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배신자의 유전자를 타고났어요.”
살면서 배신을 두 번 해봤다. 하나는 순수하고 무지한 대상에 대한 것이며, 또 하나는 악랄한 자에 대하여 계획된 것이었다. 둘 다 [배신]이라는 관점에서는 스스로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전자의 경우는 얼마 전까지 죄를 뉘우치며 살았고, 후자의 경우는 그 속죄 값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악랄한 것에 당했지만, 스스로도 그렇게 나약하고 무해하지만은 않았기에 되갚아 드렸다. 그러나, 두 가지 배신에 대하여 후회하는 마음은 없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알만한 사람은 알법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본인의 경험상 [배신]은 양날의 검이라고 감히 의견을 제시한다. 당한 것과 행한 것, 양쪽 다 고심하고 나면 초월적인 자아의 성장을 체험할 수 있는 극약 처방인 샘이다. 물론, 이 부분에서는 해당 인과관계를 곱씹어 회고하고,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들에 한정적으로 해당된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엔 이 말에 공감하시는 선생님들이 소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감하지 못한다면 나를 비난해도 좋다. 되도록이면 마음 것 비난해주셨으면 한다(댓글로 하셔도 됩니다).
배신의 역설은 [믿음과 의심]의 구도와 닮은 점이 있다. 배신을 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재료는 대상의 신뢰이며, 단순한 정도의 신뢰가 아닌 제법 공들인 수준의 것이 필요하다. 해당 신뢰를 기반으로 상대는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배신자에게 모종의 보증을 구축해 두는데, 이 보증을 내방식으로 표현하자면 [황금 고블린]인 경우가 종종 있는 편이다. 그리고 이것이 돈이나 경제적 가치에만 한정적인 것은 아니다.
하여간 신뢰하는 사람의 [소중한 무언가]가 걸리는 상태가 된다. 어리고 미숙한 시절엔 작고 소중한 마음을 상대방에게 의견을 구하지 않고 냅다 걸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국민학교 시절 길에서 팔던 오백 원짜리 병아리에게 소중한 마음을 가득 담아 애지중지 키웠으나, 일찍이 병들어 무지개다리를 건너는 그를 보며 밤새 울던 것도 배신의 설움 중 하나로 누구나 겪었을 법한 이야기지만, 당사자인 병아리는 억울할 수 있다. 이 또한 어른이 되어 바라보면 작은 사건이지만, 당시의 마음으로는 크고 버거운 성장통이었으리라.
“삐약(내가 아파서 간 건데, 네가 왜 배신감을?)”
- 1994년, 여느 여름에 타계한 병아리의 유언
내가 했던 첫 번째 배신은 아마도 이런 종류의 배신이었을 것이다. 상대가 나를 너무 믿어버린 탓에, 현실적인 결론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본인이 병아리와 같은 길을 간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사람의 세상에선 배신자로서 사라진 것은 분명하다. 이제부터 내가 저지른 만행의 필연적 행보에 대하여 이야기해보려 한다.
누군가에게 신앙심을 품게 하기까지,
[배신]이라는 주제와 완전 반대편의 이야기인 것 같지만, 내 인간관계의 주요 논점은 내가 원하는 상대가 나를 원하는지, 나를 원하는 상대를 내가 원하는가를 판단하여 위와 같은 신뢰관계를 형성하는 것에 항상 중점을 두었다. 지금도 이 원칙은 계속 적용되고 있다. 조금 더 성숙한 방식으로, 조금 더 부드럽게 사용되고 있지만, 유년시절에도 저런 극단적인 규칙이 작용했기 때문에 나는 가끔씩 친해진 사람에게 나를 ‘배신자의 후손’이라는 유희적 표현을 사용한다(이 시점은 상대와 제법 많은 신뢰가 쌓인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상대의 믿음을 얻기 위하여 상식을 뛰어넘는 신뢰를 제공하는 편이지만, 실제로 내가 그들에게 배신당하는 경우는 이제 없다. 다르게 말하면, 내가 신뢰하고 있는 사적 친분은 없다.
잘 살기 위해서, 잘 지내기 위해서, 우리는 배신에 대하여 잘 이해하고, [올바른 배신]을 실현할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배신은 무조건 부정적인 요소라고 판단하기에는 여러 가지 다양성이 존재하는 개념이다. 감정적으로 내키지 않는 방향이나 내가 싫어하는 대상에 대하여, 혹은 복수를 위하여만 존재하는 경우는 오히려 드물다. 살다 보면 배신은 기본적인 척도로 [가치]에 중점을 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배신은 누군가를 얼마나 사랑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딜레마가 얼마나 큰지에 달려 있다. “
- 종이의 집, 세르히오 마르키나
드라마에는 일절 관심 없는 인생을 살아왔었던(특히 K드라마는 더더욱) 일생에서 봤던 몇 안 되는 명작을 꼽자면 [종이의 집]을 선택할 수 있다. 작중에 주요 등장인물인 세르히오(통칭 교수)는 경찰과 협상(이라 말하고 필승법이라 해석하는)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위와 같은 대사를 연기했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저 장면이 [종이의 집]의 제재였다고 생각한다.
드라마를 안 본 분들에게 친절한 요약을 해드리자면, 작중에 동료(겸 애인)를 구출하기 위해 세르히오는 내부에 스파이를 섭외하는데, 성실하고 평범한 가장에 속하는 , 그리고 구출해야 할 동료와 친분이 있는 수아레스 반장을 선택한다. 무리한 미션도 아니고, ”이 시계를 그녀에게 보여주기만 하면 돼.”라는 단순한 요구에 경찰인생을 당장 던져버려도 좋을 만큼의 액수를 제안하고 배신은 성립된다(대충 기억하기에 원화 600억 정도의 금액이었다).
수아레스 반장이 세르히오의 배신(?) 제안을 거절했다면 시청자들은 과연 납득할 수 있었을까? 일단 나부터 얘기하자면 그 장면부터 드라마를 하차했을 것이다. 더 이상 이상한 신념 혹은 뒤틀린 낭만으로 만든 작품에 흥미를 갖기 어려웠을 것이다. 다른 시청자들 입장은 잘 모르겠지만, 상당수가 저 장면을 요즘말로 ‘뇌절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제시할 만한 소재가 드라마 한 편 밖에 없는 점은 아쉽긴 하지만, [종이의 집]은 배신의 집대성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배신을 많이 해주는 드라마이니, 삶에서 배신으로부터 인간혐오가 심하신 분들은 꼭 한번 인간을 학습하는 교보재로 사용하는 것을 권장드린다. 또한, 드라마의 비현실적인 구성에 대한 부분을 지적한다면, 조금 다른 관점을 제시할 수 있다.
소설이나 드라마를 넘어 [이야기]라는 관점을 기준으로, 창작물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절대적으로 ‘갈등’을 겪는다. 대상이 없는 ‘내적 갈등’의 영역도 있지만, [배신] 항목은 ‘외적 갈등’의 영역에서 반드시 존재할 수밖에 없다(특수한 경우, 스스로에 대한 배신감의 결과로 자기혐오 형성). 이러한 이야기적 요소를 위해, 선과 악의 구도보다 더 원초적 범주에서 대립관계가 형성되고, 내용의 전개를 통해 배신의 요소들은 제법 많이 형성된다. 주인공을 만들기 위해서는 악당도 만들어야 한다. 악당을 그리자니 선과 악의 구도보다 더 넓은 범주에서 주인공과의 마찰이 있을 만한 이야기를 전개해야 하며, 그중에서 [배신]이라는 요소를 배제할 수 있을까? 가능은 하다만 이 세상에서 그렇게 재미없는 이야기가 있다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 확률이 100% 근처일 것이다. 하다못해 어린아이들이 보는 동화 속에도 배신자는 있다. 유년시절의 창작물에서도 이 소재의 불용은 허용되지 않는다. 마치 우유에도 성분상 소금이 포함된 것과 같은 이치인 것처럼.
누군가와 관계가 성립하는 순간부터 방심할 수 없는 배신의 영역은,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서 타인에게 상처를 덜 주거나, 나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 방향으로 바로잡을 수 있게 도울 것이다. 결론을 정리하자면 [배신]의 정수는 ‘관계를 구축하는 섬세함’이다. 우리는 사람들과 친해지며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에 생각보다 많은 부분을 운명과 본능에 걸어둔다. 당장 말이 통하는 사람, 나와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 잘생긴 사람, 예쁜 사람, 처지가 비슷한 사람, 그냥 끌리는 사람 등, 다양하게 시작하는 편이다. 물론 본능이나 운명에 맡기는 관계도 좋다. 사람이 언제까지고 타인에게 섬세하게 신경 쓸 수만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만남에 있어서 성숙해질 필요는 있다. 지속적으로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타인의 마음을 지켜줄 의무 또한 있는 것이다.
단순한 이유로 타인을 좋아하고, 타인을 잘 알지 못하면서 보이는 몇 가지 관찰점으로 미워하지 않는 섬세함을 갖고 천천히 접근한다면, 필요한 순간 [올바른 배신]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당신이 당한 배신을 이해할 수 있는 관점을 가질 수 있다면, 꽤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질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