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먹는 프로도와 분노의 칼리귤라
기숙사에서 알게 된 친구 중에 독일 남자애가 하나 있었다. (아담한 체격의 그는 '반지의 제왕'의 프로도를 닮았으므로, 앞으로 그를 프로도라고 부르기로 하자.) 그는 독일에서 온 교환학생들 중 상당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CIS지역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독일인이었다. 일명 ‘러시아계 독일인’이라고 불리는 그들의 선조들은 유럽의 과학문명을 동경한 표트르 대제 때부터 러시아에 들어와 살던 독일인들이 2차 세계대전 이후 스탈린에게 숙청되어 러시아를 떠났거나 소련의 붕괴 이후 CIS 국가들을 떠나면서 생겨났다고 한다. 나는 다른 러시아계 독일인 교환학생인 갈랴와도 친했는데, 그녀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시베리아 한복판의 작은 마을에 사시던 증조할머니쯤 되는 분을 만나러 갔다가 할머니가 펑펑 우시는 바람에 원래 일정보다 이틀이나 늦게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일도 있었다.
프로도는 전에도 한국인 친구를 사귄 적이 있다고 했는데, 그래서인지 김치를 아주 좋아했다. 나는 사실 김치를 그닥 좋아하지는 않지만, 외국인인 그가 김치를 먹고 싶다고 부탁을 하니 그 마음이 대견해 귀찮지만 당시 김치 주문배달을 하던 곳에서 최소 물량인 2kg를 주문해 줬다. (요즘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도 한국 식당이 많아져 가게에서도 소량씩 구입을 할 수 있다.) 기숙사 앞에서 007 작전을 뺨치는 아주머니와의 접선 끝에 김치를 획득한 프로도는 나와 반반씩 나눠 가진 김치에 매우 만족해 했다. 맵지도 않은지 플라스틱으로 된 직경이 20cm는 족히 될 커다란 이케아 샐러드 볼에 그 김치를 담더니, 밥은 커녕 아무 것도 곁들이지 않고 그자리에서 우적우적 한 덩어리의 의 김치를 먹어치우는 것이었다(!) 남은 김치는 일반 냉장고의 절반쯤 되는 크기의 방마다 놓인 미니냉장고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기숙사가 2인 1실이었다는 것이다. 프로도의 룸메이트는 틴토 브라스의 영화 ‘칼리굴라’에 나오는 말콤 맥도웰 같은 인상의 붉은 곱슬머리의 독일인이었다. (그러니 칼리굴라라고 부르기로 하자.) 칼리굴라는 같이 쓰는 냉장고에서 알 수 없는 냄새가 나자 매우 불만스러웠지만, 겉보기와는 달리 소심해서 룸메이트인 프로도에게 직접 불만을 토로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김치를 주문해 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칼리굴라는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서인지 술을 잔뜩 먹고는 나에게 떼를 썼다.
"우리 방 냉장고에 누가 쓰레기를 넣은 것 같아. 고약한 냄새가 나니 좀 치워줘."
우리의 자랑스러운 김치를 보고 쓰레기라니! 나는 국가 단위로 싸그리 모욕을 받은 것 같아 화가 났다. 물론 처음 맡는 사람에겐 김치 냄새가 좀 강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강에서 뺨 맞고 종로에서 화풀이한다더니, 내 방도 아니고 프로도가 김치를 먹고 싶다고 해서 도와준 것뿐인데 그런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들어야 하는 게 무척 못마땅했다. 하지만 취객을 상대로 열을 내는 것도 웃기는 일 같아 자리를 떴다. 나중에 칼리굴라는 다른 친구들에게 한 소리를 들었는지 술이 깬 후에 내게 사과를 하긴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