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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공방 Dec 26. 2021

내향인의 뒤집어지게 게으른 주말

의견과 상념이 끼어들 틈이 없는 완벽하게 무용한 하루의 기록


11시에 일어나

슈카 월드를 볼까 하다가

결국 신서유기 영상 두어 개를 보고

다시 한 시간쯤 졸다가 어머니의 고함에 일어나

열두 시쯤 바게트에 방울토마토를 먹어야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진라면에 파김치를 먹어

어머니는 혀를 끌끌 차셔

하지만 내 나이 서른, 메뉴 선택권 정도는 있다

파김치는 안 익어서 너무 아리지만

방에 처박혀 왓챠를 보며 흡입하는 면발은 나쁘지 않아

기세를 몰아 커피를 마시며 네 시간 정도 왓챠 세상을 즐겨

미스 피셔의 살인사건

눈알이 시큰거릴 무렵 기억해내

나는 독서가 취미인 사람이야

두 눈덩이를 꾹 한 번 눌러주고

단편선 두어 권을 꺼내어 소파에 앉아

일단 한 챕터가 어느 정도 길이인지 파악하고

마음을 다잡으며 독서를 시작해

음 요즘 소설은 나랑 영 감성이 안 맞아

역시 나는 클래식을 좋아하니 영문학의 고전, 셜록 홈스를 꺼내

언제 읽어도 재밌긴 하지만 이렇게 만연체였나...?


세상에 어느새 저녁 먹을 시간이야

가족들은 이미 아까 이른 저녁을 먹었으니

배달의 민족을 켜고 돈가스를 검색해

치즈 돈가스와 쫄면을 동시에 파는 가게가 있어 일단 리스펙

콜라까지 야무지게 주문해

배달을 기다리는 시간 동안 홈 요가를 할 요량으로 요가매트를 펼쳐

- 누워

폼롤러를 좀 하다가 곧 머리에 베고

핸드폰으로 인스타를 켜

#홈트 #홈요가 스토리를 올릴까 하다가 요가복 입을 엄두가 안 나니 포기해

지인들의 피드 사이사이를 침범하는 광고들에 눈살을 찌푸리다가

현혹당해

기가 막히는 가격에 모신다는 실버 귀걸이를 하나 사고

혐오와 경탄의 감정을 담아 갖가지 릴스를 보고 있노라면

배민 라이더는 금방 내 저녁을 대령해주셔

항상 생각보다는 맛없는 요리를 먹으며 모던 패밀리를 봐

와진짜 안구를 꺼내서 세척하고 싶은 정도가 됐을 즈음

이를 닦고 소파에 누워서 30분 정도 자

일어나 보니 9시, 아직 하루가 한참 남았어


창의적인 인간을 지향하는 자로서 오늘은 진짜 너무했다 싶어서

핀터레스트와 브런치를 켜 두고 타인의 창의력을 맘껏 감상해

그러다 영상미가 엄청나다는 <멜랑콜리아>를 보며 영감을 받을까 해서 왓챠를 켜

후 다시 미스 피셔의 살인사건 룹에 빠져

두 편 정도 보니까 잘 시간인 거 실화일까...?

누우니 갖가지 상념들이 나를 덮쳐서 일단 멜라토닌 한 정을 먹고

나의 찌질함을 가감 없이 나눌 수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다가

끊으니 열두 시 반, 정말 자야 하니까

문명 특급 딱 한 편만 볼 리는 없고

결국 유튜브 쇼츠 비디오들을 보다보다 마침내는 독일인이 미국을 까는 영상을 보며 

내가 여기까지 왔구나 - 하는 자기 객관화를 이루어내

마지막으로 하루의 양심을 잠재워줄 현학적인 철학 영상 하나를 보는 둥 마는 둥 졸다가

30분짜리 빗소리를 틀어놓고 눈을 감아

내 안구

힘을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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