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리와 의무의 관계
민주주의 본령은 다름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다름의 인정은 상대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상대가 있어야 비로소 사회가 만들어진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나 이외에 타자를 인정해야만 가능하다. 스페인어로 권리를 derecho, 의무를 obigacion이라 한다. 권리와 의무의 관계는 나와 너의 쌍방관계다. 왜냐하면, 나의 권리는 상대 의무를, 나의 의무는 상대 권리를 뜻하기 때문이다. 권리와 의무는 동전의 양면이고 수레의 양축이다. 마치 야누스와 같다.
Mi derecho es tu obligacion y viceversa (내 권리는 당신의 의무다 그리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말이 있다.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세상은 혼자 살지 못한다. 더불어 함께 살아야 한다. 상대가 없다면조만간 나 자신도 소멸할 운명이다.
일반적으로, 우리 모두는 성공과 행복을 추구한다. 무한경쟁시대에서 생존을 위한 일정한 이기주의는 필요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공존을 위해서는 반드시 이타주의가 필수적이다. 나의 생존과 너의 생존은 별개인 듯 보이지만, 사실 우리의 공존이라는 큰 틀에서는 수레의 양축이다.
다름은 내 성장의 밑거름이다. 만약 세상이 서로 다름의 다양성을 거부하고, 표준화되고 획일화된다면, 더 이상 성장을 기대하기 힘들다. 성장은 다름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다르기 때문에 교환이 필요하고, 이를 통해서 상호 성장을 도모할 수 있는 것이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나눈다"는 말은 공산주의에서 유래했다. 개인의 노력을 폄하고, 땀의 가치를 부정하는 도덕적 해이를 초래할 여지도 있다. 그럼에도 국제사회의 유지와 성장이란 대원칙을 따른다면, 적당한 수준에서 반드시 이를 검토해 봐야만 한다.
기후변화로 세계는 지금 폭설, 강추위, 불볕더위, 가뭄과 홍수, 잦은 태풍 등 자연재난을 겪고 있다. 모두가 산업 선진국들의 이기주의적 경제발전에서 기인한 탓이 크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들만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약탈적 경제발전들 대부분 이었다. 그래서 일까, 지금 전 세게는 기후변화와 팬데믹 코로나에 일상을 잃어버렸다.
기업은 이윤추구가 목적이다라고 학부시절 경제학 원론 시간에 배웠다. 그래서 기업은 이윤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설사, 기업활동이 법이 정한 바를 어기는 위법적, 불법적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탈법과 편법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런 행태는 분명히 기업의 책임을 망각한 반사회적인 극도의 이기주의 작태이다. 반드시 사회적으로 통제되어야 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企業- 社會的責任,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CSR)이란 말이 있다. 기업이 생산 및 영업활동을 하면서 환경경영, 윤리경영, 사회 공헌과 노동자를 비롯한 지역사회 등 사회 전체에 이익을 동시에 추구하며, 그에 따라 의사 결정 및 활동을 하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 기업은 회사 자체의 개별 이익과 사회 자체의 공적 이익을 동시에 추구해야 100년 기업이 될 수 있다. 노동자와 소비자가 없는 기업은 존재할 수 없다.
촛불 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청년 일자리 창출을 최우선 공약으로 내세웠다. 5년이 지난 지금 문재인 정부의 성적표는 초라하다. 적체된 청년실업은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들을 양산했다. 청년실업, 삼포세대, 오포 시대, 미혼과 비혼, 저출산 등이 그것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얼마나 빈약한 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며칠 전, 임기를 불과 몇 달을 남기고, 문재인 대통령은 삼성, 엘지, 현대 SK 등 재벌 총수를 청와대에 초청했다. 일자리 창출을 독려하기 위함이다.
호세 데 라 끄루스 뽀르삐리오 디아스 모리(José de la Cruz Porfirio Díaz Mori)는 1884년 ~ 1911년까지 약 30년 멕시코를 철권통치하면서 모든 민중운동을 탄압했다. 당근과 채찍 (a carrot and a stick / pan o palo / plata o plomo) 정책으로 부정부패 일소와 독재타도를 외치는 민중운동을 회유하고 탄압하였다. 대신 멕시코 재벌기업들과 많은 외국 자본가들의 부를 집중시켰다.
뽀르삐리오 디아스는 1862년 5월 푸에블라에서 벌어진 프랑스와의 전투에 참가한 뒤 5년 동안 전투를 계속하였다. 프랑스의 지원을 받던 막스밀리언이 프랑스의 패배와 함께 물러나게 되고 공화파 정부가 다시 들어선 1867년까지 그는 유능한 군인이었다. 프랑스 군대와의 전쟁이 매듭지어지자 베니토 후아레스는 경제 ∙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면서 군대를 축소시켰다. 9만의 군대는 한꺼번에 2만 명으로 감소되었다. 실업 군인들은 농촌이나 도시에서 무기를 소지한 채 많은 피해를 주고 있었다. 이들은 국내의 각지에서 갱이 되어 몸값을 요구하는 유괴나 폭행을 행하고 마을이나 농장을 약탈하였다. 이때 디아스는 1867년 호헌파의 대통령 후보에 추대되었지만, 이 선거에서 후아레스에게 참패를 당했다. 1871년 6월에도 대선에 나오지만 역시 후아레스에게 패배했다. 그러나 후아레스는 돌연 1872년 7월 18일 심장마비로 사망하였고 최고 장관이었던 레 르도가 헌법에 의거하여 대통령직을 계승하였으며, 곧이어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876년 레 르도가 재선의 의지를 밝히고 법원과 갈등을 빚는 틈을 타서 포르피리오 디아스는 반란을 일으킨다. 그는 테코 아쿠에서 레 르도의 군대를 대파하고 11월 21일 레 르도는 수도를 버리고 아카풀코로 달아났고 이 날 디아스는 수도에 개선하여 그대로 임시 대통령이 되었으며, 1877년 4월 1일 의회는 포르피리오 디아스를 대통령으로 선언하였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은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했다. 경제개발을 천명하면서 불법 쿠데타를 혁명으로 명명했다. 멕시코 독재자, 뽀르삐리오 디아스와 마찬가지로, 박정희 대통령도 당근과 채찍으로 민중운동을 탄압했다. 그 과정에서 당근을 주워 먹은 세력들이 바로 삼성, 현대, 엘지, SK 등 한국의 재벌들이다. 분명히 재벌들은 독재정권의 비호 하에 들여온 외국자본을 독점하고 이를 이용한 이기주의적 기업이윤을 극대화했다. 벌어들인 막대한 재벌이익은 뇌물상납 고리로 부정부패와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더욱더 공고히 되었다.
"세계 경제가 어렵다". "코로나 팬데믹이다." "기업경영이 어렵다." 재벌들은 앓는 소리를 한다. 권리만 누리고 사회적 책임은 등한시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존재하기에, 재벌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들의 시화적 의무/책임은 일자리 창출이다. 그럼에도 일부 재벌들은 마치 엄청한 시혜를 베풀 듯, 일자리 창출에 매우 소극적이다. 지극히 이기적인 기업경영이다. 사회적 해악이 매우 심대하다.
우리는 성장하기 위해서 산다. 개인, 기업, 사회, 국가도 모두 성장해야 한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너와 내가 운명 공동체임을 인식하고, 각자의 권리와 의무를 충실히 이행할 때, 우리 사회는 한 발짝 도약하고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권리는 상대의 의무이고, 나의 의무는 상대의 권리임을 잊지 말자. 그래야 Happy Together 한 사회도 가능히고, 더불어 살 맛난 세상이 되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