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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공방 Jul 03. 2019

나를 홀린 1900년대 비엔나

먼 나라, 생소한 도시의 100년 전 모습에 빠져버린 까닭 #덕질



내가 하고 많은 도시 중에 오스트리아 비엔나, 구체적으로는 1890년대부터 세계 일차 대전(1914~1918) 전까지의 이른바 '세기말 비엔나'에 매료된 계기는 꽤나 단순하다. 2016년 여름 비엔나에서 에곤 쉴레(Econ Schiele) 그림을 보고 전율하던 순간부터, 이 분리파 화가가 살던 1900년대 비엔나의 모든 것에 홀렸다.


어두컴컴한 레오파드 미술관(Leopard Museum)에서 오래도록 날 붙잡았던 두 그림을 소개하자면,


점잖게 절망하는 해 질 녘 풍경과

Egon Schiele - Setting Sun (1913)


남자가 아닌 본인의 쾌락을 위해 벗은 여자들이다.

Egon Schiele - Two Women in Embrace

대범함과 우울함 사이를 꾸밈없이 넘나드는 쉴레의 붓질 속에서 나의 내면만큼이나 혼란한 화가의 자의식과, 그 자의식을 형성했을 시대상을 읽을 수 있었다. 실제로 1900년대 비엔나는 1873년의 경제 위기 이후 팽배했던 각종 보수주의 (반유대교, 국수주의 등)로 인해 몸살을 겪고 있었다. 1848년 유럽을 휩쓴 혁명 이후 오래도록 유지되어오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드디어 자유주의의 물살을 타는가 싶었는데, 그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사회 전체가 패배감과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이 시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술을 대안 혹은 탈출구로 삼았다.


때문에 이때의 예술은 - 대부분 - 지극히 개인적이다. 과학은 충분히 발달하여 이성, 법, 진보에 대한 의식이 뚜렷한 가운데 정치적인 한계에 맞닥뜨린 근대 인간이 마침내 외부 사회가 아닌 내면으로 눈을 돌린 것이다.

경제 사회적인 해석을 제쳐놓고 예술적 진보만 살펴보자면 이때의 창작품들은 “예술을 위한 예술(art for art sake)”이라는 철학에 매우 충실하여 이전에 비해 수많은 도약을 이루어낸다.  쾌락주의(Hedonism)와 생활 전반에서 미를 추구하는 실용 예술이 등장했으며, 내가 지극히 선호하는 분리파(Secession) 미술사조가 유행하기 시작한다. 미술사적으로는 입체주의, 다다이즘에 비해 평가가 박하고 히틀러는 심지어 해당 사조를 '퇴폐 미술'로 취급했지만, 분리파 작품들들은 세계적으로 공예 발달과 훗날의 미술사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사실 다 사족일 뿐이고, 이때 유난히 내 맘을 뛰게 하는 그림들이 많다.


클림트, <의학> 내 히게이아 부분
에곤 쉴레, 초록 옷을 입은 소녀 드로잉

그 까닭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으로, 이때 표현된 여성들에게 스스로를 투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과 창작과 사랑을 하고, 본인이 가장 소중한 를.


분리파 예술 속의 여자들은 주체적이다. 본인의 일, 임무, 운명 혹은 쾌락에 충실하다. 그들의 타협 없는 당당한 표정에서는 어딘가 해방감이 느껴진다. 여성의 욕구와 욕망은 역사적으로, 특히 고귀한 미술이라는 맥락에서, 철저하게 외면받아왔다. 분리파 미술 사조가 대두되기 전에 '여성'이란 어여쁜 새, 꺾인 꽃, 어렵게 얻은 보석 마냥 의지라고는 없는 시각 대상으로 기능하였고, 대부분 다음과 같이 표현되었다.


Felix Trutat, Femme Nue (1844)

관객(주로 남성)의 소비 객체로서의 여성. 표범 무늬만큼이나 전리품으로서 기능하는 - 지극히 물건과도 같은 예술 대상. 이러한 관람 행태에 익숙한 우리 눈에 편안하게 아름다우나 그뿐이다.


초중고 및 대학교의 각종 미술사 수업에서 위와 같은 그림만 봐오던 나에게, 비엔나의 정숙한 미술관에서 마주친 이런 그림은 신선할 수밖에.


에곤 쉴레 드로잉


성기와 가슴을 다 드러내 놓고도 그녀는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대상화되지 않고 본인으로서 존재한다. 물론 이를 통해 성적으로 흥분되는 자들도 있겠지만 예술이란 본디 관객이 씹기 나름이다. 다만, 몸의 굴곡을 미화하지 않고 표현하는 뾰족한 펜선과 관객에게는 티끌만큼의 관심도 없는 모델의 건조한 시선으로 화자의 의도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그저, 그녀의 몸인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당대 가장 유명한 화가인 클림트에게서도 (다소 다른 노선으로) 찾아볼 수 있다.


귀족, 교회, 남성 등 어느 한 관람 계층에 소구하려 하지 않고 창작자 본인의 내면세계만을 충실히 투영하는 예술의 시작이 바로 이때였다. 분리파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내 고민과 몽상의 저변에서 헤엄하는 것 같은 느낌을 괜히 받는 것은 아닐 것이다.


1900년대 비엔나는 이러한 '사적 예술' 외에도 실용성 위주의 건축, 프로이트를 대두로 무의식의 영역으로 진입한 철학, 괴테의 틀에서 벗어난 문학, 기존의 화성을 재실험한 음악 등 여러 영역에서 두드러지게 발전하고 변모하였다. 현재 시점에서는 이때의 예술이 정체성(Identity)에 집중하는 현대 삶의 스타일을 형성하는 데에 일조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세기말 비엔나 삶의 양식 전반을 확인할 수 있는 집합체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분리파 운동에서 이어지는 Wiener Werkstätte (비엔나 공방내 작가명이기도 하다), 두 번째는 분리파 전용 잡지 Ver Sacrum(Sacred Spring, 신성한 봄이라는 뜻)이다.


비엔나 공방

비엔나 공방은 당시 개혁을 선도하던 화가 Kolomon Moser와 건축 Josef Hoffmann에 의해 창립되었으며, 미술을 일상 디자인 영역으로 영입시키면서 훗날 아르데코(Art Deco) 스타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들에 의해 미술관에서나 볼 수 있던 작품들이 책상 위로 올라온다. 유리잔, 도자기, 액세서리, 의자 및 가구 등 그들이 손대지 않은 영역은 없었다. 지금 봐도 단순하면서도 수려한 그때의 디자인은 지나치게 정교하지 않으면서도 어떠한 미적 기준을 추구하는 그때 당시 예술가들의 정신을 담아내고 있다. 재밌는 사실은 이들이 어느 한가한 일요일 점심, 멀쩡한 공방 하나 없는 비엔나의 (나머지 유럽 도시들 대비) 후진적임을 욕하다 홧김에 방 세 개짜리 공간에서 자기들끼리 공방을 시작해버렸다는 점이다. 역시 저지르고 봐야 한다.


잡지 <Ver Sacrum>

Ver Sacrum은 분리파에서 1989년부터 1903년까지 출간한 잡지인데, 표지부터 서체, 판화 및 그림, 글, 시 모두 분리파 예술가들이 참여한 것이라 단순히 '잡지'라고 일컫기에는 한 장 한 장이 지나치게 예쁘다. 지금 출판되고 있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정기 구독할 것이 틀림없다.




에곤 쉴레1900년대 비엔나, 라는 어떤 한 예술가와 시대상에서 받은 영감은 삶과 예술을 대하는 내 태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다른 무엇보다도 지극히 개인적인 예술이라는 점 - 즉 다른 누구도 아닌 본인을 위한 창작이라는 사실이 이 시기의 모든 작품을 흥미롭게 만든다. 내가 만들어내는 글, 그림, 음악 또한 특정한 독자를 '타깃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 나를 괴롭게 혹은 즐겁게 하는 것들을 가장 사적인 형태로 표현해내면, 그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내면 관찰의 계기가 될 것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내가 태어난 1992년에서 딱 100년이라는 시간을 뒤로 감고 비엔나로 훌쩍 떠나면 만날 수 있는 그때의 그 도시가 품고 있는 매력은 무궁무진하다. 언젠가는 나도 나만의 공방을 차리고, 내가 덕질하는(!) 것들을 엮어 잡지와 같은 형태로 출판할 것이다. 그 길의 시작점이 이 글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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