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도리에 가 보았어요
2016년 1월 5일 하도리 문주란로5길 34-2. 우리 일곱이 함께 한 2박 3일이 끝나는 날이다. 해녀박물관을 보고 세화오일장까지 들리는 것이 오늘의 공식 일정이자 우리들의 첫 제주 여행이 무사히 완료되는 순간이겠다. 아침을 먹고 나올 때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도 우리의 찢어짐을 슬퍼하는구나, 비의 의미를 왜곡하는 멤버는 아무도 없었다.
해녀박물관을 돌아보고 세화오일장을 구경한 뒤 모녀끼리 흩어지기로 했다. 나랑 내 딸은 잠시라도에서 원래 계획했던 남은 시간들을 채울 것이고, 친구 2호는 딸 둘을 데리고 성산에서 1박을 한 뒤 서울로 간다. 그리고 친구 3호와 딸은 세화오일장을 끝으로 제주공항으로 향하는 일정이다. 그렇게 친구 1, 2, 3호를 포함, 일곱 명의 여인들은 마지막 조찬을 성대히 하진 못했고, 늘 그렇듯 먹다 남은 것들을 대충 끌어 모아, 성장기 아이들에게 매 끼 주어야 할 영양소들이 골고루 들어찬 식단은 각자 집에 가서 먹기로 한 채 가볍게 아침을 때웠다.
해녀박물관은 우리 민박집에서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거리다, 라고 말하면 거짓말을 아주 조금 보탠 것이고 우리가 그 동안 다녀본 곳들 중 그나마 가까운 거리였다. 택시 두 대에 나눠 타고 해녀박물관에 도착했고 박물관에서 시장까지는 슬슬 걸어서 갈 수 있었다.
이름도 방문도 처음인 해녀박물관, 생각보다 볼 것들이 많았고 해녀에 대해 무지했던 스스로에게 눈을 뜨게해 주었다. 그렇게 여러 번 제주도를 오고 가면서도 어쩌면 이렇게도 해녀를 몰랐을까, 그 무신경함이 놀라울 뿐이었다.
박물관이라고 하면 의례껏 ‘과거’, ‘이미’, ‘책에서나’, ‘대체로 남성들 이야기’ 로 인식되어 ‘아, 그랬구나’ 로 마무리되고 마는데 해녀박물관은 ‘지금’, ‘여기 이 곳’, ‘아직도 계속’, ‘제주도 여자들’ 로 이야기가 흐르고 있었다. 같은 여성이어서인지 해녀들 이야기와 맥을 같이 하는 어느 지점들이 느껴졌다. 육지에서든 섬에서든, 바다에서든 땅에서든 고단했을 여성의 삶과 현실이 읽혀, 박물관을 도는 내내 어떤 격한 감정이 불쑥불쑥 차고 올라왔다.
친구들 모르게, 딸들 못 보게 앞서가거나 뒤따라 붙으며 콧물은 들이 마시고 눈물은 머리를 올리는 듯 닦으면서 박물관을 빠져 나왔다. 일곱이 우산을 나눠 쓰고 세화해변을 향해 우르르 걸어가는데, 지난 2박 3일에 방금 보고 나온 해녀들의 이야기까지 오버랩 되면서, 이 시간들이 예고 없이 한동안 생각나겠구나, 어떤 그리움이 벌써부터 생겨나고 있었다. 무엇보다 우리가 같이 해녀박물관에 있었다는 것, 서울 여자들과 제주도 여자들의 오래 걸린 만남에 뭔지 모를 의미를 두고도 싶었다.
이제 헤어질 일만 남은 우리들에게 한낮의 오일장은 딱 알맞은 시간, 적당한 장소 같았다. 시장 특유의 활기찬 분위기와 높은 소리들, 새로운 볼거리와 침이 고이는 먹거리들을 한참 구경한 뒤, ‘안녕 잘 가, 서울에서 뒤풀이하자’ 이제는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작별까지 마쳤다.
딸과 나, 떨렁 둘이 남았다. 일곱이 점유했던 공기와 기운이 반도 안되게 줄어들어 뭐랄까, 시야가 좁아지고 호흡이 가빠지는 것 같았다. 언니 셋의 손을 번갈아 잡으며 기운찼던 딸은 어느새 내 턱밑에 바짝 붙어 서서, 이제 믿을 건 하나밖에 없구나 자기 엄마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해변을 따라 걸었다. 옥색의 바닷물이 곱고도 아름다웠다. 비는 여전히 흩뿌리고 있었고 백사장에 내려간 아이는 머리와 신발이 젖어가는데도 혼자 계속 놀았고 나는 바라보았다. 이제 우리 둘 뿐이다. 처음인 둘만의 여행, 이 시간이 퇴색은 되더라도 잊히지는 말기를, 너에게 또 나에게 계속 남아있기를 바랐다. 비는 잦아들었지만 바람이 불었다. 슬슬 이동해야 할 시간. 퇴근길에 이름난 빵집 빵을 사 들고 들어오던 내 엄마처럼 장을 봐서 들어가고 싶었다. 다시 시장으로 돌아갔다.
아이는 쪼그리고 앉아 우리에 갇힌 닭이며 새끼 강아지, 토끼며 새 들과 눈을 맞추고 말을 거느라 전진이 어려웠다. 그나마 다행인 건가. 언니들의 부재를 저 같은 아기 동물들이 달래 주었다.
천천히 시장을 돌면서 둘이 같이 먹을만한 것들, 조리해야 할 것 보다는 완제품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눈길은, 아직 밭에서의 색을 유지하고 있는 싱싱한 채소 다발, 좀 전까지 헤엄치며 놀았을 것 같은 생선, 말린 고사리 같은 나물 거리 등 싱싱한 색과 풍성함으로 향했다. 우리에겐 그림의 떡. 이리저리 발걸음을 옮기다 이거다 싶은 ‘돼지껍데기’를 골랐다.
아홉 살 여자 사람과 둘이 식당에 가서 밥 먹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고 낭패스럽다. 2인분을 시키면 1인분은 거의 남기게 되는 꼴이라 일단 외식은 포기. 당연히 유명한 맛 집이나 횟집, 고깃집 같은 데는 아예 꿈도 꾸지 않는다. 게다가 매운 음식 또한 아직, 아직이었다. 여행 동안 둘이 외식을 한 건 ‘테이블 오조’ 에서의 점심 식사, 그리고 1인분 주문이 가능한 성게미역국과 고등어 구이를 먹은 것이 전부였다(그러나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최고의 만찬과 오찬이었음을 확실히 해두는 바).
사 들고 갈 게 없으면 먹고 들어가는 방법을 쓰면 된다. 비도 오겠다, 멸치 육수가 끓고 있는 분식집을 찾았다. 혼자였다면 포장이나 해 왔을까, 아이에 힘입어 들어가, 잔치국수와 떡볶이를 주문했다. 시장통 국숫집은 물론, 주황색 포장을 들춰 열면, 훅, 김이 뿜어져 나오던 포장마차를 기억하는 나는, 먹는 동안이 익숙하고 재미있었다. 그런 엄마를 참아 주는듯, 묻히거나 흘리면서 국수와 물에 헹군 떡볶이를 먹고 있는 아이에게 ‘이런 게 다 추억이야, 추억 알아, 추억?’ 물어보았던가 생각만 했던가.
우리는 폭 좁은 나무 의자에 틈 없이 붙어 앉아 추억의 만찬을 마쳤다. 이제 저녁도 끝냈고 집에 가서 씻고 눕기만 하면 된다.
아이는 금세 잠이 들었다. 나도 졸음이 왔지만 있다가 없어진 그들의 존재들을 확인하고 싶었다. 데우지 않은 껍데기를 펴놓고(약간 식어야 더 쫄깃하다) 소주병을 돌려 깠다. 왁자했던 우리들의 소리가, 눈을 맞추며 내 앞에 앉아있던 친구들 얼굴이, 술잔을 주고 받으며 밤새 일으켰던 소란들이 정말 확실하게 눈앞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딸들이 하나씩 차지하고 앉았던 방이며 침대, 순서를 기다려 왔다 갔다 하던 화장실과 열고 닫던 현관문에서도 퐁, 퐁, 비누방울이 터지는 것처럼, 한 순간에 그녀들이 사라졌다. 아무도 없었다. 잠든 아이의 숨소리가 열어놓은 방안에서 고르게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