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만사가 뜻 대로 되면 좋겠지만, 또한 그렇지 아니하니깐 내일의 태양이 더욱 희망을 주고 세상을 사는 재미가 있지 않을 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영정(嬴政)이 불로장생을 꿈꾸며 서복(徐福)을 시켜 동남동녀 삼천 명을 데리고 불로초를 찾아 천하를 누볐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최고의 절대권력을 가진 영정이 죽지 않았더라면 혹시나 50년 정도 더 살았더라면 세상은 얼마나 불공평해졌을 것이고 일반 백성들은 끊이지 않은 노역에 투입돼 얼마나 더 오랫동안 생고생을 했을 까 싶다.
다행히 영정이 순시 중에 병으로 죽었으니,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라는 명언을 남긴 진승. 오광의 농민봉기가 있었지 않을까 싶다.
- 万寿寺에 관한 문장을 쓰기에 앞서
오랜만에 다니던 대학에 들렀다. 25년 세월이 흐르면서 대학도 서먹 서먹하게 변했다. 세월 때문인지 풍파 때문인지 산은 그 산이 아니요 물은 그 물이 아닌 격이 되었다.
하여 그 맞은 켠에 있는 万寿寺를 보러 갔다.
대학에서 도보로 5분도 안 되는 거리라 대학 다닐 때는 자주 둘러 볼만 도 하지만 그 입구에서 기념사진만 남기는 정도였으니 그 유감도 풀꼄..
万寿寺, 이름만 들어도 거창하지 않은 가?
만수무강(万寿无疆) 앞 두 자에 절간 寺를 붙였 으니 말이다.
万寿寺는 당나라 때 처음 건축 되었으며 원래 축슬사(聚瑟寺)로 불리다 1577년 때 재건하였으며 명칭을 만수사(万寿寺)로 바꾸어, 황가의 주요 서적들을 소장하고 황제 어머니 장수무강을 기원하는 장소로 되었다. 이외 万寿寺의 지리적 위치가 자금성에서 곤명호(昆明湖)로 가는 수로 중간쯤에 위치한 관계로 황제나 황태후가 어선(御船)을 타고 가는 중에 잠시 내려 차를 마시고 휴식을 취하는 휴게소 같은 역할도 했다.
어찌 보면 황제에 의한 황제와 황제가족 만을 위한 전용시설인 셈이다. 그 건설비용을 초창기 황가 자체의 자금을 쓰다가 후에는 아예 국고에서 그 비용을 충당, 심할 때는 군용 비자금을 끌어다 쓰기도 했다.
万寿寺 남문, 현재는 북경예술박물관 간판을 걸고 있다. 황제를 상징하는 문양과 붉은 담벼락.
명나라 만력제 때 황태후가 주도하여 건축. 조선반도와 인연이 깊은 만력제 주익균, 또한 해방 후 1958년 그 능묘가 발굴당하고 부관참시에 가까운 수모를 당하는 비운의 황제
주익균(朱翊钧,만력제의 이름)이 즉위한 후 그 어머니 자성황태후(慈圣皇太后)가 선제의 유지를 받들어 절을 새로 지어 경서를 보존하기로 한다. 황태후는 불교를 숭상하였는바, 국고를 쓰지 않고 직접 헌금하여 황실에서 출자하여 万寿寺를 짓기로 한다. 이렇게 하여 만력제의 새 기상을 높이고, 万寿寺 준공시기가 또한 만력제의 결혼 및 친정(亲政,정치를 직접 주관)과 맞물려 황제를 위해 기복 하는 기능도 추가되었다.
여기서 주익균을 간단히 소개하면, 1563년에 태어나 1572년 10살의 나이로 황제로 등극, 초기에 유능한 대신 장거정(张居正)이 옆에서 보필 겸 집정하여 개혁정책을 실시 부국 강병하였으나,
10년 후 즉 1582년 장거정이 병으로 사망함에 따라 주익균은 브레이크가 풀려 정사를 등한시하고 토목공사를 크게 벌이고 주색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즐겼다. 황제로서 거의 30년 동안 조정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으니 그 나태함이 극에 달했다. 중국역사에서 위충현(魏忠贤)이란 내기가 정치를 좌우지한 시기도 주익균이 황제로 있던 시기와 맞물 린다. 다행히 이 인간이 향락에 빠지기 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해서, 조선반도에 군대를 파견하여 왜군을 물리치는데 일조했다.
하여 만력황제 주익균 때 명나라가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고 보는 시각들이 많다.
축연만수(祝延万寿),황가의 기품이 보이는 단청(丹青), 우리말로 번역하면 "만수를 감축드립니다"
중국 고대역사에서 万寿(만수)는 万岁(만세)와 마찬가지로 황제나 태상황(황제아버지)과 황태후(황제어머니) 전용이며, 일반 대신들이 괜히 만수무강을 단어를 감히 썼다가 황위찬탈의 혐의를 쓰고 사형당할 수도 있었다. 황후나 황제자식들 그리고 제후국이나 조공신세인 주변 국가의 국왕 같은 경우에는 千岁(천세)란 단어를 쓰게 하였다.
간혹 경복궁 강녕전(국왕의 침실)에서 교태전(왕후의 침실)으로 가는 양의문(两仪门) 양옆 굴뚝에 새겨져 있는 만수무강(万寿无疆),천세만세(千岁万岁)에 대해서 말하는 데, 그것은 엄격히 보면 중국의 규범에 맞지 않은 것이었다. 다행히 고대 중국에서 파견된 사신들이 왕후 침실까지 갈 일이 없으니깐 들킬 가능성이 적었을 것이다.
원(元) 명(明) 청(清) 3개 조대 649년에 걸쳐 북경이 중국의 수도인 관계로 万寿로 표기되는 지역과 물건이 왕창 많다. 万寿路,의화원과 원명원 万寿山, 향산에 있는 琉璃万寿塔(유리만수탑)
관운장 청동상, 삼국지의 영웅호걸에서 중국 불교의 수호신-伽蓝菩萨로
우리가 삼국지에서 잘 알고 있는 관운장은 삼국시기 무장으로 류비가 촉나라를 세우는데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며, 그 충성심과 의리는 거의 둘째라면 섭섭할 정도로서 적군인 조조나 손권 조차 심히 탄복할 정도로 유명하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특히 그 충성심을 신하와 백성들에게 고취시키기 위하여 대대적으로 홍보하였다. 하여 부동한 나라 부동한 시기 황제들이 각각 관운장에 대한 명칭을 부여하는 바람에 중국 역사에서 가장 많은 직함을 갖고 있는 인물이 아닌가 싶다.
북송 송휘종 때만 보더라도 황제가 충혜공(忠惠公), 숭녕진군(崇宁真君),무안왕(武安王),의용무안왕(义勇武安王)시호를 4개나 하사할 정도였다.
그놈의 최고권력을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밑에 있는 대신들이나 백성들에게 맹신에 가까운 충성심이 절히 필요했을 것이다. 정작 황자들은 최고권력을 쟁탈하기 위하여 가끔 형제자매를 죽여버리거나 심지어는 황제를 독살시키기도 했지만 말이다.
물론 충성심이 필요한 것은 황제뿐만이 아닌가 본다.
문인들도 관운장을 文衡帝君(문형제군)으로 과거시험을 치르기 전 참배하기도 했고;
중국 현지 종교인 도교에서 관운장을 关圣帝君(관성제군)으로 삼아 도교의 4대 수호신 중의 하나이며
중국 한족 불교에서도 역시 伽蓝菩萨(절람보살)로 높게 모시기도 한다.
이외 홍콩 누아르영화에서 보 듯이 깡패 아저씨들도 중요한 모임을 할 때 관운장을 참배하며,
지어는 재물신으로 모셔서 식당이나 회사 입구에 극진하게 모시기도 하다. 물론 백 위안 짜리 종이돈을 그 앞에 꽂아 놓고 말이다.
이쯤 되면 역대 황제들을 동네 아저씨 취급 당하게 하는 거의 전지전능에 가까운 신앙이 관운장 신앙이 아닌가 싶다. 중화권에서 유교. 불교. 도교를 통털어, 그리고 일반인과 깡패들을 통 털어 믿고 따르니 말이다.
티베트불교-대성덕금강상(大成德金刚像), 남녀가 교합하는 자세를 취한다 하여 欢喜佛(환희불)이라고도 불림.
청나라 때는 티베트 관련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티베트와 상류층과의 문화 및 종교 교류를 강화하였으며, 티베트 종교에 대한 지원정책을 실시하였다. 하여 황제가 직접 티베트종교수령인 판첸라마와 달레이라마 등을 접견하기도 하였으며, 그들을 위해 북경 및 주변에 티베트불교 사찰을 직접 짓기도 했다.
밀교도 티베트불교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황실에 전파되었다.
춘추 전국시기 중국 화폐-도폐(刀币),주로 현재 하북성.하남성, 산서성.산동성 지역에서 사용하였으며, 칼모양을 갖추고 있어 도폐로 불림. 그 기원으로는 당시 이들 지역에서 전쟁이 자주 발생 하였으며, 칼이 가장 중요한 무기로 그 모양이 화폐에 반영된 것이라고 한다.
지금도 중국 인민폐를 국도(国刀), 미국 달라를 미도(美刀,미국칼)이라고도 부른다.
서한말기 사용되었던 화폐-일도평오천(一刀平五千). 초기 화폐는 간단한 칼 모양이나 후에 공예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그리고 화폐위조 방지를 위한 수단도 필요하여 일부 위조방지기술이 적용된다.
가장 위에 보이는 일도(一刀)는 착금(错金) 기술을 적용했는 바, 금실을 화폐에 끼워 넣은 것이다. 일도평오천인 경우, 하나에 5000문의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당시 일도평오천 2개 면 금 1근(현재 258.24그람, 한화 3310만 원 상당)
万寿寺 万寿阁
복을 상징하는 복숭아가 그려져 있고, 寿가 중심 그리고 사방에 있어 장수를 기원하는 자기 그릇
청나라 황실에서 사용하던 그릇. 寿가 새겨져 있으며, 입힌 금황색은 오직 황실에서 만 사용가능함.
서태후의 친필, 寿
중국 근대사에서 서태후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가 대부분이다. 권모술수로 국정을 농락하고, 청나라 황제도 꼭두각시로 만들어 청나라의 멸망을 압 당겨 온 악녀로 각인되어 왔다.
하지만 청말신정(清末新政)을 실시, 여성 전족과 노비제도를 폐지하고 변혁을 하려 노력한 점. 등은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万寿寺 건물들, 万寿寺는 서태후 60살 생신을 축하하기 위하여 재건, 새로운 건물 들 신축하여 사찰에서 행궁으로 격이 올라감에 따라, 京西小故宫(경서소고궁)으로 불리기도 했다.
乾隆御碑亭(건융제의 친필 시가 새겨져 있는 비석이 보관되어 있음)
万寿寺 골목길
꽃망울이 진 옥란나무
옥란 꽃망울
나오는 길에 보니 옥란화 꽃망울이 수줍게 걸려 있다. 왕년에는 3월에 피는 꽃으로 알려져 있는데 북극의 얼음도 옅어지고 없어지고 하니 아마 더욱 일찍 피지 않을까 싶다.
철없던 그 시절에는 항상 봄이 그리워, 항상 꽃이 피기를 기다려 왔는데.
요즘은 꽃이 피어도 별 감응이 없다. 경제가 꽁꽁 얼어붙어서 괜히 길 가는 사람들의 어깨도 축 처진 같은데, 꽃이 핀들 어떠하리 아니 핀들 어떠하리.
황실의 불로장생을 기원했던 万寿寺에서 관람을 마치면서 어둡고 추운 겨울이 빨리 지나가 국태민안(国泰民安)의 봄이 진정 오기를 기도 하면서 그리고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이 글을 읽은 모든 구독자께서 새해 건강하시고 안전하시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