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늑대 한 마리
내가 요즘 ‘어쩌다 러시아어를 배우게 되었나?’보다 자주 듣게 되는 질문은 ‘남편을 어떻게 만났는가’ 하는 것이다. 국제결혼한 우리나라 사람들을 종종 만나 이야기를 들어 보면 한국에서 학교나 길거리에서 만난 경우도 꽤 있고, 가끔 나처럼 서로 제3국에서 유학을 하다 만난 경우도 있다. 나도 어쩌다 보니 낯선 땅으로 시집와서 아이도 하나 낳고 살고 있지만, 국제연애나 국제결혼은 생각처럼 쉬운 게 아니다. 어쨌든, 이 챕터의 위치로 인해 알 수 있겠지만, 남편은 학교 기숙사에서 만났다.
때는 대학원 2학년 1학기 말. 당시 남편은 핀란드에서 한학기 교환학생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왔는데, 같은 기숙사에 있어도 사는 층도 다르고 어울리는 친구 무리도 달라서 별로 볼 일이 없었다. 딱 한번 학교수업을 마치고 혼자 기숙사로 들어오다가 역시 혼자 기숙사에서 나오던 남편을 마주쳤는데, 서로 안면을 튼 사이도 아니라 인사도 않고 뻘쭘하게 지나치면서 속으로 러시아 애니메이션 ‘НУ, ПОГОДИ!’(우리말로 치면 '두고보자' 정도?)에 나오는 Волк(늑대)를 닮았다고 생각한 게 기억난다. 'НУ, ПОГОДИ!'는 톰과 제리처럼 늑대와 토끼가 쫓고 쫓기는 이야기인데, 카키색 외투에 애니메이션 속 늑대의 줄무늬 티셔츠를 연상시키는 줄무늬 목도리, 조금 길쭉한 발, 회색의 캡모자까지 입에 파이프 하나만 물면 그 회색 늑대의 인간 버전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정도였다. 당시 핀란드 학생 중엔 전직 하키선수였다가 지금은 요가와 명상 선생님으로 전향한 카리나 러시아 혼혈로 단체 피겨스케이팅 선수였던 A가 기억에 남는다. 우리나라 대학교는 학생들 기숙사가 남자동, 여자동 따로 있는 경우가 많지만 내가 있던 기숙사는 방만 따로 쓸 뿐, 같은 층에 남자 방과 여자 방이 섞여 있었다. 자기 집도 아닌데 아침마다 사각팬티 바람으로 기숙사 공용부엌에서 토스트를 굽던 핀란드 남학생 때문에 당시엔 나름 문화쇼크를 겪은 기억도 있었던 것이다.
남편과 정식으로 인사를 나눈 때는 12월 초의 기숙사에 살던 다른 친구의 생일파티에서였다. 둘 다 그 친구와 아주 친한 것도 아니었고, 다만 나는 그날 인도계 은행 인턴면접을 보고 조금 상심해 있었다. 캠퍼스 리크루팅 나왔던 그 은행의 OMR 카드로 치뤄지는 지능검사 비슷한 필기시험을 무난히(사실, 다른 학생들의 절반 정도 되는 시간에 답안을 작성해서 합격을 예상하고 있었다.) 통과한 몇 안 되는 동급생들과 면접을 보러 갔는데, 그 기업으로서는 러시아 영주권이 없는 외국인을 노동비자까지 지원해 가며 굳이 인턴으로 뽑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면접 첫 질문이 러시아 체류자격 관련이라 안되겠구나 생각하고 룸메이트 J의 제안에 따라 꿀꿀한 기분을 좀 잊어 보고자 친구 생일파티에 갔는데 어쩌다 보니 남편과 춤을 추게 되었다. 우리 남편, 지금 보면 참 몸치지만 그때는 눈에 뭐가 씌였는지 그런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 남편은 내게 세 가지 질문을 했는데, 통성명을 하고 난 후 처음 두 가지 질문은 외국에서 흔히 듣게 되는 “Where are you from?”과 “How old are you?”였다. 흔히 외국 사람들은 나이 같은 것 크게 신경쓰지 않고 친구가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지만, 내가 러시아에서 만난 20대 외국학생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서로서로 나이 묻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다만 궁금한 경우에 한해서. 동성친구들끼리는 좀 친해지고 나서야 나이를 물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긴 지금 어린이집에 다니는 딸아이도 어디서 새로운 친구를 만나면 늘 먼저 묻는 게 이름과 나이이기도 하니까.
세 번째 질문은 좀 특이했다.
“Where is your husband?”
아, 이 남자는 동양인들은 죄다 20대 중후반쯤엔 결혼한다고 알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나처럼 매력적인(?) 여자가 그 나이가 되도록 미혼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걸까. 아무튼 “How do you think about Kim Jeong il?”보단 훨씬 창의적인 질문임에 틀림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