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의 본질에 관하여

그것은 높은 자의 특권

by 승리
왜 이렇게 배려심이 없을까?


사람 사는 곳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혹은 스스로도 한 번 즈음해봤을 법한 말이다. 우리 사회는 배려 외에도 모범, 상도덕, 질서 등의 조화로운 테마가 함께 어우러져 유기적으로 작용하는 곳으로, 서로가 불쾌하지 않은 공존을 이룰 수 있는 장치들이 많이 구축되어 있다.


[배려심이 부족했던 유년]을 보내왔던 나로서는, 저 말을 듣는 입장으로 성장해 왔다. 하지만 매너가 없다거나, 예의가 없다는 말과 다르게 배려심이 없다는 말에는, 어렸던 당시의 나로서도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엄밀히 따지면 모든 영역의 규범은 선택적인 속성을 갖고 있다. 에스컬레이터를 뛰어서 올라가는 것도, 길을 걸으며 흡연을 하는 행동도, 식사 자리에서 쩝쩝 소리를 내며 먹는 것도, 큰 처벌을 받지는 않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미움’이라는 공적을 이룩할 수 있는 아주 훌륭한 수단임과 동시에 금기의 영역까지는 아니다. 징역을 살지도 않고, 벌금을 내지도 않는다. [배려가 없는 행동]도 같은 영역에 있다.


나는 지금부터 ‘원래 배려심이 많이 부족했던 아이’로 살아왔던 사람의 입장에서 배려의 본질에 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낮은 자를 섬기라 “


해당 문장은 기독교의 경전 중, 신약성서(Books of the New Testament)에 종종 나오는 테마이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라는 겸손의 테마와는 결이 다르게, 섬김을 받아야 하는 자리에 있는 혹자는 낮은 자를 섬기기에 적합하지 않은 역설적인 이야기다. 경전에는 그리스도가 병들고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그들이 처한 문제를 해결하고, 함께 어울리다가 조용히 자리를 떠나는 이야기가 주로 나오는데, 구원자(Messiah)로서 지상에 온 사람이 하기에는 소박하기도 하고, 기구하기도 한 이야기이다. 국부적으로 볼 때 인류의 구원과도 거리가 먼 사건들이다.


위에 언급한 이야기는 배려를 설명하기에는 다소 관련이 적다고 느끼는 바가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리스도를 도울 수 있을까?”


어린아이에서 청년을 넘어서, 내가 뒤늦게 도달한 의문점은 위와 같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돕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리스도를 도운 적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기적적인 그리스도의 도움은 일방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행했다고 기록된 내용은 범인의 영역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도움을 받은 인물들은 하나같이 기대감은 없었다(모든 인물들이 전부 기대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맥락상 모두가 납득을 할 수 있는 결론일지는 모르겠으나, 내 생각에는 그들은 그리스도를 도울 수 없었다.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도움을 받아 [섬김을 받는 낮은 자]의 위치가 규정되었고, 이후에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모습을 감추었다. 유감스럽게도 후에 제자에게 배신당하여 십자가형을 당함으로 영원히 도울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역시 그가 살아있다고 해도, 그는 도움을 받는 입장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감히 짐작해 본다. 그리스도는 ”낮은 자를 섬기라 “는 말을 인생 그 자체로 증명해 낸 샘이다.


도울 수 없는 사람은 배려해 줄 수 있는 것인가?


어린 시절의 나는 누군가를 도울 깜냥은 결코 안될 입장이었다. 어른이 된 나는 종종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다. 어린 자식은 부모를 배려할 수 없지만, 성년이 된 자식에게 배려를 요구하는 부모들도 종종 있다. 학생은 본분을 다하는 과정에서 선생님을 배려하지 않는다(배려할 수 없다). 배려는 물 흐르듯 위에서 아래로만 행할 수 있는 영역이었던 것이며, 미숙한 나를 배려로 채운 결과물이 [인정받는 어른]의 영역이 아닐까 싶어졌다.


모종의 스스로의 깨달음을 통해, 배려에 대한 관점을 다시 정립하였고, 계속해서 삶에 적용 중이다. 나를 배려하지 못하는 연장자는 그만큼 성장하지 못한 것이었고, 나를 배려해 준 후배는 곧 나를 추월해 나아갈 귀인 일 것이다.


조금 더 간결하게 표현하자면, 배려심은 어떠한 지표로 사용할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싶다.


세월에 걸맞은 소양을 갖춘 인격


배려심을 필연적으로 갖출 수 없는 어린아이로부터 시작하여, 이제는 제법 자리에 맞는 배려심을 갖추었을지도 모르는 어른이 되었다. 우리의 성장은 앞으로 더 많은 사람을 배려할 수 있는(도울 수 있는) 인격으로 연단되어 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성장할 구석이 아직 많이 남았다는 생각에 조금은 의미 있는 날들이 이어질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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