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전의 관망

제3자의 유희

by 승리

지금 사정은 모르겠지만,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갈 무렵엔 학급에서 [필독도서]라는 누렁지가 자주 뿌려졌었다(요새는 누렁지도 안 쓰는 것 같다). 우리 세대(30대)가 [어린 왕자]의 전반적인 내용을 전부 다 아는 것은 아마 이런 이유가 꽤 컸던 것 같다. 지금 같은 미디어 네이티브의 시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기회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때가 참 좋았지’ 같은 어리석은 생각을 하기 위해 운을 띄운 것은 아니다.


[어린 왕자]는 당연히 읽었지만, 내 기억에 가장 오래 남은 소년 권장 도서는 [몽실언니]와 [괭이부리말 아이들]이었다. 전자는 전쟁고아가 된 몽실이와 난남이(새어머니의 딸, 몸이 성치 않은 몽실의 여동생)의 불행 가득한 일대기이고, 후자는 도시의 산업화와 그에 걸맞는 빈민 자녀들의 먼지냄새가 가득한, 불행할 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다루었다. 아마, 이즈음 설명하면 다들 공감하시겠지만, 내가 이 두 작품을 기억에 오래 남긴 이유는 당시에 날 너무 성가시게 했던 ‘독후감’이란 숙제를 해결하다 보니 각인된 것이다. 저 말고도 이런 경험으로 기억에 길게 남은 작품이 필연히 있으리라 생각한다.


두 작품엔 내가 개인적으로 생각한 공통점이 있다. 두 세계에는 [역전]이 존재하지 않는다. 태생부터 불행한 시대를 타고난 몽실이는 발을 절어가며 몸이 불편한 남성과 결혼해서 부유하지 못한 일상을 살게 되고, 괭이부리말의 숙자와 숙희는 여전히 가난하고 시답잖은 삶을 살게 된다. 몽실과 난남이 생존한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하신다면, 그건 그거대로 역전 수 있겠지만, 삶이 드라마틱하게 변화하거나 그들이 ‘행복하게 살았읍니다’라는 결말을 보여준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역전이 없다고 표현했고, 숙자와 숙희도 더 나은 삶을 향하여 조금씩(개미 앞다리만큼)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모습을 볼 때 역전의 요소 같은 게 없다.


지금은 전쟁이 없어 행복한 세상입니다.
- [몽실언니]의 후기 -


가난하다는 것이 꼭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후기 -


당시의 내 독후감평을 요약하면 위와 같다. 아직도 의문인 게 있다면, 내가 전쟁세대 인류가 아니기에 지금까지도 [몽실언니]에 대한 다각적 관점은 가질 수 없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필연적이다. 그녀의 너무 끔찍했던 불행에 공감하기가 어려웠었다. 그에 반해 [괭이부리말 아이들]은 내 삶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는 내용이었다. 솔직히 우리 동네에 작중에 나오는 마을처럼 공업화된 회색빛의 시설이 없었을 뿐, 저렴하게 비닐봉지로 마약을 하는 방법을 알려준다던가, 어린애들이 바이크를 타고(특히 시티 100) 청춘 비슷한 무언가를 즐기는 장면은 자주 보였다. 불우하고 가난한 동네에 사는 착하고 어리석은 두 소녀 숙자와 숙희, 그리고 숙자를 짝사랑하는 어느 소년(이름은 기억 안 난다), 그리고 주변인물들의 서사로 쓰인 소설이다.


줄거리 자체는 사실 [괭이부리말 아이들]보다 [몽실언니]가 좀 더 기억에 남는 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몽실언니]는 전쟁의 배경과 성장과정, 그리고 시대적인 흐름이 명확하게 연출되는 반면, [괭이부리말 아이들]은 그냥 가난하고 불우한 동네의 춥고 배고픈 일상을 다루기 때문에, 인물 간의 갈등만 엄청 많고 시간적 흐름은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느끼는 두 이야기의 닮은 점은 ‘역전이 없는 세상’에 속해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많이 공유하고 있는 역전의 역사라고 한다면 2002년 대한민국 월드컵 4강 진출의 스토리가 대표적이다. 그중에 가장 극적인 역전기록은 [16강 이탈리아전]이었다. 더도 말고 1:0 상황에서 1:2로 역전하여 승리한 경기이다. 불쾌한 의견이지만 담백하게 내 의견을 말하자면, 난 당시의 결과를 아직도 믿지 않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잘은 모르지만 경기 결과 자체는 ‘결함’이라고 생각한다. 이건 억측이고, 근거도 없다. 하지만 내가 성장해 가며 현실을 계속해서 직시하면서, 삶은 2002 월드컵 같은 드라마틱한 장면이 결코 자연스럽게 연출되지 않는다는 것을 많이 보여주었다. 역전의 이유가 당시 감독의 역량이 엄청났다고 한다면 그건 그거대로 믿어주겠지만, 민족 전체가 도파민을 폭발시키던 날, 내게는 싸한 의문만 감돌았었다.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당시의 감정을 스스로 해석했던 적이 있다. 때는 2012년에 또 다른 [역전]을 보고 느낀 감정이 트리거가 되었다. 2002년에 내가 오묘한 감정을 품었던 이유는 바로 [이탈리아의 입장]이란 당연한 관점을 몰랐기 때문이다. 이미 축구 문명이 상당히 앞서간 민족들이 한참이나 뒤떨어진 국가에게 역사적인 패배경기를 보였다는 것은, 당사자 입장으로 보면 단순한 패배가 아닌 정체성의 고찰이 다시 필요한 단계까지 가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대한민국 선수들이 노력이 그들보다 부족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둘의 노력을 비슷했다고 치더라도 출발점이 전혀 다른, 매우 굵은 단계선이 존재하는 민족들이었다.


주로 시간을 초월한 경합의 결과물을 보다 보면, 이미 많은 역사와 경력을 가진 누군가를 신출귀몰한 귀인의 재능으로 찍어 누르는 장면들이 여러 창작물에서 연출된다. 솔직히 이 장면들은 하나같이 재미있다.


당사자가 아니니까 재미있다.


우리는 현실에서 곧잘 역전하지 못한다. 전부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혹자는 분명 역전을 했을 것이고, 그 부분은 매우 축하드린다. 격렬한 박수와 환희를 보내주겠다. 여기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보자. 역전한 상대에게 다시 승부를 걸고, 다시 이길 수 있는가? 혹시라도 여기에서 아주 조금이라도 망설임이 느껴진다면 당신의 역전은 그 순간만 주어진 라플라스의 악마가 준 선물일 확률이 굉장히 높다.


특정 경합이라던가, 경제적 상황, 성적향상, 기록경신 등 꽤 많은 분야에서의 역전은 꽤 좋은 지표이다. 원래 사람이라는 존재가 이 같은 역전을 위해 노력하고 성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점진적이고 필연적이고, 굉장히 합리적이라 말할 수 있는 노력과 재능의 결합이라면 그 역전은 생각보다 재미없다. 시간과 노력과 재능을 담보로 상대와 종이 한 장 차이의 승부사를 보여준 것을 [역전]이라고 칭하는 경우는 없다. 이런 경우는 ’ 없다 ‘보다는 ’ 부적합하다 ‘라고 표현하는 게 맞는 것 같다. [토끼와 거북이]처럼 충분히 납득할 만한 방심을 토대로 역전하는 것도 생각보다 합리적인 결과여서 그런지 ‘역전’이라는 말을 써야 할지 의문이 든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당신과 나는 비슷한 정답에 도달한다.


불합리한 [역전]이 제일 재미있다.


보통사람을 기준으로 잡아도 야구배트를 개인연습으로 주간 8만 번 휘두른 선수와 매일매일 술과 고기만 먹고, 단체기본연습만 참여한 선수의 격차는 시간이 갈수록 벌어질 수밖에 없다. 머릿속으로는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이다. 왜 이런 뻔한 가설을 세웠겠는가?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보통의 창작물들에서 둘이 붙으면 [연습하지 않은 선수]가 이긴다. 왜냐하면 그 선수가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다시 언급하는 내용이지만, 현실에서는 비정상적인 역전사태가 흔하게 나타나지 않는 편이다. 조금 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저나 당신의 인생 전반에 단 한번 이상의 드라마틱한 역전 서사는 없거나 한 번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도로 성장한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이상, 당신은 현실이라는 벽이 최고로 높은 국가군에서 태어난다. 그만큼 많은 인프라도 갖추고 있어 삶은 윤택하고 문명은 화려하다. 다만 그 역치값이 엄청나게 내려가있는데, 그 부분이 승부와 성취의 영역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삶에 있어서는 각자의 카메라가 영구지정된 주인공 시점으로 살아간다. 때론 이 부분이 잔혹할 수도 있지만,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아름다울 수도 있다.


[역전을 관망]하며 타인의 희로애락을 즐기는 시대가 되었다. 아쉽게도 구경꾼의 포지션을 선택할수록, 스스로의 승부사는 점점 퇴색되어 간다는 것이 참으로 아쉽다. 물론 현실의 벽이 너무 높고 두껍고 딱딱하긴 하다. 하나씩 꾸준히 하면 성공한다는 말은 진리에 가까운 말이지만, 성공한 누군가는 이미 수백 가지를 한 번에 이루어 낼 수 있는 귀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장면은 우리에게 굉장한 무기력함을 선사한다. [역전을 관망]하며 그 빈속을 채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나는 역전을 당한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 누군가는 흥미롭다고 구경하는 [역전]은 내게 슬픈 장면일 뿐이다. 동시에 역전할 수 없는 시대를 사느라 힘이 다한 사람들이 아쉽기도 하다.

작가의 이전글배신자의 후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