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e es envejecimiento?
운전할 때면, 나는 제자리인데, 주위 풍경만 시시각각 바뀌는 이상한 느낌을 경험하게 된다. 나와 움직이는 자동차 그리고 주변이 만들어 내는 느낌이 신기하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나와 흘러가는 시간 그리고 주변이 만드는 것이 바로 '나이'다. 아침에 일어나 샤워 후, 거울 속에 있는 낯선 아저씨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이 먹은 탓에 어제의 청년이 오늘의 아저씨가 되었다. 서른 살 이후로 내 마음의 나이는 멈췄다. 그러나, 현실의 나이는 쉼 없이 지금도 진행 중이다.
흔히 "우리"라는 공동체 입장에서 "어린이는 우리의 미래요, 노인은 우리의 과거다"라고 말하지만, 개인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젊음은 내 과거요, 늙음은 내 미래다." 더 맞는 말 같다. 단수 주어면 시간순이지만, 복수 주어면 시간은 역순이 된다.
나이를 먹으면서, 주위에 노인들을 유심히 관찰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들의 모습에서 나의 미래를 살피고자 함이다.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무엇을 먹는지? 잠은 얼마나 자는지? 어디가 주로 아픈지? 재테크는 어떻게 하는지?, 살아보니 무엇이 후회되는지? 그리고 부자 노인의 삶과 빈자 노인의 삶을 비교한다. 관찰을 통해 힌트를 얻어 미래를 준비할 수 있겠지만, 완벽한 대비는 불가능하다. 하여튼, 나이를 듦은 자연스럽지만, 달갑지는 않은 일이다. 내 경우를 보면, 35살이 넘으면서 몸의 회복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50살을 넘기면서 여기저기 한 두 군데 이유 없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2012년 개봉한 정지우 감독의 '은교'라는 영화가 있다. 노교수와 그의 조교 그리고 여고생, 세명이 주인공들이 서로 각자 못 가진 것에 대한 탐욕을 그린 영화다. 젊을 그리워하던 늙은 노교수는 시상식에서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나이의 적고 많음에 따른 젊음과 늙음은 누구도 원하는 바는 아니지만, 모두가 인정해야 하는 현실이기에, 인간의 육체는 마음과 정신을 담는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주장인 듯하다.
'늙는다'는 것은 '익숙해지다' 혹은 '낡다'는 의미이다. 쓰임에 따라 긍정도, 부정도 될 수 있다. 종이와 인쇄술의 발명 전까지, 늙는다는 것은 재앙이 아니라 오히려 대접과 축복이었다. 그래서 '장유유서'라는 말도 생겨난 듯하다. 먹고사는 문제에서 농사법, 목축법, 사냥법 그리고 낚시법의 배움은 모두 유경험자, 노인에게 달려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이와 인쇄술 그리고 인터넷은 그러한 노인의 역할을 대신했고, 더 이상 노인의 특혜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면, 노인의 역할은 완전히 없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영상뉴스(TV 뉴스)가 나왔다고 활자 뉴스(신문)가 사라지지 않았다. 또한 자동차가 나왔다고 마차가 사라지지도 않았다. 다만, 그 역할이 축소되었을 뿐이다.
이슬람 수피족은 병이 생기면, 의사 대신 완치자를 먼저 찾는다고 한다. 병자의 목적은 병을 고치는 것이지, 의사의 만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럴듯해 보인다. 이런 예는 우리 주변에 흔하다. 낯선 곳에 여행을 가려면, 지도나 안내책를 보지만, 결국 그곳에 갔다 온 경험자를 찾게 마련이다. 모두가 경험을 중시하는 사례다.
대접과 존경은 상대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역할에 걸맞은 행동을 통해 스스로 얻게 되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나이 들어 노인이 되면, 마치 나이가 벼슬처럼 나이대접을 주위에 요구하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세상은 바뀌었다. 나이만으로 대접받는 시대는 지나갔다. 바뀐 시대를 수용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 "나 때는 말이야!"를 외친다면, "라테 꼰대"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직간접으로 얻은 소중한 경험을 현실에 맞게 재구성하고 컴퓨터, 인터넷, 증강현실, 블록체인, 가상화폐, 유튜브 등 배우고 익혀서, 자신의 경험을 현실에 맞게 업데이트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