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예프스키가 그린 구원의 여인 소냐
내가 이르쿠츠크에 간다고 하니 미국 친구 L이 마침 거기에 자기가 아는 친구가 있으니 편지와 선물, 책을 한 권 전해달라고 하였다. L은 지금은 예일이었는지 하버드였는지 헷갈리는 어쨌거나 미국 명문대에서 온 친구였는데, 앞서 언급한 토르플 4단계를 준비하고 있었다. L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그녀의 친구도 선교사인 듯 했는데, 짧게 자른 검은 머리카락에 선글라스를 낀 중년의 그녀는 만면에 웃음을 띄고 눈길을 운전해 떡진 머리의 우리를 데리고 숙소로 안내해 주었다. 다음날에는 간신히 머리를 감고 이르쿠츠크에서 차를 타고 1시간 정도 걸리는 리스트비앙카(Листвянка)로 바이칼 호수를 보러 갔다. 길의 좌우로는 자작나무들이 하얀 눈에 덮여 있는 풍경이 끝도 없이 이어졌고, 옛날 동화 속에 나오는 백두산 호랑이가 금방이라도 나타날 것만 같았다.
드디어 도착한 생태계의 보고, 1월의 바이칼 호수에선 물을 끓이는 것처럼 수증기가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었다. 바이칼 호수에서 손을 씻으면 5년, 세수를 하면 10년, 목욕을 하면 30년 더 수명이 늘어난다는 말이 있지만 한겨울에 목욕이라니 언감생심이었다. 패딩을 입고도 오들오들 떨던 우리는 너무나 추웠기 때문에 간신히 손을 담그는 것에 만족했다. 그리고는 식당에 가서 ’오물’(омуль)이라는 연어와 비슷한 훈제생선을 먹었다. 겉모습은 볼품 없었지만 짭조름하게 절여진 맛이 좋아 나중에 블라디보스톡으로 오기 전에 진공포장된 생선을 하나 더 사서 한동안 반찬으로 먹기도 했다.
그 다음날엔 이르쿠츠크 현지의 한 여대생이 우리를 안내해 주었다. 이르쿠츠크는 ’시베리아의 파리’로 불리기도 한다는데, 예전에 혁명을 일으키려다 체포된 귀족 청년장교 데카브리스트(декабрист)들이 많이 유배를 왔다고 한다. 그들의 아내는 재혼하거나 남편과 함께 시베리아로 가서 강제노역을 하는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는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 직선거리만 해도 4,400 km, 차도를 네비게이션으로 찍으면 6,200 km가 넘는다. 이 길을 젊은 귀족부인들이 걸어서 갔다고 생각해보라. 또한 시베리아 행을 결정하는 순간 재산과 신분도 잃어야 했다니 아이와 자신의 가문을 생각한다면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다. 아마도 남편을 굉장히 사랑하지 않고서는 정말 힘들었을 것 같다.
아무튼 시베리아로 간 데카브리스트들은 그들이 접한 유럽의 선진문화를 그곳에 전파했고 나름의 행복을 찾았다. 또한 소비에트 시대에도 시베리아 거주민들의 척박한 생활환경을 고려하여 다른 지역보다 연간휴가일수도 많이 주고, 햇빛이 내리쬐는 지역으로 무료로 휴양을 갈 기회를 주기도 했단다.
조금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창녀인 소냐도 살인죄를 저지른 라스콜리니코프를 따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시베리아까지 간다. 그런 걸 보면 러시아를 찾는 서양 남자들이 괜히 소냐를 이상형으로 꼽고 '죄와 벌'을 가장 좋아하는 책이라고 하는 게 아니다.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해도 용서해 주고 거의 지옥 같은 시베리아까지 따라오는 여자라니!
실은 도스토예프스키도 시베리아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니콜라이 1세에게 정치범으로 지목되어 1849년 총살당하기 직전에 기적적으로 풀려나 시베리아에서 4년은 감옥살이, 4년은 졸병으로 군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불과 25세의 나이에 '가난한 사람들'(Бедные люди)로 화려하게 문단에 데뷔했던 작가가 시베리아에서 영겁과 같이 느껴지는 유형생활을 하면서 그린 것은 그런 조건없이 자신을 사랑해주는 여인이었는지도 모른다.
L의 친구들로부터 넘치는 호의를 받은 우리는 짧은 이르쿠츠크 구경을 마치고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가야 했다. 다만, 이번엔 비행기를 탔다. 오는 길에 3일간 기차를 또 탄다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지금은 러시아항공으로 합병된 블라디보스톡 항공의 이르쿠츠크-블라디보스톡 편도항공권을 사두었던 것이었다.
*표지사진은 '트립풀 블라디보스톡'과 '이지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저자인 모험소녀 님이 제공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