계의 일로 넘어갈 수 있도록 필요한 시간과 돈을 줘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임금으로는 어렵다. 하루하루 벌어먹기도 힘든데 어떻게 스스로에게 투자할 수 있을까. 기술이 준비되더라도 사회문화적 배경이 준비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인 것이다.
중국은 계속해서 역사적 경로에서 몸부림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경로에서 제대로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벗어나는 건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역사가 긴 만큼 경로는 아주 깊게 파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럴 땐 오히려 역사가 짧은 미국이 피벗(pivot)하기 더 쉽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제 이 길고 긴 포스트를 마쳐보려 한다. 그런데 마치기 전에 한 가지 교훈을 얻고 가면 좋을 것 같다. 중국의 산업 혁명 실패 역사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
"역사적 실패는 한순간의 큰 실수가 아닌 스멀스멀 쌓인 작은 요소들로부터 비롯되기도 한다."
위의 가설들을 봤을 때 엄청나게 큰 실수를 해서 벌어진 일은 딱히 없었다. 대부분이 역사의 한 점들이 모이고 모여 벌어진 일들이었다. 그리고 당시의 관점에서 봤을 때 그 일들이 반드시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때엔 상당히 합리적인 선택의 결과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미래에서, 그러니까 우리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중국의 역사에선 아쉬운 점이 많아 보인다. 왜 그때 그렇게 했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구조를 조금 더 확장해서 생각해보자.
나 -------- 미래의 나
지금의 내겐 너무 합리적이고 당연하게 여겨져서 별 의문 없이 내린 선택들. 그것이 미래의 나를 구성했을 때 그건 과연 내가 원하는 모습일까? 혹은 미래의 나는 지금의 내가 내린 하나하나의 선택들을 어떻게 생각할까?
파악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더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경로 의존성에 따라 내렸던 의문 없는 선택들에 대해 깊게 고민해봐야 한다. 그리고 이건 개인이건 집단이건 마찬가지다.
고민이 잘 이뤄진다면 우리는 보다 더 적절한 지점에서 피벗하여 더욱더 신선한 스스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가끔은 인터스텔라의 5차원에 자신의 의식을 보내 지금의 날 꾸짖어보자.
끄읕
여기까지 읽어주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해당 포스트는 아직 여물지 않은 생각으로 쓰인 것으로 지속적으로 수정될 수 있습니다.
참고한 것들
중국 사회의 지속과 변화, 로이드 E. 이스트만, 돌베개
생각의 지도, 리처드 니스벳, 김영사
중국의 과학과 문명, 조지프 니덤, 까치
총균쇠, 재레드 다이아몬드, 문학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