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귤 까먹은 이야기
내가 한 학기동안 극동국립대 교환학생으로 머무는 동안 블라디보스톡을 벗어나 본 경험은 손에 꼽을 만큼 적다. 속초에서도 배를 타고 갈 수 있던 나호드카(국내 언론에서는 ‘나홋카’라고 표기해서 일본에 있는 도시로 착각하는경우도 종종 있다)에서 고려인 문화축제가 열렸을 때 다른 학생들과 함께 자원봉사를 해본 것과 교환학생이 끝날 때쯤에 바이칼 호수와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다녀온 것이 다다.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이후에도 갈 기회가 많았건만, 극동 지역에 있으면서 블라디보스톡에서 기차로 하룻밤이면 닿는 하바롭스크나 대게로 유명하고 살아 숨쉬는 활화산이 있다는 캄차트카에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것이 이제 와서는 큰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그래도 잘 했다고 느끼는 것은 2004년 초에 교환학생으로 와 있던 다른 학교 학생들과 이르쿠츠크까지 기차를 타고 가서 바이칼 호수를 보고 돌아온 것이다. 사람들이 흔히 러시아에 대해 가지고 있는 환상 중 하나가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대한 로망이다. 며칠이고 기차를 타고 가면서 ‘진짜’ 러시아인들을 만나고 그들과 친구가 되며 창 밖으로는 끝없는 눈밭이 펼쳐지고 영화 닥터 지바고에 나오는 오마샤리프같은 멋있는 남정네가 발랄라이까(민속 기타)를 연주할 것만 같은… 그렇다면 나의 대학후배이자 예전 직장 선배이기도 한 모험소녀가 쓴 시베리아 횡단열차 경험담을 읽어보시라. 나는 십여년 전에 한 2박 3일 정도 기차를 탔던 것 같지만 그녀가 얼마나 큰 인내력과 러시아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는지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나중에 블라디보스톡-이르쿠츠크 기차를 탄지 10년도 더 지나서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3시간 40분에서 4시간이면 오가는 삽산 열차를 타보고 내가 느꼈던 심정은 상전벽해였는데, 마치 비행기를 타는 것 같은 쾌적한 느낌이었다.
러시아철도 웹사이트(www.rzd.ru)에서 기차표를 사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꽤나 번거롭다. 거주등록과 함께 그저 결제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비행기표를 살 때처럼 탑승객들의 이름과 국적, 여권 번호까지 하나하나 다 적게 되어 있다. 또한 그때는 전자상거래가 아직 활성화되기 전이라 직접 까싸(касса, 매표소)에 가서 표를 샀다. 다른 학교에서 온 여학생 둘, 남학생 하나와 같이 가기로 했으니 4인 1실인 꾸뻬(купе)를 타고 갈 수 있어 안심이 되었다. 2004년 1월의 어느 날, 우리는 지루한 2박 3일을 버틸 귤 한 박스를 들고 기차에 탔다.
꾸빼는 접이식 침대가 위아래 좌우에 달려 있어 낮에는 아래쪽 침대들을 의자로 쓰고 밤에는 침대를 내려 취침하는 구조다. 가운데엔 접이식 테이블이 있다. 이제 막 자리를 잡고 앉으려는데, 일행 중 한 여자아이가 폭탄선언을 했다.
”나랑 ㅇㅇ(남자아이)는 위에 있는 침대를 쓰고 싶어. 우리 사귀기로 했어.”
으, 막 시작된 연인들과 밀폐된 공간에서 며칠간을 여행할 때의 알 수 없는 뻘쭘함을 아시는지? 이제와 생각하니 어차피 누구 한 사람은 남자아이와 마주보는 침대를 써야 하니 차라리 둘이 커플이었던 것이 다행인 것도 같다. 위쪽 침대도 가운데가 떨어져 있으니 그들이 뭐 격하게 애정표현을 했다거나 하는 기억은 없지만, 왠지 두사람의 밀월여행의 들러리가 된 것 같은 기분은 들었다. 다행히 혼자가 아니라 다른 친구가 있어 다행이었다. 1층의 우리 두 사람은 2박 3일간 창밖으로 펼쳐지는 눈밭을 바라보며 말없이 열심히 귤을 까먹으며 각자의 상념에 잠겼다.
보통 러시아 기차 침대칸의 한쪽 끝에는 차장실과 온수 급탕기, 다른 쪽 끝에는 화장실이 있다. 뜨거운 물이 나오는 커다란 금속 디스펜서를 이용하면 차도 마시고 (냄새는 날 지언정) 컵라면도 끓여먹을 수 있을 텐데, 그 2박 3일 간에 뭘 먹고 살아남았는가 돌이켜 보면 귤 밖에 기억에 없다. 한 줄로 길게 침대칸 객실이 놓인 좁은 복도에는 수건과 치솔, 치약을 들고 아침마다 화장실로 향하는 줄이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기차에는 샤워실이 없으니 머리를 감기 어려워 화장실에서 페트병에 물을 받아 2박 3일 중 딱 하루 머리를 헹궜다. 그나마 추운 겨울이라 땀이 많이 나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기차는 중간중간 역에서 쉬어 가며 가는데, 내려서 기름 부침개 같은 주전부리를 사기도 하고 다음 열차를 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러시아 선생님 말로는 예전에 본인의 아버지가 간이역에서 내려 수영을 하려다가 기차를 놓칠 뻔한 적도 있었다니 믿거나 말거나. 이렇게 우리는 이틀 간 감지 못해 떡진 머리를 하고 '시베리아의 파리'라고 불리는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 사진은 2008년에 모스크바 역에서 찍은 기차의 식당칸. 여러 번 노트북과 거처를 바꾸다 보니 2003년 당시 사진을 찾기 어려워 가장 비슷한 분위기의 사진을 넣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