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본 외국인 국적 알아맞추기
우리 같은 동양인들이 보기엔 미국이나 유럽에서 온 백인들을 러시아 현지인들과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외형상으로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이더라도 입을 열면 러시아어 발음에서 티가 나기 마련인데, 미국이나 유럽에서 온 사람들은 된소리를 잘 내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뻬르브이(первый, '첫번째'라는 뜻)를 '페르브이'라고 하거나 뜨레찌(третий, 세 번째)를 ’트레티’라고 발음한다면 높은 확률로 영어권이거나 영어로 된 교재로 러시아어를 처음 접했을 가능성이 높다. 영어 알파벳 ‘п’와 'т'를 영어 알파벳 ’p’와 ’t’로 그대로 등차시켜 발음하는 습관 때문에 ’나 외국인이요’ 라는 표시를 내게 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습관은 러시아에서 특히 미터기가 없는 택시를 타거나 뭔가를 흥정해야 할 때 매우 불리하다.) 좀 신경을 쓰게 되면 이런 단어들을 발음하기 전에 약간 뜸을 들이는(пауза) 모습을 볼 수 있다.
여담으로 중국인 공무원 아저씨와 같이 러시아어 수업을 들었던 적이 있다. 이 분은 그 당시 내 수준에서는 상당히 고급단어인 '고양이 수염'(кошачьи усы)도 구사할 수 있는 분이었는데, 반 배정시험을 통과한 것을 봐서 독해와 쓰기는 문제가 없었는데 도무지 러시아 네이티브인 선생님의 말을 이해하고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이 안 되는 것이었다. 그 원인은 그때까지 중국에서 러시아어가 모국어가 아닌 중국인 선생님에게 러시아어를 배웠기 때문인 게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분은 그 뒤로 다른 반으로 가셨는지 다시 뵐 수가 없었는데, 사실 회화와 읽기·쓰기 능력에 괴리가 크면 수준에 맞는 수업을 찾는데 어려움이 많다. 비디오나 오디오 교재로 원어민의 발음을 많이 접했다면 발음이나 듣기 부분은 만회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중국인 유학생들 중에 습관적으로 ‘모즈너’(можно, 가능하다)를 '모어너'로, '사바끼'(собаки, 개들)를 '사빠기'(сапоги, 장화들)과 비슷하게 발음하는 경우를 꽤 보았다. 중국에도'ㅈ'나 'ㅂ' 발음이 있는데 왜 그럴까? 아마 중국어를 잘 모르는 내가 모르는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반대로 러시아인들의 외국어 발음에 대해 생각해보자. 한국어와 달리 러시아어에 없는 발음들이 몇 가지 있는데, 예를 들어 ‘ㅓ’나 받침으로서의‘ㅇ’이 그렇다. ‘ㅜ’나 ‘ㄴㄱ’으로 간신히 대체하는데, 이 모든 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단어가 한국의 대기업 ‘삼성’이다. 러시아어로는 ‘삼숭그’(САМСУНГ)라고 쓰고 읽는다. 또한 러시아어가 모국어인 사람이 영어로 ‘Her’를 읽을 때면 입이 조금 더 벌어지고 'r'을 굴리는 소리가 적어 티가 난다. 그리고 알파벳 ‘s’를 러시아 사람들은 우리말의 ‘ㅅ’보다는 된소리 ‘ㅆ’에 가깝게 읽는 경향이 있는데, 핀란드어의 ‘너’에 해당하는 ‘sinä’(시나)와 그 변화형들을 발음할때 러시아인들은 ‘씨냐’에 가깝게 발음한다. 핀란드어 알파벳 ‘ä’는 ‘ㅏ’에서 입을 좀 더 열고 느끼하게 발음하면 되는데 러시아인들은 러시아 알파벳 ‘я'에 등치해서 'ㅑ'로 발음하는경향이 있다.
위에 기술한 내용들은 다년간 러시아어를 배우는 외국인들과 외국어를 하는 러시아인들을 접한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실제로는 그런 발음의 한계를 극복한 경우도 많이 있으리라고 본다. 그리고 그런 부분을 연구하는 것은 언어학자나 교육자들의 몫일 것이다. 외국어를 학습할 때 발음이나 악센트는 중요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모국어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다.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한 수준이라면 발음에 집착하기 보다는 내실(어휘와 문법)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