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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서로 도스토예프스키를 읽고 싶다고?

외국 여자의 외로운 독서

by Victoria

앞에 코스모폴리탄 이야기를 길게 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러시아어 공부를 하기 위해 잡지만 읽은 것은 아니다. 학부 때 노어노문학 부전공자인 만큼 러시아에 가게 되면 보리스 파스테르낙의 '닥터 지바고', 미하일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 등 러시아 고전 작품들을 원어로 읽어 보겠다는 야심에 불탔었는데, 한마디로 그건 무모한 짓이었다.


우리나라도 고전소설을 원어로 읽으면 이해가 안 가는 단어가 많지만,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너무나 풍부한 러시아의 형용사와 기타 어휘 때문에 블라디보스톡에 있을 때 처음 도전했던 체홉의 단편선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Дама с собачкой)을 읽는 것은 첫 페이지부터 독서가 아니라 사전을 찾는 고행이었다. 심지어 사전에도 안 나오는 단어도 있어서 당시 랭귀지 익스체인지 파트너였던 러시아 친구 까쨔를 많이 괴롭혔던 것 같다. 고백하건대 그 책은 아직도 다 못 읽었고 첫 페이지에만 줄이 잔뜩 그어진 채 아마 한국에 있는 친정집 책장에서 외로이 누군가 읽어줄 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책들은 한국어로 전집이 있어 아예 사지도 않았는데, 삽화도 있고 소장 가치를 지닌 양장본이라면 모를까, 러시아판을 사고 싶은 마음은 아직 들지 않는다.


내가 러시아 원서로 작품을 읽고 좋아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작가는 세르게이 도블라토프(Сергей Довлатов)다. 그의 부모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으로, 어머니는 전직 연극배우, 아버지는 극장 감독이었지만 전쟁 때문에 부모가 피난을 가는 바람에 도블라토프는 1941년 러시아 도시 우파에서 태어났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국립대학교(СПБГУ)의 전신인 레닌그라드국립대학교(ЛГУ)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했고, 생계를 위해 기자와 작가의 개인비서를 하면서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는 에스토니아 특파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 도시 프스코프에서도 120km 떨어진 미하일롭스꼬에(Михайловское)에 있는 생태박물관에서 관광가이드로 활동했고, 여기서 영감을 얻은 ‘Заповедник’이라는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그의 첫 소설집은 소련 비밀경찰(KGB)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서방에 그의 작품들이 소개되면서 소연방 기자연합에서 제명되고 만다. 결국 그는 소련 당국의 감시를 피해 1978년에 비엔나를 거쳐 뉴욕으로 망명하게 된다.


내가 제일 먼저 접했던 그의 작품은 1986년 작 ‘외국 여자’(Иностранка)인데, 우리나라에서도 2012년에 번역 출간된 바 있다. 정치적 신념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쩌다 보니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된 러시아 싱글맘 마루샤 따따로비치와 남미 출신의 이민자 라파엘이 뉴욕의 러시안 타운에서 지지고 볶다 결혼에 골인하는 이야기다. 오늘날 뉴욕의 '러시안 타운'이라고 하는 지역은 브라이턴 비치 주변이지만, 이 이야기의 배경은 퀸즈 대로와 미도우 호수 사이에 있는 108번가 근처다. 러시아 여행사, 변호사, 작가, 의사, 부동산, 갱스터, 광인, 매춘부, 맹인 음악가까지 없는 게 없는 미국에 있는 '러시아 식민지'(русская колония)에서의 일상을 도블라토프는 주인공 마루샤의 남사친인 '나'의 시선을 통해 담담하고 위트 있게 그리고 있다. 비교적 현대작가이기 때문인지 그의 작품은 평이한 단어로 기술되었고 사전에 없는 단어도 거의 안 나오는데, 미국으로 이민 오기 전까지 부족함 없이 자란 마루샤의 어린 시절을 그린 2장 '좋은 가정에서 자란 아가씨'(девушка из хорошей семьи)의 경우 그 부분만 편집하여 러시아어 읽기 교재로 서점에서 파는 것을 보기도 했다. 나는 '미국에 있는 외로운 러시아 여인들에게 사랑과 슬픔, 희망을 담아' 썼다는 이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아 뉴욕에 갔을 때 공연히 러시아어 간판이 즐비한 브라이턴 비치 주변을 서성거리기도 했다. 참고로 2016년에는 그가 1944년에서 1975년까지 살았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루빈슈테인 거리 23번지에 도블라토프의 동상이 세워지기도 했다. 꼭 문학작품일 필요는 없지만, 흥미가 있는 분야의 책이나 잡지를 읽으면서 독해나 어휘력을 많이 늘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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