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어 이름, 친구들 이름
사실 나는 ’빅토리아’라는 이름과 인연이 많다. 내 영어 이름과 세례명도 빅토리아인데, 첫 직장인 해운회사에 다닐 때 영어 이름을 만들어야 한다고 해서 본명과 비슷한 발음이 나는 빅토리아를 골랐었다. 영국 여왕이나 데이비드 베컴의 부인과는 무관하지만. 어쨌거나 러시아에서도 종종 마주칠 수 있는 이름이기에 두번째 회사인 대기업 러시아 법인에서 현지채용으로 일했을 때도 그 이름을 썼고, 현지인 동료직원들한테 ’빅토리아’의 애칭인 ’비까’(Вика)로 불리곤 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세번째 회사에 입사하고 나서는 친한 동기들의 영향으로 천주교 세례를 받게 되었는데, 세례명은 당연히 빅토리아로 정했다. 그리고 러시아에 다시 주재원으로 나가서는 가장 친한 친구와 아이를 봐주는 아주머니의 딸로 또 빅토리아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간 결혼도 하고 사회적 지위도 약간 상승(?)한 덕에 직장에선 빅토리아가 아니라 '가스빠자 정'(Госпожа, 서양의 미세스와 같은 뜻)으로 불리긴 했지만. 빅토리아는 내게는 가까운 이들의 이름이자 공식적인 서류에 기록된 적은 없지만 내가 직접 정한 나의 두번째 이름이기도 하다.
앞서 이야기한 빅토리아는 예술적 재능이 많은 친구다. 키가 크고 늘씬해서 20대 초반에는 아마추어 모델로도 활동했다는 그녀는 지금도 종종 보컬 레슨을 받으며 오디션에 참가하거나 극단의 단역으로 무대에 오르기도 한다. 르네 파페 같은 유명인사들을 인터뷰해 언론에 투고하기도 하고, 가까운 친구들을 불러모아 자작시에 멜로디를 입혀 낭송하는 작은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요즘에는 주로 화가로 활동하고 있는 그녀는 지인의 도움으로 스위스, 영국 런던 등의 작은 미술관에 그림을 여러 점 팔기도 했다.
혼자서 딸을 키운 빅토리아의 어머니도 예술적인 김각이 있는 분이다. 예전엔 흔히 러시아 여성들은 젊을 때는 날씬하다가 나이가 들면 마트료쉬카처럼 된다고들 했었는데, 요즘엔 날씬한 중장년의 러시아 여인들도 많이 보게 된다. 지본주의가 도입된 지도 20년이 넘었고 식량난도 없어진 대신 러시아 여인들은 불굴의 의지로 디이어트를 하고 있다. 나도 대학원에 다닐 때 하루 종일 이어지는 강의를 들으며 떠먹는 요구르트 하나로 버티는 같은 과 친구를 본 적도 있으니까. 추운 날씨에 매우 얇은 밀가루 팬케이크 블린과 말린 과일, 땅콩 등 토핑이 가미된 초코렛 등 고칼로리 간식들이 유혹하는 나라에서 몸매를 유지하는 비결은 유전이 아니라 노력일 것이다. 빅토리아의 어머니도 마트료쉬카 보다는 바비인형에 가까운 여성스러운 매력이 넘치는 분으로, 젊을 때 미술관에서 일하셨다고 한다 한번은 에르미타쥐 미술관 안마당에서 열린 음악회에 빅토리아의 초대를 받아 간 적이 있는데, 아무나 소화할 수 없는 무늬의 코트를 입고 발레리나처럼 춤을 추던 빅토리아 어머니의 우아한 모습이 지금도 가끔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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