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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방진 백조 Nov 22. 2021

거꾸로 산책

            늦가을의 초대

거의 같은 시간의 출근길,

현관문을 열고 튀어나와 내려오고 있는 엘리베이터를 잽싸게 눌러 탄다.

‘아.. 안녕하세요.’ 위층 아주머니다.

길게 내려뜨린 스카프가 세련되고 맵시 있으시기에

오랜만에 뵙는다며 스카프가 멋있으시다고 했더니

얌전한 생김새에서 나올 법한 조용한 목소리로,

‘아싸! 성공했어!’ 라며 주먹 쥔 오른팔을 아래로 내리꽂으신다.   


(어디 방송국의 PD 시라는데, 거의 밤에 서로 푸석하고 지쳐 보이는 얼굴로 마주쳐 목인사만 주로 했던 차라 오늘 아침의 대화는 다소 긴 것이었다)


그 모습이 동심(童心)스러워 후훗 하고 웃었더니, 따라 웃으신다.


*

밖에 나오자마자 콧등과 귓불에 닿는 알싸한 아침 공기.

후다닥 빨리, 숲길로 접어들기 위해 잰걸음으로 속도를 내는데,

 

맞은편 아파트 길에 노란 영화가 펼쳐지고 있었다.


노란 은행나무 아래,

노란 은행 비를 맞으며,

노란 아이들을 태우고 있는 노란 버스.

배꼽인사를 하는 노란 아이들과 창을 향해 건네지는 엄마들의 노란 손 인사.


지켜주고 싶은 동심과 지켜주고 싶은 풍경.

노란 평온함에 마음에 왈칵, 온기가 인다.  


그리고 이 날...

가을에게서 시간을 돌리는 초대장을 받았다.




점심시간에. 정말 오랜만에. 회사 근처 공원에 가보고 싶어졌다.

2년 만이었다.


노인분들이 생동감을 부여하고 있는 공원이었다.

코로나 전에는 점심시간에 잠깐 걷기도 하고, 엄마를 불러 김밥도 먹던 곳이다.

공원 입구에 요구르트 아줌마도 계시고,

플라스틱 바구니를 늘어놓고 천 원짜리 물건을 파는 아저씨도 계셨다.

삼삼오오 모여 바둑대결을 하는 할배 무리들과 등산복 차림으로 몇 번이나 공원을 도시는 할머니들.

추운 겨울에도 나시티를 입고 체조 선수처럼 철봉을 잘 도는 할아버지도 계셨던 곳인데,

코로나 때 갔을 때는 입구를 막아놓아 노인분들이 만들던 생기도 없고 죽어 있었다.

그 이후 나 또한 갈 생각을 안 하고 있던 차였다.  


오랜만에 찾아간 공원. 들어서는 순간, 너무 좋아서 '아..' 하는 탄성이 나와 버렸다.

바둑 할아버님들도, 둘러앉아 얘기 꽃을 피우는 할머님들 무리도, 철봉 하는 근육짱 할아버지도 없었지만,

나무들은 왠지 더 무성해있고, 그들이 뿜는 신선한 공기는 공원 앞 쪽부터 끌어 차 있는 것 같았다.

늘 가던 코스대로 움직여본다. 너무 신나서 나뭇잎 사이 햇빛을 따라 쬐어 가며 걷고 있는데,  


회사 근처, 울창한 가을

불쑥 톡이 뜬다. 선물 유효기간 만료 안내 문자.  

초콜릿 케이크 위에 빨간 딸기 하나가 빼꼼히 고개를 내민다.

언젠가 생일이면 살가운 파이팅 메시지와 함께 선물을 날려주곤 했던 그로부터의 선물이었다.

몇 차례 보내준 생일 케이크는 이미 다 사용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귀여운 한 녀석이 남아 있었나 보다. 시시 미소가 떠오른다.


*

그는 첫 사회생활 입사 동기, 같은 본부 소속이었다. 심지어 같은 대학을 다닌 것은 회사 와서 알았다.

공채로 입사한 100여 명 중 가장 빨리 퇴사할 것 같았던 나는 같은 회사에서 10여 년이 넘게 일하며

시조새로 남았고 (퇴근하고 집에 오면 회사 못 다니겠다고 한동안 매일 울었던 내가 말이다)

그는 1년여를 다닌 후 모교의 홍보실로 가며 퇴사했었다.


나이 차이는 많지 않은 데 이상하게 10살 정도는 더 많은 듯한 큰 오빠 같은 의젓함이 있던 그는 동기들 사이에서도 다정하기로는 최고였던 것 같다. 한 달 정도의 신입사원 입문교육 시절부터 신입시절 1년여 동안 ‘남매 크로스’ 유치뽕 하며 친하게 지냈다.


그의 퇴사 후, 직접 따로 만난 적은 없지만, 모교 메일이 정기적으로 오는 지라 그렇게 멀게만 느껴지지도 않았었다. 다시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했던 것은 2년 전 내 생일 때부터였는데 코로나가 시작되며 연락이 또 뜸해졌었다.  


*

톡을 보내 인사를 하니 어제 만난 사람처럼 반가워한다.

근황을 오고 가니, 20대 무렵의 지난 시간들이 손을 들고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는 바로 그 날, 올해의 첫 캐럴을 듣기 시작했는데, 

내 연락이 크리스마스 선물 같아 너무 설렌다고 했다.


만날 날짜를 정했다.

12월 그의 생일 즈음이다.




못 보고 지낸 무려 15년의 시간이 필름 되돌려 감기를 하며 내 앞에 놓인다.


애쓰지 않아도 대화가 핑퐁처럼 오고 가는 사람과는 산책이 하고 싶다.

맑고 순수했던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과는 산책이 하고 싶다.  


20대의 꿈을 곱씹고 어수룩하던 그 시절,

그 서툼을 얘기 나눠도 좋을,

그 와는 -

산책을 해도 좋을 것이다.


한걸음 한걸음, 그때의 우리에 대해

서로 실수한 거나. 그땐 촌스러웠지. 라던가 하는 말들을 주고 받으며 웃기도 하겠지.

이야기 꽃 안에서 20대의 우리들도 샘솟겠지.


공원의, 내가 좋아하는 야트막한 언덕.

소나무들이 빙 둘러서 있는 곳의 떨어진 솔잎 위를 걷는다.  

푹신푹신한 걸음마다 추억이 퐁퐁 피어난다.  


한 바퀴, 두 바퀴. 돌며,  시간이 거꾸로 가는 상상을 해본다.


30대의 어느 때로, 20대의 출근을 하던 어떤 날로.

한 바퀴 돌 때마다 1년씩 젊어지는,

달팽이 계단을 돌고 돌아 내려갈수록

점점 더 젊어지는 상상을 해 본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영화가 생각났다.


꼬불거리며 동심으로 돌아갈수록

추억을 얘기할수록. 더 순수하고 맑게.

거꾸로 거꾸로...


가을이 준 젊음으로의 초대,

<거꾸로 산책>


지나가는 가을의 끝자락에, 노오란 인사 한번 건네니,

가을이 주고 떠나는 선물인가 보다.   




  ♬ A New Life / Alexandre Desplat

                                       A  New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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