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말리는 중국인 룸메이트들
블라디보스톡 극동국립대 교환학생 시절을 떠올려보면 부끄러움이 앞선다. 아마 해외로 어학연수를 떠난 여자유학생들에게 드물지 않은 일이겠지만, 엄청나게 살이 쪘었기 때문이다. 혹자는 ’러시아가 음기가 강해서 남자 유학생들은 살이 빠지고 여자 유학생들은 살이 찐다’고 하는데,믿거나 말거나.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찔 사람은 찌고 빠질 사람은 빠진다. 그럼 십여년 전 그때로 돌아가 보자.
전기밥솥을 겨우 우겨넣은 짐가방을 들고 인천으로부터 2시간 남짓 비행해 블라디보스톡 공항에 도착한 나는 패닉에 빠져 있었다. 원래는 학교에서 누가 데리러 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담당자와 메일을 주고 받던 중에 문제가 생겼는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 지갑에 루블도 없이 달러만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간신히 한국말을 할 것 같은(그러나 현지화가 많이 된 듯한) 남자분 한 분을 찾아 모기만한 목소리로 나 교환학생인데 아무도 안 나왔다, 여기로 전화 좀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담당자가 곧 전화를 받았다. 지금생각하면 생명의 은인 같은 그 분 덕분에 2003년 8월의 어느날 나는 국제미아가 되지 않고 곧 나타난 학교 담당자를 따라 학교 기숙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당시 극동국립대학교 외국인 기숙사는 2, 3층엔 2인실이, 6층에는 6인실이 있었다. 나는 2층의 어느 중국여학생과 같이 방을 쓰도록 배정받았다. (편의상 그녀를 C라고 부르자) C는 하얼빈에서 기차를 타고 왔다고 했다. '동방을 지배하자'라는 뜻을 가진 블라디보스톡은 러시아의 동쪽에 위치한 도시로, 수도인 모스크바보다 중국과 일본 등 아시아 국가들에 지리적으로 더 가깝다 보니 아무래도 다른 도시들보다는 아시아인들에게 친절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길에서 파는 ’삐양세’(Пиянсе)라는 이름의 다진 고기, 양배추, 양파 등을 넣은 찐빵에 매운 태국식 칠리소스를 뿌려 먹는게 러시아어 공부에 지친 나에겐 삶의 낙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때 내가 찐 살의 상당 부분의 지분을 차지하고 있을지도... 나머지 지분은 내가 한국에서 가져간 코펠 냄비에 매일 끓여먹던 꿀과 간장에 재운 돼지고기에서 왔을 거라는 생각이든다. (살찌지 말라고 설탕 대신 꿀에 재웠는데 많이 먹고 안 움직이는 데는 장사가 없었던듯...) 어쨌거나 블라디보스톡에는 어린이집에서도 중국어를 가르치는 것이 인기일 정도로 아시아인들이 경제에 차지하는 비중이상당히 컸다. 가깝기 때문인지 중국에서 유학 온 학생들도 많이 볼 수 있었다.
C에겐 연하인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다른 학생들과 부대껴야 되는 6인실이 아니라 2인실인 여자친구의 방에서 머무는 것을 즐겼다. 그땐 방 안에 조리시설이 있었는데 정말 매일 점심 혹은 저녁을 우리 방에서 먹었다. 그는 자상한 중국남자 답게 요리를 잘했고,늘상 얻어먹기 미안했던 내가 닭발을 벗긴 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는 매우 말랐었는데 몸집이 큰 러시아 선생님들은 그녀를 부러움 반, 신기함 반으로 바라보곤 했다.
그런데 문제는 C의 남자친구가 우리 방에 거의 살다시피 하는데다, C가 없을 때도 시도때도 없이 나타난다는 것에 있었다. 한번은 내가 방에 딸린 욕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C의 남자친구가 있어 그야말로 기함한 적이 있다. 견디다 못한 나는 사감 선생님께 방을 바꿔달라고 하였는데, 그 방에 오래 살던 C 대신 내가 다른 방으로가게 되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 내가 방을 옮겨야 한다니 좀 억울한 생각이 들었지만, 한 층을 올라가 새로 배정된 방 문을 열자 생각이 바뀌었다. 창문 밖으로 막 해가 저물고 있는 바다가 보였던 것이다. 나는 석양의 바다에 취해 옮기겠다고 OK를 하였다.
바다가 보이는 방으로 옮긴 나는 한동안 혼자 지냈지만, 곧 다른 중국인여학생과 다시 룸메이트가 되었다. 그녀는 17살의 조기유학생으로, 아직 어려서 남자친구를 데리고 오지는 않았지만 곧 6층에 있는 다른 언니들과매우 친해졌다. 그러던 어느날, 내가 과중한 학업으로 인해 곤히 낮잠에 빠졌다 소란스런 소리에 깨어 보니 룸메이트들과 그녀의 '지에지에'(중국어로 '언니')들이 한 무더기로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디선가 연기가 모락모락 나지 않는가! 주위를 둘러보니 내 전기밥솥의 뚜껑이 열려 있지 않겠는가!
알고 보니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내 밥솥을 꺼내 만두를 끓이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밥솥이 그런 용도로 사용하는 것도 아니거니와, 사람이 상식을 벗어난 뭔가를 접하게 되면 화를 내는 것도 잊어버리게 된다. 게다가 상대는 아직 아기 같기만 한 청소년이라, 그냥 밥솥을 이렇게 쓰지 말라고 한마디만 하고는 다시 잤던 것(혹은 자는 체를 했던 것) 같다. 그 후로는 그녀가 중국인 룸메이트를 만나 다른 방으로 이사를 갔던 것 같기도 하고, 내가 교환학생 후반기라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다닌다든지 해서 바빴던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십 년도 훨씬 지난 일을 같이 성토해 달라고 중국인 룸메이트들과의 일화를 꺼낸 것은 아니다. 중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나 다른 나라 룸메이트라도 생판 남과 같이 방을 쓰는 일이 어디 쉽겠는가. 독자분들도 어딜 가나, 혹은 한국에서 공부를 한다고 해도 중국인을 만나게 될 기회는 많을 것이다. 실제로 상트페테르부르크 공항에서 중국인 관광객들을 이끄는 러시아인 가이드들을 보면 모르는사람이 듣기에도 중국어를 정말 유창하게 구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끔은 그때 내가 중국어를 열심히 배웠다면, 적어도 배워 보려고 했다면 그녀들과 나의 관계가 어땠을까, 또 내 직업선택에는 어떤 다른 기회들이 열렸을까 하고 생각해 보게 된다.
* 교환학생 시절은 저의 흑역사 생성기라 옛날 싸이월드까지 뒤져 보아도 남아있는 사진이 없어 대학원 때 친구들과 만들어 먹은 훠궈 사진으로 대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