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빈공방 Nov 28. 2019

나는 어떤 흔적들을 남기며 살고 있을까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


그러니 헛되게 살지 말라는 이 사자성어가 자주 떠오르는 요즘이다. 너무 급작스레 존재론적 고민을 하는 건 아닌가 싶긴 하지만, 정말 때때로 궁금해진다. 내가 실재한다는 것을 대체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내가 꿈을 꾸는 게 아니고, 누군가의 소설 속 인물이 아니고, 트루먼 쇼에 갇힌 게 아니고, 정말 '나'로 이 '현실'에 놓였다는 걸 100% 확신하고 살아가고 있는 걸까? 아니면 대충 "현실이겠지 뭐. 내가 무슨 억만장자도 아니고 평범하잖아. 나는 나겠지." 하고 받아들인 걸까.


이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해보지 않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꽤나 불안해하는 것 같다. 그래서 무수히 많은 흔적을 남기려고 노력한다. 일기를 쓰고,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고, 사람들과 교류하며 영향을 주고받고, 영상을 찍어 남기고, 사랑을 하고 - 이러한 다양한 '흔적 남기기' 행위에 분산 투자를 한다.


나의 흔적 남기기 포트폴리오는 어떤 구성일까

[창작] 초등학생 시절의 나는 놀이터에서 뒹굴기, 피아노 치면서 노래 지어 부르기, 책 읽기, 이야기 지어 쓰기 외에는 도통 흥미가 없었다. 공부, 친구, (조숙한) 연애, 맛난 밥 다 부차적인 것들이었고 그저 몸을 움직이거나 뭔가를 만들어내는 걸 좋아했다. 이 때는 내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모든 장면을 바깥으로 끌어내어 구현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 자기 보존의 욕구가 강한 아이였다.


[사람-친구] 사람을 매개체로 나를 남기기 시작한 건 조금 후다. 고등학교 시절 가장 친한 친구와 하루 평균 네 시간가량 수다를 떨었는데, 그녀에게 내 세계를 통째로 서술하면서 처음으로 "아 내가 내일 교통사고를 당해도 내가 어떤 생각으로 무얼 하면서 살다 죽었다는 걸 알 사람이 한 명은 있겠구나. 그러니 괜찮겠구나."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물론 나를 낳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보살핌 하에 십 수년을 살아왔지만, 많은 부분은 주어진 것이었을 뿐, 내가 무언갈 의식적으로 선택하고 표현한 경험은 적었다. 하지만 이 친구는 셀 수 없이 많은 대화를 통해 내 행동의 이유와 그 기저의 감정선을 이해했고, 나인 척하고 문자 답장을 하거나 눈빛만 봐도 기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나와 동기화되었다. 물론 그 친구의 상당 부분도 내 안에 세겨졌다.


[사람-연인] 성인이 되고 나서는 연인에게 내 흔적을 남기기 위해 열과 성을 다했다. 상대방도 의도했건 아니던 비슷한 행동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생각과 선호를 전하고, 말 쓰는 방식과 연락하는 빈도를 맞춰가고, 미래를 그려보고, 감동, 분노, 후회, 애정을 서로의 심장께에 박아 넣고, 몸을 섞고, 세계를 섞고.


그러니까 내 흔적 남기기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창작, 사람. 뭔가를 생산해서 가시적으로 남기거나. 제삼자의 관심이나 삶에 남거나. 현재 짐작되는 비율은 창작:사람이 약 30:70이다. 예전에 비해 뭔가를 만드는 행위가 많이 줄기도 했지만, 스물 후반쯤 되니 "좋은 사람을 주변에 많이 두고 싶다"는 욕구가 강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포트폴리오 괜찮은 걸까. '창작'에 투자하는 것은 큰 위험은 없지만 매력적인 보수도 없다. 반면 '사람에게 흔적 남기기'는 고위험 고수익 주식에 투자하는 것과 비슷하다. 창작물에 비해 훨씬 예측 불가능한 인간이라는 존재는 내 다양한 시도들에 훌륭하게 반응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끝도 없이 냉담하기도 하다. 특히 사랑이 그렇다. 성공적인 흔적 남기기는 종종 자녀까지 안겨주기도 하지만, 내 어느 한 구석을 통째로 소멸시키는 이별로 끝이 나기도 하지 않는가.


조금 더 현명히 분산 투자를 해보기로 한다

창작의 '별 것 없음'을 나는 참 자주 느껴봤다. 글을 쓴다 해도 출판하지 않으면 무슨 의미지. 머리를 짜내어 쓴 곡으로 공연 한 번을 못하는데 다 무슨 소용인가. 이런 생각에 난 자주 조금 더 편하고 단기 효과가 분명한 '사람' 카테고리로 쪼르르 이동하여 나를 설명하곤 했다. 그런데 이렇게 창작으로부터의 회피를 반복하다 보니, 너무나 빠르게 설명할 게 줄어들어갔다. 나는 단순히 내가 먹은 점심 메뉴를 얘기하고 싶은 게 아니고 '나'를 나누고 싶은 건데, 책 읽고 글 쓰고 고민하는 시간이 줄어서인지 타인에게 설명할 '내'가 뭉텅이째 사라져 갔다. 그와 더불어 나라는 도장을 찍어보고픈 대상 자체도 적어졌다. 회사에서 보고 말 사람, 몇 번 밥 먹고 나면 다시는 안 볼 사람 등에게는 에너지를 쓸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게다가, 최선을 다 해 긁어모은 진심까지 다 털어놓은 상대라고 안심해서는 안 된다. 최근에 내 흔적을 잔뜩 묻힌 연인을 떠나보냈는데, 신체 일부분을 실제로 잃은 것 마냥 끔찍한 상실 경험이었다.


'사람'에게 투자했다가 실패한 몇 번의 경험 끝에 나는 어느 상황에서도 남는 것, 즉 "창작"에의 투자 비율을 높이기로 마음먹었다. 적적한 고요 속에서도, 따뜻한 동행길에서도, 시끌벅적한 파티장에서도 분명하게 내 것인 것을 만드는 거다. 이건 절대 쉬운 일은 아니다. 나만 해도 자신, 혹은 주변 상황에 대해 뚜렷이 짚어보지 않고 대충 넘기는 날들이 대부분이다. 그래도 텅 비어버린 내 모습을 이대로 두고 싶지 않아서라도, 생각날 때마다 일기장을 연다. 사실 누구든 글을 많이 썼으면 좋겠다. 시각화 없이 사유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글을 통해 자기 생각들과 싸우다가도 화해하고, 어느 날은 일기장에 대고 눈물을 쏟아내고, 지어낸 소설 속 인물에 감정이입도 해보고 했으면 좋겠다. 갑자기 글쓰기를 시작하는 게 어렵다면 엄마한테 보내는 짧은 문자에라도 한 번 더 본인을 담아보자. 그 지난한 과정에서 조금 더 짙어질 거고, 그러면 남기는 흔적들도 보다 선명해질 것이다.


물론 이렇게 노력하더라도 채도가 높아진 나를 잔뜩 묻힐 사람을 원하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을 거고, 다음에 찾아오는 사랑에 난 또 속도 없이 내 물감을 통째로 써버릴 수도 있다. 사람이 사람 때문에 울고 웃는 것은 숙명일 거다. 그래도 언제나 내 것인 것들을 착실히 쌓아가고 또 세상에 남기며 '누구의 누구'가 아닌 나로, 내 이름으로, 내 닉네임으로, 남고 싶다. 창작:사람을 비율을 50:50 정도로 유지하면서. 이렇게 오늘도 흔적을 남겨본다.

작가의 이전글 창의력 슬럼프 극복: 무엇이라도 발행하고 보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