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자신 있으신가요?
이렇게 말하면 좀 재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원래 언어 쪽에 좀 감각이 있었다. 한글도 스스로 깨쳤고, 어릴 때 뉴스를 많이 봐서인지 '내정간섭'이라던가 '탈취' 라던가 어린이가 안 쓸만한 단어도 종종 쓰곤 했다. 영미권으론 어학연수를 간 적도 없지만 중학교 때 영어듣기 대회에 학교대표로 나가기도 하고 대학교 땐 프리랜서나 인하우스로 영어번역 아르바이트도 좀 했었다. 육아휴직 중 틈틈이 공부해서 핀란드어 중급 시험(YKI test)도 통과한 바 있다. 통역대학원 출신에는 훨씬 못 미치겠지만, 비전공자가 러시아어를 한다는 장점을 내세워 꽤 경쟁률 높던 직장도 들어가고 몇 년간 밥벌이를 했으니 어떻게 그 어렵다는 러시아어를 공부했는지 궁금하신 분들도 있을 것 같아 좀 자세한 이야기를 적어볼까 한다.
나는 극동국립대에서 교환학생으로 생활한 지 4개월이 되었을 무렵에 외국인 대상 러시아어 공인인증시험인 토르플(TORFL, Test Of Russian as a Foreign Language) 1단계 시험을 치뤘다. 보통 제일 잘 하는 게 1급인 일본어 JLPT와는 달리 러시아어 토르플 시험은 중국어 HSK 시험처럼1단계부터 시작해서 단계가 올라갈수록 난이도가 높고, 어문학 석사 졸업 시에 필요하다는 4단계는 거의 원어민 수준이다. 시험에는 총 5개 과목이 있는데, 어휘와 문법(Лексика/грамматика), 독해(Чтение), 듣기(Аудирование), 작문(Письмо), 말하기(Говорение) 등이다.
토르플 1급은 보통 거의 백지상태에서 시작해서 1년 정도 어학연수를 한 학생들이 치는 시험이고, 이 시험에 합격하면 러시아 대학교 학부 입학 전에 1년 정도 거치게 되는 어학연수과정(빠드팍,подфак)을 생략할 수 있다. 한국에서 러시아어를 이미 좀 배우고 왔다면 반년에서 1년 후에는 토르플 2단계를 목표로 하면 좋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대학원 졸업 한참 후에 2010년 경에 한국에서 다시 구직할 일이 생겨 3단계 시험을 쳤는데, 러시아에서 어문학을 전공한다면 학사 졸업 시에 필요한 시험이라고 한다.
쉽게 말하자면 토르플 1단계 말하기에서 극장 가려면 버스를 어디서 타야 되냐 정도를 묻는다면 3단계에서는 비디오 클립이나 뉴스를 보고 자기 의견을 이야기하는 정도의 난이도다. 간혹 토르플 시험을 토익 900점 이상 정도의 난이도로 생각하셨는지 입사 시에 토르플 4단계를 요구하는 회사들도 있는데, 업무가 별도의 원어민 감수 없이 지속적으로 작문이나 전문적인 회의 통역을 요하는 수준이 아니라면 조금 과한 요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한국에도 토르플 센터가 생겨 편리하게 시험을 치를 수 있지만, 러시아에서 연수를 한다면 가급적이면 본인이 러시아어를 배우던 곳에서 시험을 치를 것을 권하고 싶다. 바로 '말하기' 때문인데, 아무래도 아는 사람 앞에서 말하면 편안한 느낌이 든다. '말하기'는 시험관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아무래도 시험관은 말을 하도록 이끄는 역할이 크지만) 진행되는데, 내 생각에 말하기 시험에서는 시험관의 반응이 수험생의 역량 발휘에 꽤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나의 경우 3급 말하기 시험을 두 번 봤는데, 첫번째 시험을 봤을 땐 원어민 시험관 선생님이 내가 뭔가 실수를 할 때마다 교정을 해 주시는 바람에 마음이 위축되어서 입이 잘 안 떨어졌던 것 같다. 두번째 시험에서는 주제도 좀 친숙했었고 시험관 선생님이 호응을 해 주셔서 자신감 있게 이야기한 것이 합격의 비결이 아니었나 싶다. 뭐니뭐니 해도 궁극적인 토르플 시험 비법은 시중에 나와 있는 기출문제를 많이 풀어보는 것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