엎질러진 물
싱숭생숭, 기대 반 걱정 반이라는 감정이 무엇인지 절실히 느끼는 시간이 바로 미지의 먼 길을 떠나기 직전의 시간일 것입니다. 내가 가고 싶어서, 내 손가락으로 열심히 번역기 돌려가며 지원한 건 분명한데... 막상 1년 동안 정든 가족들, 친구들, 우리 동네를 떠나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나라로 간다는 게 믿기지가 않거든요. 그래서 때로는 ‘아 그냥 취소할까?’라는 생각도 문득 드는 게 바로 ‘떠나기 하루 전’입니다.
그래도 어쩌겠어요?
이미 항공권은 다 끊어놨고, 2주 정도 지낼 임시숙소도 다 예약해 놨으니 '엎질러진 물이라는 게 바로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꾸역꾸역 싸지지 않는 짐을 싸기 시작합니다.
평소에 눈 다래끼도 자주 나고 두통도 잦은 막내아들을 걱정한 어머니의 사랑이 담긴 비상약들(약국에서 5만 원어치 넘게 산 거 같아요), 4계절 동안 지낼 옷가지들, 여러 가지 서류들... 셀 수 없이 많은 짐들을 2개의 캐리어에 넣다 보면 느껴보지 못한 감정들이 마음속을 난도질하곤 합니다. 그래도 애써 참아가며 좋아하는 음악과 함께 싸다 보면 안 끝날 것 같은 시간들도 끝이 납니다.
줄곧 나를 저울질하던 체중계에 내 몸 대신 캐리어를 올려 무게를 맞춰가며 추가 요금을 내지 않기 위한 발버둥을 칩니다. 그리고 결국 정확히 무게를 맞추고 확인에 확인을 한 후 나의 1년을 책임 질 짐은 완성.
‘이제 진짜 하룻밤만 자고 일어나면 떠나는 건가?’라는 답은 정해진 물음을 반복한 후 그 어느 때 보다 포근하게 느껴지는 내 방, 내 침대에서 마지막 밤을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