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션이 없는 세상

by 솔의눈

보고서 하나 쓰는 데 이틀이 걸렸다.


내용을 구성하는 데 이틀이 아니다. 포맷을 정하는 데만 반나절, 어떻게 전달할지 고민하는 데 또 반나절. 정작 내용을 채우는 시간보다 그 주변을 맴도는 시간이 더 길었다.


전 직장은 협업툴로 노션을 사용했다. 모든 커뮤니케이션과 보고서는 노션 안에서 이루어졌고, 부피가 큰 데이터만 구글 시트에 쌓아 노션에 임베드하는 방식이었다. 처음 노션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어려웠지만 금방 익숙해져서 개인 프로젝트와 포트폴리오도 노션에서 정리할 만큼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노션이 있을 때는 보고서를 쓰는 일이 이렇게 복잡하지 않았다. 새 페이지를 열고, 구조를 잡고, 내용을 채웠다. 공유는 링크 하나면 끝이었다. 형식을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노션 자체가 형식이었으니까.


현 직장은 노션을 사용하지 않는다.

입사하고 나서 팀장님이 노션 사용하는 게 로망이라고 하셔서, 팀 워크스페이스를 직접 개설하고 팀원들에게 노션 활용법 강의까지 했다. 그런데 전체 협업툴이 아니라 사용을 강제할 수 없었고, 계속 써봐야 익숙해지는 툴인데 다들 현업에 바빠 뒷전으로 밀리다 보니 결국 기존 방식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나름 공들여 만든 워크스페이스는 빈점포가 되었다.


노션 없이 보고서를 써야 하는 상황이 오자, 예상치 못한 벽에 부딪혔다.

PPT로 만들어야 할까, 워드가 나을까, 아니면 엑셀이 맞는 내용인가.

텍스트 위주의 내용이면 워드나 한글이 맞는 것 같은데, 이 회사 사람들은 어떤 포맷에 익숙한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PPT로 만들자니 내용이 슬라이드로 쪼개지기엔 좀 애매하다. 결국 PPT로 만들었다가, 워드로 다시 옮겼다가, 다시 PPT로 돌아왔다.


포맷을 정했다고 끝이 아니었다.

이걸 인쇄해서 들고 가야 할까, 메일로 먼저 드려야 할까, 아니면 화면으로 보여드리면 될까.

전 직장에서는 이런 고민이 없었다. 노션 링크를 공유하면 보고 싶을 때 보고, 코멘트를 달고, 히스토리도 남았다. 지금은 파일을 어떻게 전달하느냐부터가 판단의 영역이다. 인쇄를 해가면 왠지 더 격식 있어 보이지만 수정이 생기면 곤란하고, 메일로 보내면 꼼꼼히 읽어보실지 알 수 없고.

사소하다면 사소한 고민인데, 이게 쌓이니까 피로해진다. 보고서는 일을 하기 위한 준비단계인데 거기서부터 쓸데없이 고민을 많이 하고 있으니 일을 하는 것 같지가 않다.


툴 하나가 사라졌을 뿐인데 내가 당연하게 여겼던 워크플로우 전체가 흔들렸다.

노션이 단순한 메모 앱이 아니었다는 걸 몰랐다. 보고의 형식, 공유의 방식, 커뮤니케이션의 속도까지 전부 노션 위에서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빠져나오고 나서야 그 구조가 얼마나 많은 걸 대신해주고 있었는지 보인다.


적응하는 중이다. 이 회사의 방식을 익히고, 어떤 포맷이 통하는지 하나씩 파악해가고 있다. 인쇄물을 받아 줄을 쳐가면서 보고를 듣는 방식을 선호한다는 것도 이제 안다.

그래도 개인 자료는 여전히 노션에서 정리한다. 내 하루하루가 어딘가에 깔끔하게 정리되는 그 느낌이 좋다. 회사 노션은 포기했지만, 개인 노션만큼은 아직 못 놓겠다.

작가의 이전글올리브영이 광화문에 웰니스 매장을 낸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