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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노비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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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인 Z Feb 24. 2021

영화의 티켓 값은 왜 똑같을까?

영화는 다른 어떤 예술장르에 비해서 접근이 쉽다. 

누구라도 말 한마디 보탤 수 있고, 

바로 그러한 쉬운 접근성으로 인해 파급력 또한 크다. 

파급력은 돈이 따라오고, 

그 돈을 위해선 대중성을 따라야 한다.

목놓아 외치는 천만 영화는 이러한 기획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많은 관객들이 보기를 원하면서 

대중의 기호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건 자기기만에 불과하다. 


애초에 돈을 떠나서 개인의 예술을 위해 영화를 제작한다면

투자를 받을게 아니라 후원을 받아서 만드는 게 맞다.

김기덕처럼 프랑스엔젤의 도움을 받든

홍상수처럼 자신의 자본으로 만들어야 한다.

자본에서 벗어나야 투자한 사람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만들 수 있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인건비 착취를 포장하는 짓은 이제 그만 듣고 싶다. 

그렇게 대단한 무언가를 만드는 거라면 함께 노력하는 이들의 노고는 왜 인정을 안 해주는 건가?

그 영광을 왜 같이 누릴 생각을 하지 않는 건가?


말을 그럴듯하게 하지만 결국 개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주변을 착취할 뿐이다. 


같이 만드는 사람들과 함께 의기투합해서 만들고 싶다면

그 스텝들과 지분을 나누면 된다. 

허황된 바람이 아니라

이미 <부러진 화살>이라는 영화를 만들면서 

부족한 인건비를 지분을 나눠주면서 해결한 사례도 있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의 열정 없음을 논하기 전에

과연 그들과 몫을 나눌 생각은 했는지,

그들의 역할을 동일하게 소중하게 여겼는지,

자신과 같은 열정을 원한다면

함께하는 이들의 불우한 처우를 자신도 똑같이 감당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영화는 인간이 향유하는 문화 중에 가장 가성비가 뛰어나다.

적은 돈을 들여서 문학, 철학, 미술, 과학, 기술, 정치를 아우르는

다양한 요소들을 한 번에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런 자본주의적 상상력의 당연한 결말인 

가성비가 뛰어난 영화의 등장과 함께 발전을 해왔다. 

같은 티켓값을 지불하는 상황에서

이왕이면 더 좋은 이야기와 더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는 영화들의 쏠림 현상은 

당연한 수순 아닌가?


주식 투자를 시작하고 나서야 

투자한 돈에 관해서 알고 싶어 하고 

간섭하고 싶은 심리를 이해했다. 

자본에 예속되고 싶지 않다면, 

그 자본에서 벗어나서 할 수 있는 방향을 고민해야 한다. 

자신의 뜻대로 경영하고 싶어서 기업공개를 하지 않는다는 

어느 창업가의 말이 진리다. 


대중영화와 포퓰리즘에 대해서 욕하지만  

정확한 타깃층 분석과 그들의 니즈와 시장을 고려해서 영화를 기획하는 곳을 정말 만나고 싶다. 

200억을 들이든, 1억을 들이든 티켓 값이 똑같으니 

최대한 쥐어짜서 저렴하게 찍으려는 마음은 

결국 자본주의 아래에서 예술이 아닌 상품을 만들고 있다는 반증 아닌가? 

파는 물건의 가격이 고정되어있고, 

한국 시장의 극장 수익만 바라보는 상황에서는 한계치가 명확하다.

그러니 비슷비슷한 이야기들만 넘쳐날 수밖에 없다. 


대중을 탓할게 아니라 

영화를 같은 값으로 멀티플렉스라는 한정적인 공간에서만 

소비하게 만든 시스템을 탓해야 한다. 


내가 아는 한 영화를 제작하는 모두가 천만 관객을 간절히 바란다. 

코로나로 인해서 OTT 플랫폼이 급성장을 하였다. 

이 위기가 지나도 한번 바뀐 소비 습관이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아니, 이미 코로나 전에도 곧 OTT로 풀릴 영화니 

극장에서 보지 말라는 의견들이 종종 올라왔다. 

콘텐츠 시장이 강제로 넓어졌지만 그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는다. 

해외 마켓이라곤 영화제 출품 외엔 별다른 시장 개척에 대한 노력을 하지 않았으니 

그 관성 그대로 넷플릭스에서 사들이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다.  


넷플릭스가 한국 영화계를 먹여 살린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할리우드 배우 개런티 한 명 분으로 <승리호> 같은 걸 만들어 내는데, 

매주 새로운 콘텐츠를 제작해내야 하는 입장에서는 

가성비 끝판왕인 한국의 투자를 늘리는 건 당연하다. 

더구나 코로나로 인해서 제대로 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건 한국밖에 없는 상황이다. 

시국이 안정화되고 중국과 인도, 태국, 필리핀 같이 더 뛰어난 가성비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곳이 생겨난다면

자본이 이동하는 건 그들이 변심해서도 아니고

투자의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선택이다. 


넷플릭스는 최초의 합의된 금액 이외에

추가 수익배분을 하지 않는다.

만들어서 팔면 끝인 것이다. 

한국의 모든 제작사가 차곡차곡 하청업체로 변해가고 있다.  


그동안 메이저 투자사들은 오히려 솔직했다. 

하루의 물리적인 극장 상영 횟수 때문에 2시간 30분 이상 길이의 영화를 반기지 않았다. 

자주 그 이하의 길이로 편집을 할 것을 요구했다. 

영화관의 위치가 대부분 쇼핑몰에 있는 건 

계속해서 적자를 보는 영화를 투자하는 목적이 영화 자체에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광고 효과가 분명한 배우를 원했고, 

한 명의 배우가 불러 모을 수 있는 관객수가 제한 적이니 

아이돌도 적당히 끼워주길 바랬다. 

멀티플렉스 극장은 영화를 쇼핑을 위한 미끼상품으로 여긴다.

티켓값보다 팝콘이 더 비싼 건 그들이 무엇으로 돈을 버는지 명백히 알 수 있다.

영화의 티켓값이 똑같은 건 

영화를 극장이라는 부동산 기반의 공간을 즐기기 위한 

서비스의 개념으로 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바람과 다르게 영화를 예술로 소비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시스템도 감독이 거대한 돈을 들여서 예술을 하길 원하지 않는다. 

그동안 나는 내가 예술을 한다고 착각을 하며 시스템 속에서 착취를 견뎌왔고,

이제는 그러지 않기로 한다.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건 내 이야기를 누군가가 

그것도 많은 사람들이 들어주길 바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형식이 꼭 극장 상영을 요구하는

기존 시스템일 이유는 사실 없었다. 

시스템에 적응하려 애쓰면서 

남들과 비교하며 우울했고,

정작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잊어갔다.


책을 쓰라 던 지인, 

유튜브를 해보라는 후배, 

청약을 넣으라고 현실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친구의 말이 옳았다. 

그들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알았고, 

방황하는 내 마음을 보았다. 


내 안의 이야기를 잊은 채 

자본이 원하는 이야기를 하려니 나는 제대로 된 글을 쓸 수가 없었다. 


‘걸캅스’ 같은 영화가 페미니스트 영화로 취급되고, 

남녀 성별만 바꾸고 여성영화로 둔갑한 ‘차이나타운’ 같은 영화가 만들어지고, 

‘82년 생 김지영’을 매갈 영화라고 불매하는 사회에선 내 자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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