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어느날 북경에서-원명원

잊혀진 아픔 그리고 남은 것

by 백검

아침에 일어나 보니 머리가 부스스하다. 마치 갓 만들기 시작한 새둥지처럼. 머리카락을 더 키울까. 위대한 마르크스처럼 전투적이고 진취적인 사자머리를 해 볼까?

중산복(中山服) 바지도 배꼽 위까지 척 올려서 주석이나 서기 혹은 위원장님 동무들의 풍채를 따라 할까?

가끔 이상한 생각을 해 본다. 그런다고 내가 그런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ㅎㅎㅎ


일단 전편에 이어 북경 이야기를 계속 할까 한다. 거기에 앞서 반백이 되니 나도 가끔 치매 증상을 보이는 바이든 아저씨나 바이든이 날리면 아저씨 처럼 이말 저말 두서없이 뱉을 수 있으니 감안하시면 감사하겠다.


북경에 도착하여 짐을 찾고 이전이나 지금이나 확실하게 제대로 막히는 공항고속도로를 비집고, 목적지인 북경대학 부근 호텔에 도착하니 늦은 시간이 되었다. 부근 유명 관광지인 의화원(颐和园, 서태후가 군용자금을 탈탈 털어 지은 별장)은 한때 신물나게 다니다 보니, 자연스레 북경대 청화대 부근에 있는 원명원(圆明园)에 가보기로 했다.


우리는 북경(北京), 한국에서는 최근에 베이징(BEIJING), 중국 타지방 사람들은 帝都(황제가 사는 도시)라고 불리는 북경을 간단히 소개하면 선후로 기성(蓟城,주나라때), 연도(燕都,춘추전국), 연경(燕京,당나라때),탁군(涿郡,한나라때),유주(幽州,수나라때),남경(南京,료나라때),중도(中都,금나라때),대도(大都,원나라때),순천부(顺天府,명청시기),북평(北平,해방전), 북경(北京,해방후)로 참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우는 도시이며, 도시 발전사가 원나라전과 후로 크게 나눈다. 원나라전에는 일반 지방도시로, 원나라 때부터 원명청 3개 조대를 걸쳐 중국의 수도 즉 황제가 있는 도시로 발전한 것이다.


많은 조대를 거쳤기때문에, 특히 원나라때 칭키스칸의 손자 구빌라이 칸이 다른 경쟁적수(칭키스칸이 손자가 43명이 되었다고 하며 권위 쟁탈전이 매우 심했다 함.)들로부터 정치적 우위를 확고히 하고 동시에 중국 전역을 더 넓게 더 확고하게 통치할 목적에서 수도를 현재 북경으로 정한 것이 신의 한수가 되어 지금의 북경의 틀을 갖추게 된다. 또한 주원장의 넷째 아들 주체(朱棣,역사상 영락황제)가 자기 조카 주윤물을 황위에서 몰아내고 수도를 북경으로 정하면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자금성(紫禁城)이나 십삼릉(十三陵), 만리장성 팔달령(八达岭) ,천단(天坛),태묘(太庙), 사직단(社稷坛) 등 황가를 위한 건물들을 지었다.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운 후에도 대부분 명나라의 건물을 그대로 답습 했으며, 이외 별도로 세운 건물이 있으니 바로 원명원(圆明园)과 의화원(颐和园)이다. 한국에서 북경에 오면 거쳐가는 관광지가 자금성, 천단, 의화원, 팔달령, 십삼릉 등이나 원명원은 보통 안 간다. 폐허 라서 볼것이 없다고. 물론 중국내에서도 가끔 애국주의 사상교육기지로 활용될 때 뿐이지, 대부분 썰렁한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옆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이 편안하게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또한 북경대학과 청화대학과 거리가 엎드리면 거의 코 앞이라, 이 두 대학 젊은 커플들이 조용한 곳을 찾아 가끔 이용하 군 한다.


이번에 투숙한 호텔과도 거리가 1키로 미만이라 이래저래 원명원으로 직행했다.


원명원을 간단히 소개하면

청나라 옹정제, 건융제, 가경제, 도광제, 함품제 5대 황제에 거쳐 150여년 동안 건설해 놓은 황가의 정원, 세속적으로 말하면 황제의 소장터이자 놀이터 그리고 유흥터였다. 자기가 아끼는 금은보화와 유명 서예작품, 그리고 보고 들은 서방과 동방의 유명한 궁전과 관광지를 한 곳에 옮겨 놓은 듯한, 그래서 만원지원(万园之园,정원 중의 정원이란 뜻)이라 불리기도 하는 면적이 3.5평방키로메터에 달하는 거대한 건축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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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에 중국 부자가 1:1 비례로 원명원을 복원해 지었다는 원명신원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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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원명원이 소각된 후 13년이 지난 1873년, 청나라 세관에서 근무하던 독일인 Ernst Ohlmer이 남긴 당시 원명원 사진


Ernst Ohlmer은 후에 일기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눈안에 비추는 것은 장식물들의 풍부하고 아름다운 색채가 북경의 푸르른 하늘에 물들어 져서 보는 자가 이동하는 걸음걸음과 태양의 빛과 그림자에 따라 부단히 변화하는 것이 였다. 흰 대리석 건물이 또한 호수에 거꾸로 비춰져 환상적이였는데.....보는 자로 하여금 천일야화 세계에 들어 선 듯한 느낌에 빠지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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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D기술로 복원한 소각전 원명원 모습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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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D기술로 복원한 소각하기 전 원명원 모습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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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D기술로 복원한 소각하기 전 원명원 안유궁(安佑宫)정면 모습3


여하튼 이전에는 신기루처럼 세상에 유일무이 했던 사치와 화려함의 궁극을 그었던 원명원이 지만, 제2차 아편 전쟁때 프랑스와 영국연합군에 의해 약탈당하고 소각당하고 그래서 이제는 폐허만 남은 곳, 폐허 속에서 찬란했던 그 시절을 상상하면서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같다.




원명원 장춘원(长春园)궁문 밖 동기린(铜麒麟)복원품, 건륭제때 만들어진 동기린 진품은 현재 의화원 인수전(仁寿殿)앞에


장춘원 궁문 그리고 안에 있는 건물들도 당연히 1860년 때 다 소각 되었으며 현재는 복제품 이다. 영국 프랑스연합군은 당시 옮겨 갈수 있는 보물들은 최대한 옮겨 가서 후에 루브르박물관과 대영박물관에 주로 전시되어 있으며, 일부 약탈되어 개인들이 소장했던 원명원 보물들이 가끔 크리스티 경매에 매물로 등장하여 논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석양이 깃든 원명원 호수. 연꽃 줄기만 남은 호수와 앙상해진 나무가 호수에 비춰져 삭막함을 더 한다.
옅게 언 얼음 위에 서서 잠시 휴식을 만끽하고 있는 원앙새들.
원명원 호수가 블랙 스완
흔들리는 물 속 나무와 석양, 점이 된 새
석양 속 축 늘어진 수양버들 가지, 원명원 무명호에서
붉은 점으로 된 석양과 교각, 새둥지와 수양버들.

한 폭의 수채화로 남은 원명원의 순간

붉은 대문과 붉은 담벽, 160여년 전 휘황찬란했던 순간과 엿보게 하는 듯.


문에서 시작, 다시 문으로 끝나는 1시간 반 동안의 여정. 겨울이라 낮이 짧은 관계로 대수법(大水法) 유적지 등을 보지 못했다. 호수 주변을 돌면서 겨울 황혼 풍경이, 이젠 황량해진 원명원과 오버랩 되면서 오히려 때론 차분하게 때로는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뭉개진 그때 정서를 느낄 수 있어서 오히려 좋았던 같다.


제2아편전쟁 패배와 함께 소각된 원명원, 1860년 후에도 거의 동네북 였으니, 1900년 8국연합군이 북경에 쳐들어 왔을 때도 수탈을 당하였다. 그 후에도 남은 다리 기둥이나 건물 잔허, 대리석 조각들이 잘라져 나갔다. 지어 1928년에도 매일 강탈해가는 태호석(太湖石)이 열개 트럭에 실을 정도라니 그 규모가 가히 상상된다. 결국 150여년에 거쳐서 5대 황제의 심혈이 기울인 원명원은 철저히 폐허로 되었고 중국 근현대사의 가장 큰 아픔중 하나가 되었다.


원명원의 복원 관련 해서 후에 그 자리에 복원하겠다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아픈 역사도 그대로 남겨 후손들이 국치를 길이 기억하고 더욱 분발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주류를 형성하여 현재는 애국교육기지로 활용되고 있다.


역사는 계속 앞으로 전진하고 있다. 대청(大清)이란 불리던 나라도, 십전노인(十全老人,열가지를 다 이룬 노인)이라 자화자찬하던 건융제도, 그리고 이후 만수무강과 만세를 기원했던 수많은 인물들이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잠깐 피었다가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원명원이 소각되고, 50년이 지나 1911년 청나라가 멸망; 천하를 호령 했던 만주족은 아예 역사의 뒷길로 가뭇없이 사라져 가고 있는 중이다.


마치 원명원 호수가에 비춰져 흐드러진 오늘의 석양처럼 말이다.

물론 내일이면 또 다시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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