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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원 생활(2)

충격과 공포의 러시아어 노트 필기

by Victoria

러시아 대학교들도 지금은 멀티미디어 자료를 많이 이용하겠지만, 10년 전만 해도 프로젝터로 파워포인트를 보여주는 수업도 드물었다. 아니, 학생들이 발표를 할 땐 파워포인터를 썼지만 교수님들은 대개 책이나 종이 몇 장만 들고 수업에 참가하셨다. 교수님이 칠판에 몇 글자 쓰는 일도 없이 쉴새 없이 강의를 하시면 학생들은 열심히 받아적는다. 수업은 강의(Лекция)와 연습문제 풀이, 활발한 상호작용이 필요한 세미나(Семинар) 등으로 구분되어 진행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강의실에 들어서자 마자 숨도 한번 안 쉬고 눈도 깜박 안하고 숫자를 읊어 나를 기함하게 만든 선생님도 있었다. 교재라는 것이 있더라도 우리나라 경영대학교에서 흔히 쓰는 고급스런 종이에 컬러풀한 영어 원서들은 아니고,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도 힘든 갱지에 글자만 빽빽하니 쓰여서 가끔 도표가 들어간, 참 들여다보기 싫게 생긴 책들이다.


같은 내용이라도 러시아어로 쓰면 길이가 배가 된다. 전공이 국제경제학이다 보니 공부할 때 러시아어 및 영어로 된 계약서나 국제법 같은 것들도 종종 접했는데, 같은 내용의 우리나라 계약서가 1장이라면 영어는 1.5장, 러시아어는 2장 정도의 분량이 된다고 생각하면 된다. 개인적으로는 러시아에서 외국영화를 개봉할 때 자막이 아니라 더빙을 많이 하는 이유 중 하나도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대사를 자막으로 써 버리면 화면에서 지나치게 많은 공간을 차지해 버리는 데다 짧은 시간에 화면에 빽빽한 끼릴문자(러시아어 알파벳)를 읽어내기도 쉽지 않다. 그렇다면 러시아 학생들은 과연 어떻게 노트필기를 하는가?


그 의문은 러시아 학생 아냐의 노트를 빌려 복사하면서 드러났다. 내용 자체도 어려운데 한 달이나 늦게 공부를 시작했으니 과제니 시험이니 대비하기가 영 여의치 않았다. 같이 수업 듣는 학생들을 살펴보다가 한 일주일이 지난 후에 출석률이 양호하고 공부를 잘하게 생긴 여학생 하나를 찍었다. 그리고 얼굴에 철판을 깔고 미안하지만 노트 좀 빌려달라고 했다. 그것도 전과목을.


지금도 참 고마운 것이 뒤늦게 나타나 고군분투하는 내가 안돼 보였는지 엘사처럼 얼음공주 같은 인상의 아냐는 목숨과 같은 노트를 빌려주었다. 그것도 여러 번. 나는 쉬는 시간마다 학생회 복사실로 가서 서둘러 복사를 하고 아냐에게 노트를 돌려주었다. 러시아 학생들은 모눈종이 같은 파란 눈금이 그인 A5보다 작은 크기의 노트를 사서 강의 내용을 열심히 적는다. 필기체를 접한 것이 거의 처음인데다 약자도 많아서 처음에는 이게 무슨 뜻이냐고 몇 번이나 물어보았다. 그제서야 сущ-во(существо, 존재),пр-во(производство, 생산) 같은 약자들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도 약자를 써서 필기에 드는 노력과 시간을 대폭 줄일 수 있었다.


그래도 'номенклатура'(목록)이라는 아리까리한 단어를 잘못 이해해서 엉뚱한 숙제를 한다거나 러시아어 작문이 어려워 낑낑대며 새벽 두세시까지 레포트를 쓰는 일은 흔했다. 국내 학부에서 경영학을 배울 때는 영어 원서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숙제가 있었는데 대학원 때는 러시아어로 된 경영 관련 교재를 영어로 번역하는 숙제가 있었다는 점이 특이했던 점이긴 하다.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나도 영어를 러시아어보다 적어도 10년은 먼저 배웠으니 영어에서 러시아어로 번역하는 것보단 러시아어에서 영어로 번역하는 게 훨씬 편하긴 했다.

내가 다닌 학교는 러시아에서도 비교적 잘 사는 집 학생들이 오는 학교라고 했다. 유학생들 중에도 부모님이 고위 공무원이라거나, 은행 지점장이라거나 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블라디보스톡에 있을 때 만난 현지 학생들과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블라디보스톡 국립대학교에는 한국어학부도 있고, 한국이 가깝기도 하니 한국어 전공하는 학생들과 언어교환을 하기도 하고 굉장히 가깝게 느꼈던 반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만난 현지 학생들은 일본문화를 좋아하는 몇몇의 학생들을 제외하곤 동양인들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아, 러시아판 페이스북에 해당하는 vk를 통해 나한테 관심을 보여온 동양여자에 대한 환상이 있는 듯한 중년남성은 있었다.) 기숙사에 있던 독일, 핀란드 학생들은 지리적으로도 근접하니 유학이나 여행 갔을 때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 때문인지 그들의 러시아어 실력과 무관하게 어딜 가나 큰 관심을 받았고, 상대적으로 큰 관심을 받지 못한 경험들이 솔직히 말하자면 자존감에 상처를 주기도 했다.


다행히 해외로 교환학생을 다녀온 경험이 있는 몇몇 러시아 친구들은 본인이 해외생활에서 겪은 어려움이 떠올랐기 때문인지 조별 과제에 짝이 된다거나 하는 식으로 나를 많이 도와주었고, 이후 그냥 보기엔 죄다 러시아인 같던 아이들도 알고 보니 CIS 국가나 발트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서 왔다거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되어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몇몇 교수님들도 외국 학생이라고 많이 관심을 가지고 배려를 해주셨다는 생각이 든다.


그간 현대자동차 및 그 계열사들의 생산공장 및 롯데호텔 등 국내기업들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진출도 많이 확대되었고, 올해부터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에도 한국어학과가 개설되기도 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유럽문화권 최초로 1897년부터 한국어 수업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아마도 한국을 바라보는 러시아인들의 시선도 많이 달라지고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러시아에 우리나라가 더 많이 알려져서 우리 젊은이들이 현지에서 더 환영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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