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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쉬킨과 독일인의 사랑(2)

큰맘 먹고 도전해야 하는 러시아 연극

by Victoria

전편에 등장한 김치를 좋아하는 독일인 프로도와 연극을 보러 간 적이 있다. 장소는 말르이 드라마 극장(Малый Драматический Театр петербург 혹은 Театр Европы), 작품은 도스토예프스키 원작의 ‘악령’(Бесы)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연극계를 대표하는 말르이 드라마 극장의 예술감독인 레프 도진은 ‘형제자매들’, ‘세자매’ 등의 작품을 가지고 우리나라의 LG아트센터에서 몇 차례 내한공연을 한 적도 있는데, 사실 그가 연출하는 작품들은 길기로 악명이 높다. 레프 도진 판 연극 ‘악령’은 총 3막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막이 2시간 40분, 2막과 3막이 각각 2시간씩인데다 막간의 쉬는 시간도 1시간씩이나 된다. 즉, 다 더하면 8시간 40분이 되겠다. 그래서 이 극장 단골들은 아예 작품을 두 번이나 세 번에 나눠 보기도 한단다. 한번에 그 긴 시간을 앉아있기도, 그 감상을 소화하기도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니 표값이 좀 나가더라도 천천히 음미하겠다는 발상이다.


프로도는 CIS 지역에 살다가 대여섯살 때쯤 독일로 갔다고 했다. 이를테면 러시아어를 쓰는 입장에선 ‘해외 교포’인 셈인데, 이런 교포들의 특징은 구사하는 어휘가 해당 국가를 떠날 때의 지적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의무교육이 끝나기 전에 조기유학이나 이민을 간 학생들도 얼핏 한국어 발음은 자연스러운데 받아쓰기를 하면 ‘궪찬아요’ 같은 영 이상한 조합이 나온다든지, 사자성어나 좀 어려운 단어는 잘 모른다든지 하는 일이 생기는 것처럼 말이다.

프로도도 러시아어 발음은 자연스러웠지만 아마 도스토예프스키를 원작으로 한 연극의 철학적인 독백과 대사들을 이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악령'은 평화로운 중소도시 출신의 스타브로긴이라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좀 날리던 옴므파탈 인텔리 젊은이가 고향으로 돌아와 마을의 약간 나사 빠진 청년들과 함께 5인조 비밀결사를 구성하고 범죄와 파멸의 길로 이끌게 된다는 이야기로, 등장인물도 미리 예습을 하고 온 게 아니라면 누가 누군지 구분이 잘 안갈 정도로 많은데다 서두부터 해리포터의 스네이프 선생 같은 음침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배우가 나와서 밑도 끝도 없이 독백을 읊었던 것이다.


연극은 이른 오후에 시작했는데 프로도는 시작 5분 만에 나가떨어져 비몽사몽 하고 있었다. 그꼴을 보다 못한 나는 첫번째 쉬는 시간에 진지하게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난 혼자 봐도 괜찮으니 피곤하면 그냥 기숙사로 돌아가는 게 어떨까?"

그렇지만 그는 표값이 아까웠는지,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는지 근성의 독일남 답게 3막까지 꿋꿋이 자리를 지켰다. 나중에 다른 친구를 통해 듣기론 기숙사 학생들과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을 단체관람하러 갔을 때도 줄창 수면을 즐겼다는데, 그는 공연만 보면 잠이 드는 체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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