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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여름, 남쪽 길 위에서 #1

다시 찾은 전북 부안, 변산

by 꿀아빠
고요 속에서 발견한 지난날의 흔적

올해는 유난히 일이 많았다.
숨 돌릴 틈 없이 달리다 보니 여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길게 떠나고 싶었지만, 허락된 시간은 단 5일. 늦었지만 꼭 떠나야겠다는 마음으로

가족과 함께 길을 나섰다.

부안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발길이 닿은 곳은 새만금 야영장. 작년 여름, 세계 스카우트 잼버리가 열렸던 자리였다. 아이들의 눈에는 그저 드넓은 들판이 전부였지만, 내 눈에는 그 여름을 떠들썩하게 했던 논란들이 겹쳐 보였다.


150개국에서 모인 4만 명의 청소년이 머물렀던 공간이 지금은 바람만이 스쳐 가는 고요한 평야로 남아 있었다.


자연과 인간이 남긴 길 위에서


야영장을 지나 차를 몰아 들어선 길은
끝없이 이어진 새만금 방조제였다. 세계 최장 33km, 인간이 바다를 가로질러 만든 거대한 제방 위에서 나는 잠시 경외심을 느꼈다.

이 길은 단순히 바닷물을 막아 세운 도로가 아니라,
개발과 환경 사이에서 여전히 수많은 논쟁을 품은 현장이었다.


방조제 끝자락에 있는 간척사업 박물관에 들어섰다.
아이들은 모형과 영상 앞을 잠시 서성이다 금세 여기저기 뛰어다닌다. 아직 지적인 호기심보다는 혈기왕성한 남아들의 기운이 더 강하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부안 누에타운이었다.
의외로 오늘 하루, 아이들이 가장 좋아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작은 누에들이 꿈틀거리며 고치를 짓는 모습을 아이들은 기대한 모양이던데 비록 실물은 없어서 아쉬웠지만
아이들은 눈을 반짝이며 여기저기를 둘러봤다

“아빠, 이거 진짜 신기하다!”
그 한마디에 나도 걸음을 멈췄다.



부안은 예부터 뽕나무가 잘 자라 양잠이 발달했던 곳이다. 누에에서 얻는 고치는 비단으로 이어졌고,
오늘날에는 화장품과 건강식품에까지 활용된다.
작은 생명 하나가 만들어내는 세계가
이토록 크고 다양하다는 사실에 나 역시 놀라웠다.

(부안이 이런 곳이라는 것은 처음 알게 됨)

잔을 기울이며 맞이한 석양


숙소로 돌아와 저녁 식사를 하러 나간다. 옆에 격포항서 회를 떠다 방에서 먹을까 잠시 고민했다가 뒤처리가

너무 귀찮을 것만 같아서 해안가로 나가본다.


바다 내음 가득한 조개 삼합이 불판 위에서 익어갔고,
입안 가득 바다의 풍미가 퍼졌다.
아이들은 저마다 집게를 들고
어른 흉내를 내며 분주하게 움직인다.

식사를 마치고 난 뒤,
바다를 향해 맥주잔을 들어 올렸다.
붉게 물든 하늘과 그 빛을 받아 반짝이는 바다,
잔 속의 맥주 거품까지도 황금빛 석양을 닮아 있다.
변산은 서해에서도 손꼽히는 낙조 명소라 했는데,
오늘의 하늘은 그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증명해 주었다.


그 순간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게 행복이 아니겠는가.”
멀리 가지 않아도, 거창한 무언가가 없어도
가족과 함께한 이 한 끼와 석양이면 충분했다.

(나만 잘하면 될듯하다 ^^;;)

짧지만 깊은 쉼의 시작

늦게 찾아온 여름휴가의 첫날이 이렇게 저물었다.
잼버리의 흔적과 거대한 간척사업,

작은 누에의 생명과 붉은 석양까지.
짧지만 풍성한 하루

내일은 또 다른 여정이 기다리고 있다.
휴가는 길이에 있지 않고,
그날의 밀도에 있다는 것을


※ 저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 기반으로

적어 내려 가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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