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4.2020
2차 세계 대전 중 ‘안네의 일기’가 있었다면
3차 세계 대전 코로나 바이러스 pandemic 기간에는 파리에 갇힌 ‘starfish의 일기’가 있다.
Dear Kitty,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하루를 기분 좋게 시작했어.
너도 알다시피 지난주는 너무 힘들었거든. 프랑스 통행금지가 5월 11일까지 또다시 연장된 이후로 나는 이제는 정말 한국에 가려고 다시 한번 마음을 먹었어. 그런데 회사에서도 허락하지 않고, 비자 이슈 때문에 쉽게 떠날 수 없었지. 인사팀, 대사관, 이민 변호사, 가족 모두에게 연락하고 문의하고 요청하고 싸우면서 너무나 힘들고 혼란스러운 일주일을 보냈어. 어떤 문제들이 있었고 어떤 힘듦이 있었는지는 하나씩 다 열거하지 않을게. 어쨌든 결국 나는 이곳에 남기로 했고, 중요한 건 힘든 시간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고 있는지이니까.
먼저 오늘은 눈이 좀 일찍 떠졌어. 근데 갑자기 주말에 Nacho가 나에게 해 준 말이 생각나는 거야.
Nacho는 항상 긍정적인 vibe와 에너지가 가득한 내가 사랑하는 칠레 친구인데, 덕분에 그 친구와 시간을 보내고 나면 나까지 덩달아 긍정 에너지가 뿜 뿜 하게 돼. (Nacho에게 이미 말해뒀어. 너만큼 긍정적인데 straight인 남자 있으면 나한테 꼭 알려달라고.)
나의 지난 한 주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야기 들어주면서 공감해주고 조언해 주는 Nacho에게 나는 물어봤어. "너는 어떻게 그렇게 항상 긍정적이니? 심지어 이 머나먼 곳에 혈혈단신 갇혀있는 순간에도?" 그랬더니 Nacho가 이러는 거야.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나는 내가 감사한 것들에 대해 생각하려 노력해. 자연스럽게 떠오르지 않더라도 감사할 거리를 생각해 내는 거지!"
흠. 감사 일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보기는 했지만 진부하다고 생각했고 직접 실행해 보지는 않았었는데, 나의 good friend Nacho가 직접 이야기를 해 주니 이 '감사 리스트' 개념이 내 머릿속에 깊이 저장되었었나 봐. 그래서 오늘 아침 평소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 김에 누워서 생각을 해봤지. 내가 감사한 것이 무엇이 있는지. 근데 너무 놀랍게도 감사할 거리가 너무 많은 거야! 난 요즈음 나 스스로가 너무 불행하고 모든 안 좋은 상황에 처해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1. 내가 그렇게 하고 싶었던 해외 근무를 하고 있는 점
2. 코로나 pandemic 상황에서도 사지 멀쩡하고 아픈 곳 없이 건강하고, 내 가족들 또한 건강하다는 점
(예전에는 '건강해서 감사하다'는 말은 의미 없이 입에 발린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 깨닫고 있지. 그 참 의미를.)
3. 코로나 사태로 직장을 잃거나 월급이 삭감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유럽에서 직장과 월급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
4. 회사가 보조해 주기 때문에 큰 월세 걱정 없이 집을 afford 할 수 있다는 점
이렇게 몇 가지만 생각했는데도 글쎄, 하루를 시작하는 나의 마음이 너무나 즐겁고 가벼운 거야! 정말 신기했어. 그리고 나선 평소보다 좀 더 여유 있게 업무 시작 준비를 했지. 사실 재택근무 시작한 이후로 항상 침대에서 뭉그적 거리다가 정말 last minute에 겨우겨우 일어나 노트북 앞으로 가서 무거운 머리로 일을 시작했었거든. 근데 오늘은 여유 있게 집 환기도 하고, 햇빛도 좀 쐬고, morning tea도 준비하며 업무 시작 준비를 하니까 너무나 여유 있고 상쾌한 거 있지!
그렇게 오전 업무를 끝내고 나서 점심시간에는 skype로 심리 상담을 받았어.
사실 지난주에 한국에 가겠다고 인사팀에 강력히 요구하면서 '나 지금 정신적 이슈를 겪을 정도로 더 이상 이곳에 혼자 갇혀 있기 어려운 상황이다'라고 엄살 조금 보탠 주장을 했거든.
그랬더니 그들이 나를 회사 GP (General Praticioner)와 연결해 주었고 상담 이후에 GP가 나를 Psychologist와 연결해 주었어.
한국에 있을 때에도 '회사가 지원해주는 심리 상담 서비스를 언젠간 꼭 받아봐야지'라고 생각만 하고 실행하지 못했었는데 뭐 겸사겸사 잘됐다, 이번에 한번 받아보자 하고 오늘 세션을 잡았지. 근데 너무 잘 한 결정이었어! 상담 후에 많은 생각들이 안정되었고 내 관점의 shift가 꽤나 쉽게 이루어졌어. (아무리 생각해도 참 신기해. 첫 상담이라 빨이 좋은 걸까?)
오늘 세션에서 기억할 메인 포인트
Obeserve myself, accept the situation, trust the process, stop avoiding, remember it's a learning process.
앞으로 정기적으로 상담받을 테니 또 알려줄게. 무튼 상담 이후에 생각보다 쉽고 빠르게 내 마인드가 바뀌어서 놀랍고 신기했어.
보다 즐거운 마음으로 오후 업무를 하고, 뉴욕에 갇혀있는 언니랑 virtual 운동도 하고, 그리고 나선 억지로라도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어. 앞으로 매일매일 나가려고. 정부가 허락한 하루 1시간, 정처 없이 목적 없이 거닐면서 파리의 멋진 건물도 찬찬히 구경하고 그동안 못했던 동네 구석구석도 돌아다니고 햇빛도 즐기고, 지나가는 강아지들과 인사도 하면서. 요즘 파리 날씨는 정말 러블리하거든. 25도까지 올라가는 따뜻함, 파란 하늘, 솔솔 부는 바람까지.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을 희한하고도 이상한 경험이지만
아랑곳 없이 아름다운 파리를 기억하고, 선물 같은 이 날씨를 기억하고, 좌충우돌 성장해 나가는 나를 관찰하면서 행복하게 지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