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람아, 너의 이름은
누군가에겐 산산이 부서진 이름
어릴 적 수수께끼 중에 이런 문제가 있었다.
분명 내 것이지만 남이 더 많이 쓰는 것은?
바로 이름이다. 내가 정할 수도 없고, 평생 동안 쓰지만 큰 마음먹기 전엔 바꾸기도 쉽지 않은.
나는 내 이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한글보다 한자 이름이 많던 '라떼'엔 유독 튀기도 했거니와, '보람찬 하루 일을'로 시작하는 군가로, 코만도 친구 람보로 나를 불러대는 짓궂은 남자 사람들의 장난이 달갑지 않았다.
'자기 이름 한자로 쓰기'란 문제가 한자 시험에 나올 때면 한 문제를 거저(?) 먹었다는 기쁨을 맛볼 때도 있었지만,
성명학을 배운 어느 지인은 발음하기 힘든 이름은 운에도 좋지 않다는 의견을 피력한 적이 있는데, 혹시나 서양은 다를까 기대하며 남편 따라 사는 나라를 바꿨더니 이런, 나를 '부란'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래도 괜찮다. 옆 나라에서 잘못 받아쓰면 '도둑들에게'란 뜻이 되기도 했던 이름이니까.
무엇보다도 보람이라는 이름은 그 뜻대로 살기가 고달프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보람은 "어떤 일을 한 뒤에 얻어지는 좋은 결과나 만족감. 또는 자랑스러움이나 자부심을 갖게 해 주는 일의 가치"이다. 그리고 예문으로는 이런 것들이 있다.
애쓴 보람도 없이 그 일은 실패로 돌아갔다.
열심히 공부한 보람이 있어 그는 대학에 합격하였다.
애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열심히 공부한 보람 없이도 성공했으면 좋겠다. 일을 하지 않고도 좋은 결과와 만족감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를테면 일확천금이나 횡재, 어부지리 같은 삶을 살고 싶다.
염치없게도 나이 마흔이 이런 생각을 한다.
그래서 나는 류성실 작가가 부캐의 이름을 BJ 체리장이라고 지은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한다. 성실하게 살기란 얼마나 고되며 체리장처럼 체리피커가 되어 일등석 타고 달리며 밤마다 천만 원어치 진수성찬을 먹는 기분은 얼마나 달콤할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구온난화 방지를 위해 노력해야 하며 서울대를 나오지 않은 사람이 함부로 자신의 광기를 내비치다간 미술관이 아니라 정신병원으로 끌려갈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할 때 다른 보람이 들은 뭐 하고 사는지 검색해 본 적이 있다. 이 세상에는 나 말고도 대기업 임원을 역임한 보람이도 있고, 가수, 축구선수, 음악가, 무용단 대표 보람이도 있다. 화사한 옷을 입고 사랑하는 남자와 청첩장 사진을 찍은 보람이도 있으며, 역사책과 동화책을 쓴 보람이도 있다.
검색엔진의 도움을 받기 전에 내가 알던 가장 나이가 많은 보람이는 88년 서울 패럴림픽 개막식에서 마지막 성화봉송주자로 하얀 체육복을 입고 어머니의 휠체어를 밀던 여섯 살 보람이었다. 그리고 가장 어린 보람이는 유튜브로 불과 일곱 살의 나이에 건물주가 되었다는 크리에이터 보람이었다. 유투버 보람이가 한 달에 버는 돈이 내가 평생 벌 돈보다 많은 것 같다.
그리고 지금은 생사조차 알 수 없는 구미 보람이, 혹은 보람이라고 불리었던 아이가 내가 아는 가장 어린 보람이가 되었다.
아이들의 이름을 결정하는 것은 그 아이의 존재를 가장 먼저 알고, 사랑하리라 여겨지는 사람들이다. 대개는 아이가 행복하게 자라 훌륭한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이름에 담겨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세 살 보람이는, 혹은 보람이라 불리던 아이는 왜 충분히 삶을 영위할 시간조차 갖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야 했을까?학교에 다니고, 은행에서 통장을 만들고, 운전면허를 따고, 여행을 가는 평범힌 일상을 알지 못하고 말이다.
이 매거진에 마지막 글을 쓴 것이 3년 전이다. 그간 보편적 출생등록제는 보다 많은 사람이 알게 되었지만 입법되지 못했고, 숱한 미취학 아동들의 학대사례를 보건대 영유아 건강검진도 아직 범죄예방 및 조기발견 효과를 기대하기는 힘든 상황 같다. 그래서 나와 이름이 같은 아이의 운명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