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홍차 한 잔의 여유와 제3세계(1)

나의 첫 외국인 남사친

by Victoria

러시아의 대문호 체홉의 희곡 '바냐 아저씨'(Дядя Ваня)를 보면 주인공인 바냐를 비롯해서 그의 매형인 은퇴한 교수 세레브랴코프도, 조카인 소냐도, 유모인 마리나도 시종일관 차를 마신다. 지금은 육아 때문에 반쯤 나간 혼을 다시 찾아 오느라 커피를 자주 마시지만, 20대의 나는 물은 자주 마셔도 누군가와 밖에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초대를 받아 가는 경우가 아니고선 차나 커피를 즐겨 마시는 타입은 아니었다. 하지만 석사과정을 하는 동안엔 차를 정말 자주 마셨다. 그리고 러시아 사람들이 왜 홍차를 마시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상처입은 마음을 달래고 기운을 주는 물약 같은 거다. 이번에는 그시절에 나와 차를 같이 마시고 밥을 같이 먹던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몇달 용돈을 아껴 디지털 카메라를 샀다. 마침 그날은 영하 20도의 추위가 예고되어 있었지만, 독일 친구들과 함께 학교 주변 모이까 운하 주위를 걷기로 했다. 그런데, 한참 걷다가 기숙사에 들어와 보니 오늘 새로 산 카메라가 없었다. 헐렁한 코트 주머니에서 굴러 떨어졌거나, 더 그럴듯한 가정은 웃고 떠드는 사이 누군가 소매치기를 해 간 것이다. 당장 달려나가 추운 날씨에 눈밭을 몇 번이나 뒤졌지만 카메라는 보이지 않았다. 전단지도 만들어 붙였지만 연락이 올 리 만무했다. 나는 절망에 빠져 있었다.

바로 이 때 같은 기숙사에 있던 중국인 여교수님이 차를 마시자고 했다. 동그란 안경을 쓴 중년의 교수님은 차를 마시며 내게 있었던 일을 들으시고는 본인의 경험담을 이야기해 주셨다. 예전에 코트 안주머니에 분명히 넣어두었는데 꽤 큰 금액의 돈뭉치를 도둑맞으신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불행을 당했을 때 예전에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는 다른 사람의 말은 큰 위로가 된다. 세상에 유일하게 나만 겪은 일이 아니라는 안도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된다는 위로. 단순한 도난 사고로 인해 겪은 감상 치고는 과장되어 있는지 모르지만, 당시로서의 내 기분은 그랬다.


자진해서 마시는 차가 아니다 보니, 내가 차를 마시던 공간은 대개 기숙사 한 층의 좌, 우에 하나씩 있던 작은 TV 앞 거실 내지는 공동부엌이었다. 당시 나와 종종 차를 마시던 친구로는 영미권에서 온 R과 CIS 국가 중 하나에서 온 K가 있었다. R은 키는 작았지만 꽤 다정다감하고 선한 인상의, 배우로 치자면 톰 크루즈 같은 타입의 교환학생이었는데 러시아 여학생들에게도 꽤 인기가 많았다. R과는 주로 영어로 이야기를 했었는데 교환학생 중엔 나이가 많은 편이라 왠지 내 이야기를 잘 이해해 주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주로 내가 학교생활의 어려움을 떠들고 그는 가만히 들어주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R의 부모님은 각각 미국과 영국 사람이었는데 우연히 Time 지를 들고 기차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고 한다. 호주에 자리잡은 두 사람은 아이들을 많이 낳았는데, 형제들을 세는 데 두 손이 다 필요한 걸로 봐선 꽤나 다복한 가정이었다. 하지만 여러 나라 국적을 보유한 여권(Passport) 부자인 R은 유럽에서 대학원에 다니고 자리를 잡느라 시간이 걸려서인지 꽤 오래 독신으로 지냈다. 그는 내가 여름방학 때 모스크바로 인턴을 하러 갔을 때 기차역까지 꽤 무거운 캐리어를 끌어 주기도 했고, 나중에 내가 한국으로 돌아간 후 해외 박사과정을 할까 하고 영문 SOP(Statement Of Purpose, 학업계획서)를 쓸 때 교정을 봐주기도 했다. 결혼 후에 아이와 함께 헬싱키에서 R을 만나 유모차를 끌며 놀이공원을 같이 산책한 적도 있는데, 요즘은 그의 취미인 에스페란토 어로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똑똑한 부인을 만나 잘 살고 있는 것 같아 기쁘다.


* 표지는 R과 함께 맥주를 마셨던 페테르부르크의 카페 삐에르(Пьер, Ул. Белинского, д.13). 2006년에 개봉한 'Piter FM'이라는 영화가 있는데, 남녀 주인공이 페테르부르크 곳곳을 누비며 계속 엇갈리다가 마지막에 만나는, 우리나라로 치면 한석규, 전도연이 나왔던 '접속'과 비슷한 느낌의 영화였다. 남자 주인공이 자전거를 타고 운하가 늘어선 페테르부르크의 좁은 거리를 지나는 모습도 기억에 남지만, 외벽으로 하염없이 물이 떨어져 안에서 바라보면 365일 비가 오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 카페도 인상적이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원 생활(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