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한 무례함을 겪으며, 과거의 무례했던 나를 떠올리다.
솔직히 말하면, 한국에 있을 때의 나는 무례했던 순간들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내 감정, 내 상황, 내 위치 같은 ‘나의 것들’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순간들이 많았고, 그런 상황에서 스스로 어떤 우위에 있다고 느낄 때 무례함은 더 쉽게 튀어나왔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코트디부아르에 온 지 약 4개월이 지난 지금, 그때의 착각이 현실 앞에서 부딪히며, 더 이상 무례해지기보다는 오히려 무례함을 겪는 쪽으로 상황은 역전된 듯하다.
자세하게 설명하긴 어렵지만, 이곳에 와서 ‘글로벌한 무례함’을 제법 경험했다. 한국에서보다 훨씬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 탓도 있을 것이고, 지금의 내가 처한 상황이 한국에 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니면, 영어를 완전히 알아듣지 못해서 그렇게 느끼는 걸 수도 있고, 반대로 한국어는 너무 잘 알아들어서 더 예민하게 느끼는 걸지도 모르겠다. 이유가 무엇이든, 설명하기 어려운 찝찝함이 남는 대화들은 분명히 더 잦아졌다.
과거의 무례했던 나를 돌아보면, 그 근원에는 넘치는 자신감이 있었던 것 같다. 현재 상황에 대한 과도한 확신, 이뤄낸 것이 많다는 착각, 소속된 조직이나 직위가 주는 우월감, 혹은 내가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다는 오해. 그런 감정들이 겹쳐 있을 때, 나는 내 것을 지키는 데 급했고, 그 조급함이 무례함의 형태로 표현되었을지도 모른다.
’ 내로남불‘과 ’ 반면교사‘의 사이일까? 처음에는 이런 무례한 상황을 겪는 것이 당황스럽기도 했다. 나도 저랬을 수 있겠다는 생각과 앞으로 저러지 말자는 생각이 함께 들었다. 그래서 지금은 비슷한 장면을 마주해도 그냥 웃고 넘기려고 한다. 속으로는 가능하면 말을 섞지 않겠다고 다짐과 애초에 엮이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려고도 노력한다. 부딪히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겠지만, 나의 경험에 비춰보면, 대부분은 자신의 무례함을 인지하거나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회사 안에서의 무례함을 마주할 때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가도, 특유의 같은 국적 사람들과 엮이며 겪는 무례함을 만날 때면 오히려 이곳에 조금 더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곳은, 내가 무례해질 수 없어진 대신, 무례하지 않으려고 선택할 수 있게 된 공간인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나는 예전보다 성숙해졌다고 말할 자신은 없다. 다만 분명한 건, 예전처럼 쉽게 무례해질 수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런지 무례함을 내려놓은 게 아니라, 잠시 숨겨두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젠 웃어넘길 순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