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어린 시절은 어땠나요
또 한 번의 명절이 지났다.
이제는 한 세대가 끝나고 다음 세대로 나뉘어 각자의 환경에서 살아가다 보니 어린 시절 한자리에 모이던 가족들이 다 함께 모이는 게 쉽지 않다. 올해는 작은 외삼촌 가족들과 조카, 우리 가족들이 조촐하게 산소에 모였다. 차례를 지내고 가지고 온 음식을 나누어 먹고, 가을을 느낄 수 있을 만한 곳에서 차를 마시며 쉬다가 헤어졌다. 다음 명절이 되면 또 이렇게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산소에 모여 안부를 묻겠지
어린 시절 나는 외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결혼한 딸내미가 힘들게 되자 방 한 칸을 내어주신 거다. 생각해 보니 4명의 가족이 지금은 원룸이라 불리는 ‘단칸방’ 살이를 한 것이다.
시간이 흘러 건물을 짓게 되었고, 우리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작은 외삼촌 가족과 같은 건물 4층, 3층, 2층에 나란히 모여 살게 되었다. 당시의 나는, 대가족을 이루고 사는 것은 누구나의 평범한 일상인 줄로만 알았다.
우리는 수시로 위아래를 오가며 예전과 같은 생활을 했다. 단칸방 시절에도, 분리되어 하나의 가구를 이루었을 때도 가족들과의 대화는 변함이 없었다. 기억 속에 엄마, 할머니, 오빠는 영화를 정말 좋아했고, 늘 영화 이야기, 책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4살 터울의 나는 어쩌다 보니 또래와는 다른 노래들을 알게 되고, 영화를 보게 되었으며 조금은 다른 세상에 살고 있었다.
나고 자란 곳이 신촌이다 보니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었고, 정치와 사회 이야기는 매일 빼놓을 수 없는 대화 주제였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 노래 책이 있었고 당시 국민학교 저학년이던 나는 가요는 몰라도 민중가요는 알았다. 신문을 읽고 정치를 논하고 사회를 걱정하고 학생운동을 하는 청년들을 보호하고 매일 다양한 주제로 대화하고 서로의 생각을 나눴다.
물론 어린 나는 서당개였고 귀동냥을 하며 자랐다.
각자의 방보다 한곳에 모여 하루를 나누고 이야기하다 보니 서로 늘 붙어 지냈다. 다 큰 성인이 되어서도 각자의 일터에서 돌아오면 항상 거실에서 모여 지냈다. 방은 잠을 자기 위한 곳이었을 뿐, 개인 공간의 필요성도 크게 느끼지 못했다. 돌아보면 정말 개인 생활이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지인들이 “OO야, 너희 집이 정말 특이한 거야”라고 했지만 무엇이 특이한 건지 몰랐다. 내가 경험한 환경과 문화들은 지극히 주관적 세계이지만 나에게 있어 객관적 세계였으니.
명절 때는 늘 외가와 지냈다.
엄마가 가정을 꾸리기 전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었고 큰아빠, 삼촌 모두 돌아가시고 안 계셨다. 할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때 췌장암으로 돌아가셨는데 둘째 며느리였던 엄마는 아빠의 사업도 책임지고, 가정도 책임지고, 할머니 병간호까지 하시며 정말 바쁘게 살아내셨다. 명절과 제사는 모두 엄마의 몫이었고 일 년에 여러차례 엄마 혼자 제사 음식을 하던 기억이 있다.
다시 명절 이야기로 돌아와서, 명절 때면 외갓집에 이모네 가족들도 오후가 되면 다 함께 모였다. 늘 북적북적했고, 그곳에서조차 정치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늘 대화가 오갔다. 모이면 해마다 하는 일은 똑같다. 차례를 지내고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과일을 먹고, 다시 식사를 하고 윷놀이를 하고 쉬다가 헤어진다.
우리 같은 어린이들은 같이 있다가 윷놀이해서 번 돈을 들고, 유일하게 명절 때만 허락되는 오락실에 간다. 건물 지하에 오락실 & 만화방이 세 들어 있었는데 1년에 딱 2번 명절 때는 갈 수가 있었다. 테트리스를 하면서 동전을 다 쓰고 오면 아주 만족스럽게 나의 명절은 끝이 났다.
나에게 명절은 금기된 것들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자유시간이었다.
친구는 무슨 명절에 술도 안 마시고 고스톱도 안 치냐고 했지만 각자의 집마다 문화가 있고, 사정이 있기에 똑같을 수야 없을 테다.
그저, 어린 시절의 풍성한 대화와 함께하던 시간은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대화하기를 좋아하던 가족들은 여전히 이야기 나누기를 즐기고 있으며 서로에게 소중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 그것만으로 충분히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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