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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공방 Nov 29. 2019

내가 결벽증에 걸린 이유

그리고 조금 나아진 이유

대학교 3학년 때 외무고시 준비를 시작했다. 2학년 때 떠난 교환 학생 생활 당시 어렴풋이 국가 브랜딩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고, 부모님 두 분 다 공무원이셨던 것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그래 사기업보단 국가 기관이지!' 라며 큰 고민 없이 그 길을 택했다. 사람 갉아먹는 시험이라는 건 들어서 익히 알고 있었지만 본래는 그다지 스트레스에 민감한 성격이 아니어서 괜찮을 것 같았다. 고시 공부를 제대로 시작하고 나서도 한동안은 나와 적성이 잘 맞는 시험을 골랐다 여겼다. 국제 외교사, 국제 정치, 국제법, 경제학 다 좋아하는 분야들이었고 무엇보다도 내 특기라고 할 수 있는 영어를 마음껏 쓸 수 있는 직종일 것 같았다. 


그런데 잔재주와 요령이 좋은 거지 성실한 축에는 속하지 못하는 내게 국가고시는 넘기 힘든 산이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벼락치기 외의 방식으로 공부해본 적이라곤 없는데, 엉덩이 딱 붙이고 앉아 수많은 법률과 이름을 씹어 삼켜야 하는 외시는 그런 알량한 방법이 통하지를 않는 것이다. 게다가 수포자인 내게 고급 미시 경제학은 지옥과도 같았다. 그렇게 슬슬, "아 내가 안간힘을 다 써도 안될 수 있겠다"는 두려움 같은 것이 엄습해오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공부하는 양과 운에 따라 A 대학을 가느냐 B 대학을 가느냐, A학점을 맞느냐 C학점을 맞느냐의 차이였다면, 이제는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게다가 주변의 동기나 같은 과 선배들이 하나둘씩 CPA 합격, 컨설팅 인턴, 대기업 공모전 합격 등의 성취를 이루어내고 있던 참이어서 더욱 초조해졌다. 나만 뒤쳐지나. 나 혼자만 낙오되는 건가. 지금 돌이켜보면 고작 스물두 살이었던 내게 길은 많았는데, 인생을 몇 년을 통째로 날려먹을 수 있는 "고시"라는 틀이 내 시야를 좁혔던 것 같다.


나름 긍정적이고 그 이상으로 오만하기까지 했던 나는 처음 마주치는 버거움에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 당시 개봉한 비긴 어게인 영화 속 아담 리바인이 부르는 Lost Stars 곡을 듣다가 길에 주저앉아 펑펑 울 때에도, '아 나는 감수성이 지나치게 예민해'라고 생각하고 말 정도로 막연함이라는 내 감정의 실체를 알지 못했다.


God, tell us the reason youth is wasted on the young
신이시여, 젊은 자들이 젊음을 낭비하는 이유에 대해 알려주세요 

Adam Levine - Lost Stars (from Begin Again) 중


아마도 처음 마주한 "책임져야 하는 현실"이라는 것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그때까지 나는 부모님의 보호 아래서 당신들이 시키는 대로 공부만 잘하면 되었다. 내 노력은 책상 앞에 앉은 시간으로 메겨졌고, 보답은 성적이었다. 그런데 진로는 달랐다. 앞으로의 내 수 십 년을 결정할 무언가를 스스로 찾아내서 정해야 하고, 그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힘으로 이루어내야 한다. 그런 부담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미처 자각하지 못한 채 그저 매일 학교 도서관에서 나름의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그리고 조금씩 행동거지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데톨, 물티슈, 티슈, 가글 없이는 어디에도 가지 못했고, 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던 '오염'이라는 것에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공용 화장실 문고리를 못 잡는 것은 당연하고, 내가 오염군으로 낙인 한 물건에 스치기라도 하면 당장에 손을 씻으러 갔다. 대학 동기들은 애가 안 하던 공부를 하려니 미쳐버렸다고 했지만, 나는 그저 공부 환경을 청결히 하고 싶은 것이라고 말하며 그들의 손에도 데톨을 찍찍 짜주었다.


정리해보자면, 내 힘으로 도저히 해내지 못할 것 같은데 그 실패의 탓이 오롯이 내게 있는 상황 - 그러니까 통제성(controllability)은 떨어지고 책임(responsibility)만 큰 상황의 불쾌감을 회피하기 위해, 내 두 손으로 통제할 수 있는 다른 것을 찾은 것이다: 위생. 더러우면 피하거나 닦으면 된다. 그러니까 난 이렇게 여겼다.


청결하면 다 해결된다 

그 뒤로 일 년 정도 더 외시 공부를 하다가 어느 순간 시험을 치르지도 않고 포기했다. 그 뒤로 다행히 외국계 사기업에 취직해서 잘 다니고 있긴 하다. 그래도 결벽증은 낫지 않았다. 이미 더러움에 대해 병적으로 낮은 역치가 나의 인지 시스템에 뚜렷이 각인되어버려서, 입사하고 첫 몇 달은 정말 끔찍했다. 내 자리에 와서 노트북을 만지는 사람들의 손은 과연 깨끗할까, 회사 식당의 이 숟가락은 세제로 제대로 닦았을까, 엘리베이터 버튼은 주기적으로 소독을 할까, 등등의 생각에 업무 집중도가 떨어질 정도였다. 결국 살아남기 위해서 '집 밖에서는 포기하자'라는 마음가짐으로 애써 소독 빈도를 줄였지만 이미 주변 사람들도 다 내 결벽증을 알고 있을 정도였다. 


입사 3년 차에 도쿄 지사로 와 혼자 살게 되면서, 그리고 장거리 연애를 하게 되면서 결벽증은 더더욱 심해져갔다. 처음으로 생긴 오롯한 내 공간이라 오염에 대한 통제 가능도가 심히 올라가면서 나는 더욱 가열차게 손을 씻고 빨래를 했다. 그 와중에 오래간만에 길게 이어지고 있는 연애 또한 완벽하게 해내고 싶었다. 상대방의 결점들은 다 고쳐주고, 뭔가 안 맞으면 끝장날 때까지 얘기해보고, 서로의 속내를 다 파악하여 배려하고, 단어 하나하나를 예쁘게 고르고 - 그런 식으로. 매일 밤 자기 전 핸드폰을 알코올 소독하는 마음으로 관계를 대했다. 물론 상대도 마냥 맞춰주는 사람은 아니었던 지라 포기한 것들도 많았지만, 난 "이건 절대 안 돼" 라던지 "최저선은 여기야"라는 얘기들을 자주 했고, 장거리로 인해 쌓여가는 균열들에 매번 과장된 상처를 받으며 정화를 시도했다.


그런데도 안됐다. 최선을 다 해 그의 취직 준비를 도왔는데. 그의 컨디션과 상태를 봐 가면서 대화 주제를 골랐는데. 언제나 나보다 바쁜 그의 스케줄에 맞춰 여행 계획을 세우고, 관계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한 후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는데. 단어 하나도 쉬이 넘기지 않고 짚어낼 건 짚어내서, 더 편해지더라도 서로에게 무례해지지는 않은 관계가 될 수 있도록 방어선을 깔았는데. 소용이 없었다. 결국 좋지 않은 방식으로 끝이 났다. 박테리아가 묻은 것 같아 손을 그렇게나 자주 씻었어도 감기에 걸리고 만 것처럼.


결국 내 마음대로 되는 건 나밖에 없다
가끔은 나도 내 뜻대로 안 된다


이걸 받아들이기가 싫었던 것 같다. 극심한 완벽주의에다 뭔가 내 뜻대로 안 되면 상당히 불안해하는 인간이라, 노력해도 떨어질 것 같은 시험, 공 들여도 망가지고 마는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싶었나 보다. 외시 또한 "적성에 안 맞아"라며 시험장에도 안 들어가고 포기하지 않았던가. 누굴 좋아해도 왠지 안 이어질 것 같으면 호감을 표시하는 법도 없이 친구로 남아 상상 속에서나 고백을 하는 나였다. 겁도 많고 자존심도 세고. 그래서 나를 그렇게나 좋아한다는, 결벽증까지 다 맞춰줄 수 있다는 사람이랑 하는 연애가 이렇게나 삐걱거리는다는 것도 도저히 용납이 안됐다. 다툼이 잦아 불행한 시간을 몇 개월 넘게 보내면서도 아니야 나아질 수 있어, 예쁘게 만들 수 있어, 라며 이미 헤진 연애를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이유로 헤어지게 되었을 때, 그러니까 내 노력과 무관하게 끝을 보게 되었을 때가 되어서야 - 깨달았다.


그냥... 안 될 수도 있구나.

물론 헤어지고 한참을 힘들어했지만, 조금 진정이 된 후에는 묘하게 내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정말 아끼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나랑 핵심부터가 안 맞을 수도 있구나. 여전히 애정을 가지고 있더라도 내게 상처를 줄 수도 있구나. 서로 바둥바둥 애를 쓴 관계더라도 허망히 무너질 수 있구나.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다 내 책임인 것도 아니게 되는구나. 내가 제어하지 못하는 관계를 두려워했는데, 실제로 통제 밖의 요인으로 헤어져보니까 이런 느낌이구나. 난 딱 이 정도로 아프구나. 아 - 내가 외시에 응시했다가 떨어졌으면 그냥 몇 달 끙끙 앓다가 말았겠구나. 이런 깨달음들이 있었다.


그러면서 신기하게도, 또 한 가지의 제어 강박인 결벽증이 아주 조금 나아졌다. 독감처럼 견뎌낸 이별에서 얻은 깨달음이 이 영역으로 번진 것이다. 내 몸이 편하려면 바깥 먼지가 묻은 가방이 이불에 닿아도 좀 내버려 둬야겠구나. 그렇게 더러워하던 지하철 손잡이를 잡아야 안 넘어지는 때도 있는 거구나. 손에 와인이 좀 묻었다고 화학 제품으로 박박 씻어내는 게 피부에 더 안 좋구나. 게다가 내가 고수하는 이 주관적 청결 기준에 100% 부합하는 삶은 어차피 힘들 테니, 어느 정도는 포기해야 하는구나 - 와 같은 생각들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아 몰라 내 맘대로 되는 거 하나 없어 다 포기해, 라기보다는 노력해봐도 안 되는 것들은 놓아주자, 정도의 타협이랄까.


물론 여전히 청결의 기준은 남들보다 높고 오염으로부터 분리되고 싶어 하는 욕구는 강하지만, 꽤 괜찮은 회복 단계에 돌입한 것 같다. 조금씩 내려놓는 것. 계기가 이별인 것은 상당히 유감인 측면이 있지만, 슬슬 자취집이 거대한 청소 대상으로 느껴져 일상생활마저 버겁던 나에게 이 회복에의 한 발자국은 아주 반가운 일이다. 결벽증 치유에 짧게는 7년 길게는 19년 정도 걸린다고 하는데 내가 그 범위의 앞 쪽에 있기를 바라본다. 물론 이것 또한 나의 통제 범위 밖에 있을 것이다. 그것도 받아들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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