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호돌이(My Bro) 녀석이 PM 11:58분에 냅다 뛰어들어와 아슬아슬하게 세이프했을 때 빼고는
이 시간을 늘 함께 차분히 준비한다. 그 해의 케이크를 고르고, 오는 해의 뒷 두 자리 숫자만큼의 초를 꽂는다. 10부터 1까지 두근거려하며 ‘새 날의 축포’와 함께 맞잡은 손을 아버지를 향해 올리며 ‘파이팅!!!’ 새해도 잘해보자! 외친다. 닮은 웃음들 한바탕.
난 이 시간이 좋다. 적당히 친절하게 숙성된 와인 한 모금을 입 안에 머금고 돌릴 때 퍼지는 그윽한 향기 같은. 우리가 건강히 함께 있음이 감사한 그런 편안함이다.
올해는 랜선 카운트다운을 했다.
엄마와 나는 우리 집에, 호돌이는 호순(Baby♥로 저장되어 있는 여친)이와 있었기에 영상통화로 새해인사를 나눴다. 신선하다. 이 방법도 재밌다. 전화를 끊고, 엄마와 나는 부둥켜안고. 서로 '고맙다느니. 건강하시라느니. 살찌지 말라느니. 돈벼락 맞자느니. 너나 부자 되고 잘 살라느니.' 장난스러운 대화를 나누며 케이크를 가열차게 푹!
올해의 케이크는 당근 케이크. 소복이 쌓인 아이보리색 크림치즈와 계피향이 사르르르~락.
첫 입의 그 달콤함은. 일 년 내내 우리의 매일매일이 이러하길 바라게 되는 맛이다.
조금 후에 집에 들어온 호돌에게 또 한 번 해피 뉴 이어 인사를 건네고,
다 같이 소파에 쪼르륵 앉아 케이크를 먹으며 영화를 보며 21년을 보냈다.
보통의 마지막 날 모습과 같아 행복한, 한 해 마무리 풍경.
새 날의 아침. 사랑스러운 호순이가 22년 속초의 첫 해를 담은 사진을 보내줬다.
하얗고 뽀얀 떡국은 대기 중. 엄마와의 가벼운 아침 산책으로 새해 초하룻날을 열어본다.
이른 아침 공기가 온통 하얗다.
무색. 무취의 2022 첫 바람이 뇌를 씻어준다 (상쾌해. 고마워)
동네를 빙 천천한 걸음으로 훑으며 숲길로 접어든다.
전나무에 다리 올리고 스트레칭 - 예쁜 돌고래 벽화 앞에서 찰칵 - 배드민턴 치는 젊은 부부를 지나 - 새로 생긴 우동 가게 구경 - '사람은 책을 만든다'는 서점 사진을 찍어, 책을 사랑하는 친구에게 새해인사와 함께 보내고 – 핸드메이드 액세서리 가게 앞 가판대 위 헤어 집게핀에 눈이 잠시 팔렸다가 - 떡국과 함께 구울 고기로 무엇을 준비하셨는지 어머니 말씀을 들으며, 흑맥주를 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벌써 흰 건물 도넛 가게에까지 도착했다. 쌀쌀한데도 일찌감치 나와 도넛 가게 앞에 줄 서고 있는 달달 커플들을 보니 달콤한 미소가 지어진다.
알싸하고 차가운 하얀 공기.
여지없이 1월의 칼라는 화이트 구나.
화이트. 아직 그려지지 않은 한 해의 첫 달.
내가 만났던 화이트들이 떠오른다. ‘초현실적인, 마법 같은, 웅장한, 경이로운, 가슴 벅찬, 아름다운, 설레는, 희망'의 화이트들.
# 캐나다 밴쿠버 어학연수 시절, 홈스테이 가족과 휘슬러(Whistler, 2010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스키여행을 갔다. 세계 3대 스키장인 휘슬러-블랙콤의 대표적인 슬로프, 이름마저 아름다운 7th Heaven (신이 사는 멀고도 신비로운 천국이라는 의미)에 도착했을 때 압도적인 겨울왕국의 모습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바로 위 하늘에서 내게 로프 하나만 던져주면 올라가서 천국 구경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블랙콤산(Mt. Blackcomb)에는 혼자 갔기에 그 멋진 설경을 전부 눈으로만 흡입하고 있는데, 탐 크루즈같이 생긴 아저씨(그렇게 믿기로)가 불쑥 다가와 사진을 찍어주셨다. 이적님의 노래 ♬하늘을 달리다 를 반복해서 들으며, 해발 2,284m에서 새하얀 벌판과 울창한 나무 숲 사이를 요리조리 헤치며 내려오는 1시간 내내 날아갈 듯 행복했다.
Whistler 의 화이트
# 혼자 한 겨울 유럽여행 중 스위스 루체른 리기산(Mt. Rigi, 세계 최초의 산악열차가 설치된 ‘산들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산) 정상에서 홀로 되었다. 산악열차를 타고 오른 사람도 네댓 명 정도뿐이긴 했지만, 열차에서 내리고 나니 다들 어딜 간 건지. 사방이 새하양. 보이는 것은 오로지 온몸을 때리는 눈보라와 나 하나뿐. ‘난 이제 여기서 죽는구나. 해발 1,797m 스위스 산 위에서 눈 속에 파묻혀 생을 마감하는구나’ 했었다. 지금도 어떻게 내려왔는지 불가사의다.
# 글라라 대모님과 갔던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 눈. 얼음축제와 노보리베츠 지옥온천, 하코다테의 거리들, 오타루의 오르골 가게와 운하 옆에서 얼음 축제를 준비하던 일본 소녀들과의 늦은 밤 대화는 반짝반짝 빛나는 우리들만의 추억으로 남아있다.
#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의 유명한 첫 문장.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와
미우라 아야코 ‘빙점’의 섬세하고 얼음 같은 문장들.
# 영화 <러브레터 Love Letter, 1995>의 나카야마 미호와 영화 <얼라이브 Alive, 1993>의 에단 호크.
# 유리 통창을 통해 들어오는 오후 햇살을 한가득 맞으며, 일어선 채 골똘히 업무 서류를 보고 있던, 내 여린 심장을 뛰게 하던, 화이트 셔츠의 내 마음속 키다리 아저씨.
그리고 이어진 화이트에 대한 기억은,
바로 ‘나’ 다.
어느 겨울. 한강을 따라 걷다가 갑자기 뛰어야 할 것만 같은 충동이 일었다.
흰 티셔츠를 입고 있던 내가 순간 전력 질주를 했다.
몇 미터 못 가고 헉헉 대며 멈췄을 때,
‘심’장이 ‘쿵’쾅거리고, 하얀 입김이 쏟아졌다.
내 심장 소리가 들리고, 내 심장이 매우 가깝게 느껴졌다.
왠지. 모든 걸. 모든 것을 다 -
전부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앞서 걸어 나가시던 엄마가 뒤돌아보며 내게 빨리 오라고 손짓하신다.
후훗. 엄마의 <심. 쿵. 화이트>는? 내가 알고 있다.
언제나 그 말씀을 하실 때면, 입가에 웃음끼가 어리는데,
그것은 두 분의 연애시절,
‘아빠의 화이트 셔츠 소매 걷어 올리기’이다.
지적인 문학청년, 20대의 아빠가.
화이트 셔츠의 소매단을 ‘척. 척. 척’ 3번 접어 걷어올리는 모습이 그렇게 멋있었다고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